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경주 양동마을, 영남 4대 길지로 손꼽혔던 마을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양동마을이다. 안동 하회마을, 천전마을, 봉화 닭실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영남 4대 길지로 손꼽혔던 곳으로 하화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조선 전기에 터를 잡은 전형적인 반촌(班村)이다. 조선 성종 때 손소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 마을에 들어왔으며 회재 이언적의 아버지인 이번이 손소의 사위가 되고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모여사는 대표적인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에는 조선중기에 지어진 고택인 송첨종택, 무첨당(보물), 관가정(보물), 향단(보물)을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고택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사적)과 이언적이 살았던 독락당(보물), 손중돈을 모신 동강서원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

<마을 안쪽 두곡고택에서 본 마을 풍경>

마을은 태백산맥이 형산강을 만나서 끊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형산강이, 서쪽으로는 기계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해안에서는 상당히 넓은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다. 큰 하천의 중상류 지역에 산을 등지고, 하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송소종택이나 무첨당(보물)같은 종가를 중심으로 양반가옥과 소작농 가옥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으며, 전망이 좋은 곳에 정자와 서당 등이 들어서 있다. 마을은 안계라는 작은 개천이 마을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데 마을 입구  주변을 하촌, 안쪽을 거림, 서쪽 2개의 골짜기를 물봉골, 안골이라 부른다. 마을입구 하촌 언덕에는 마을을 대표하는 대저택인 관가정(보물), 향단(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안골에는 마을 경주손씨 종가인 송첨종택과 후손들의 저택들이, 물봉골에는 여주 이씨 종가인 무첨당을 중심으로 후손들의 저택들이,두림에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후손들의 저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경주 양동마을>

<마을 입구>

<마을입구에 위치한 초등학교>

<관가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마을 옆을 흐르는 기계천과 멀리 형산강이 보인다.>

<경산서당 부근에서 보이는 안강평야>

 하촌(下村), 마을 입구

양동마을 입구를 하촌(下村)이라 부르는데 작은 개천을 중심으로 서쪽 언덕에는 큰 저택을 중심으로 주택들이 들어서 있고, 동쪽 언덕에 강학당, 심수정, 안락정 등 마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과 휴식공간 등이 주로 자리잡고 있다. 마을을 대표하는 대저택인 향단과 관가정이 마을 입구 전망좋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 병자호란 당시 쌍령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한 손중로(1598~1636년)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향단과 관가정은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인 손중돈과 이언적이 지은 조선중기 건축물이다. 맞은편 언덕에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후손이 조선후기에 지은 이향정 고택이 있으며, 대저택 주위에는 분가한 후손들이 지은 크고 작은 집들이 모여 있다.

<양동마을 하촌>

<마을 입구에 세워진 정충비각>

관가정(觀稼亭, 보물)은  형산강과 기계천이 흐르는 안강평야의 넓은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중기 고위관료를 지낸 손중돈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ㅁ’자형 건물배치를 하면서도, 왼쪽으로 누마루가, 오른쪽으로는 살림집이 확장되었다. 뒷편에는 손소를 모신 사당이 있다. 대문과 담은 원래는 없었다. 관가정 앞 언덕에 있는 정자나무 아래에서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고택 아래에서 보이는 모습>

대청마루는 사실상 누마루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삼면이 개방되어 정자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이 곳에 올라서면 형산강 주변의 넓은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동마을 관가정 사랑채>

관가정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분가한 집이다. 관가정 주위에는 많은 집들이 모여 있는데 분가한 후손들이나 관가정 살림을 도와주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다른 곳에 비해 주택의 규모가 작은 편이다.

<마을 입구 언덕에 위치한 관가정과 주위 고택들>

<관가정 오르는 길에 있는 초가집들>

<언덕에 있는 작은 초가집>

<관가정 아래 평지에 있는 초가>

<관가정 바로 아래 있는 작은 초가>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양동마을>

<관가정 아래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이 되었던 공터>

향단(香壇, 보물)은 마을 입구 낮은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대저택으로 조선중기에 지어졌다. 이 집은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부임하면서 병환중인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언적은 관직생활을 했던 그를 대신하여 부모를 봉양했던 동생 이언괄에게 이 집을 물려주면서 여주 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양동마을 향단(보물)>

향단 주위에는 분가한 후손들이 살아왔던 고택들을 볼 수 있다. 기와지붕을 하고 있는 비교적 규모가 있는 고택으로 아마도 여주이씨 향단판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단 아래에 있는 고택들>

<향단 아래 평지에 있는 마당이 넓은 고택>

향단 맞은편 언덕에는 양동마을 사람들의 후학양성을 위해 세웠던 서당들과 휴식공간 등이 주로 자리잡고 있다. 마을 입구 초등학교 부근에는 경주손씨 서당인 안락정이 있으며, 향단 맞은편에는 여주이씨 서당으로 사용되었던 심수정과 강학당이 자리잡고 있다.

<항단 맞은편, 입구에 관광안내소가 있다.>

<심수정과 강학당이 있는 언덕>

<심수정 아래에 있는 고택>

심수정(心水亭)은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 1560년 경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17년에 현재의 모습을 중건한 것이다. 여주 이씨 문중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서당역할을 했던 건물이다. 대청마루와 누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 풍경이 웅장하며,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마주 보고 있다.

<하촌 큰 길에서 보이는 심수정>

<심수정>

<심수정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

<심수정 뒷편 강학당으로 들어가는 길>

강학당(講學堂)은 구한말에 마을 여주이씨 집안에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작은 서당이다. 앞쪽에 있던 서당건물이었던 심수정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양반 집성촌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던 서당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강학당>

이향정(二香亭) 고택은 온양군수를 지낸 이범중이 살던 집으로 조선 숙종 때 지어졌다. 하촌 동쪽 언덕에 위치한 저택으로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하고 있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아래채, 방앗간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곡식을 보관했던 광을 많이 두고 있다. 조선후기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후손이 살았던 대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촌 큰길에서 보이는 이향정 고택>

<이향정 고택>

물봉골

물봉골은 향단이 있는 언덕 뒷편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마을 여주이씨 종가인 무첨당(보물)을 중심으로 규모있는 고택들이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여주이씨 후손 중 비교적 성공한 후손들의 분가하면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뒷편 안강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는 영귀정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정자들과 최근에 이곳으로 이전해온 경산서당이 자리잡고있다.

<양동마을 물봉골>

<물봉골 언덕에 위치한 무첨당(보물)>

<하촌 큰길에서 물봉골로 들어가는 길>

<언덕에 보이는 무첨당 안채를 출입하는 협문과 안채 담장>

<무첨당 아래 광장>

무첨당(無忝堂, 보물)은 회재 이언적 종가의 별채이다. 앞면 6칸, 옆면 2칸에 누마루를 달아내어 ‘ㄱ’자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조선중기에 지어진 건축물로 제사를 지내고 손님접대를 위해 사용되었던 상류층 주택의 별당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첨당(보물)>

<무첨당 본채>

<사당>

대성헌(對聖軒)은 18세기 중엽 이언적의 후손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이언적이 살았던 종가인 무첨당 옆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하고 있으며, 지형에 맞추어 전체적으로 남서향을 하고 있다.

<대성헌>

<맞은편 언덕에 보이는 대성헌>

물봉골에는 남향을 하고 있는 언덕에 종가인 무첨당과 큰 저택인 대성헌이 자리잡고 있으며, 맞은편 언덕에는 분가한 후손들의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집들도 많지만 집의 규모나 위치로 볼 때 분가한 후손들의 집으로 보인다.

<대성헌 맞은편 언덕에 있는 초가>

<대성헌 앞 물봉골 언덕으로 오르는 길>

<‘ㄱ’형을 하고 있는 한옥>

<언덕 높은 곳에 있는 큰 규모의 저택>

<작은 규모의 한옥>

경산서당(景山書堂)은 이언적의 손자 무첨담 이의윤을 배향할 목적으로 세워진 서당이다. 원래는 마을 안쪽 안계리에 있었는데 그곳에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종가인 무첨당에서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조선후기 서원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세워진 서당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산서당>

<경산서당 앞 고택>

<경산서당 앞 마당>

영귀정(詠歸亭)이다. 여주이씨 고택들이 모여있는 물봉골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회재 이언적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가 있던 곳에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왼쪽 2칸은 넓은 대청마루가,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영귀정>

<영귀정 너머로 보이는 안강 들판>

거림(居林)

거림은 하촌을 지나서 안골로 들어가기까지 마을 안쪽을 말한다. 하촌과 마찬가지로 서쪽 언덕과 평지에 집들이 들어서 있고 동쪽에 정자와 사당 등이 들어서 있다. 양동마을 중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서쪽 언덕은 이른 시기에 성공한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집을 짓고 살고 있으며 아래쪽 평지에는 후대에 분가한 후손들이 살고 있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가 섞여서 살고 있는 지역으로 다양한 규모의 고택들을 볼 수 있다.

<양동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

양동마을 안쪽 서쪽편 언덕에는 종가인 물봉골 무첨당에서 이른 시기에 분가한 후손들의 고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언적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의 고택과 양졸당 이의징을 기리는 정자를 비롯하여 큰 규모의 고택 등이 있다.

<많은 고택들이 있는 거림 서쪽편 언덕>

수졸당(守拙堂) 고택운 이언적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종가인 무첨당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17세기 초 광해군 때 처음 지어 졌으며 영조 때(18세기) 사랑채를 늘려 지었다. 대문채는 지붕을 사랑채보다 낮게 하여 격식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비교적 이른시기에 분가한 집으로 상류층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졸당 고택>

<무첨당 옆에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저택>

<뒷편에서 본 모습>

<수졸당 고택 아래에 있는 양졸정>

<양졸정 아래 고택들>

거림 동쪽편 언덕은 서쪽을 향하고 있어 고택의 거의 없으며 수졸당의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와 영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쪽 평지에 조선후기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지은 고택들이 있다. 18세기에 지은 대저택인 두곡고택이 대표적이다.

<두곡고택과 동호정으로 들어가는 길>

두곡고택(杜谷古宅)은 18세기 이언적 후손이 분가하면서 세운 집이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아래채가 튼 ‘ㅁ’자 평면을 하면서 주위에 부속건물들을 배치하였다. 마을 안쪽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한 오래된 종가와는 달리 낮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큰 규모의 대저택이다.

<두곡고택>

<수졸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두곡고택>

<뒷편에서 보이는 두곡고택과 동호정>

영당(影堂)은 수졸당 이의잠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636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3칸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앞쪽에는 제사를 위한 공간인 퇴간을 두고 있다. 전형적인 사당건물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영당 앞에는 재실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있으며 뒷편에는 이의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자가 있다.

<영당>

<영당 앞 재실>

<동호정>

두곡고택 입구를 지나면 평지에 비교적 많은 고택들이 모여 있다. 두곡고택같은 대저택도 있으며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한옥, 조그만 초가집 등 다양한 형태의 집들을 둘러 볼 수 있다.

<거림 안쪽>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

<문간채가 있는 집>

<평지에 있는 큰 규모의 고택>

<작은 규모의 한옥>

안골

안골은 조선중기 이전 양동마을이 시작되었던 곳으로 보인다. 경주손씨 입향조인 손소가 살았으며,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난 종가집인 송첨종택을 중심으로 낙선당 고택 등 분가한 경주손씨 후손들이 주로 살고 있으며 안골 입구에는 조선후기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지은 고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안골 입구>

안골 입구에는 분가한 후손들이 지은 고택들과 작은 초가집들이 모여 있다. 삼산고택을 비롯하여 근암고택, 상춘헌 고택, 사호당고택, 비슷한 규모의 고택이 있는데 모두 조선후기에 분가한 여주이씨 후손들의 저택이다.

<안골 입구>

안골 입구에 있는 삼산고택은 19세기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고택이다. ‘ㅁ’자형 건물배치를 하면서도 마당을 넓게 쓰고 있다.

<안골 입구에 있는 삼산고택>

<뒷편에서 본 삼산고택>

<근암고택 아래 안골로 들어가는 길>

근암고택(謹庵古宅)은 양동마을 안골 입구 경치좋은 언덕에 위치한 고택으로 조선후기 정조 때 지어졌다. 건물은 대문채,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분가한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주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근암고택 사랑채>

근암고택 옆에 있는 상춘헌(賞春軒) 고택은 마을에서 일반적인 건물 형태인 ‘ㅁ’자형 주택이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인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의 건물이고 앞쪽에 ‘-’자형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경사진 언덕에 꽃나무 등을 심어 정원을 적절히 조성해 놓고 있다.

<상춘헌 고택>

<상춘헌에서 보이는 안골 풍경>

<상춘헌 고택 아래 초가집>

사호당(沙湖堂) 고택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고택으로 구한말 건축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ㄷ’자형 안채, ‘-’자형 행랑채가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안채 옆으로 ‘-’자형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ㅁ’자형을 하고 있는 영남지방 한옥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사랑채를 옆으로 달아내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호당 고택>

<사호당 고택 옆에 있는 비슷한 규모의 고택>

<고택 아래에 있는 작은 초가집>

<안골로 들어가는 길, 언덕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고택들이 보인다.>

안골을 경주손씨 종가인 송첨고택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집들이 모여있어 조선중기 이전 양동마을 규모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송첨종택 아래 광장>

송첨종택(松簷宗宅)은 조선중기에 경주손씨 마을 입향조인 손소가 지은 집으로 아들 손중돈과 외손자 이언적이 태어난 유서깊은 고택이다. 이 집터에서 세명의 현인이 태어났다고 해서 풍수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건물은 ‘-’자형 대문채가 있고 그 안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ㅁ’자형을 하고 있다.

<송첨종택>

<종택 아래 초가집>

낙선당(樂善堂) 고택은 손소의 셋째 아들인 손숙돈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조선중기 중종 때 처음 지어졌다. 사랑채가 대문채, 아래채와 함께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와 안채가 ‘ㅁ’자형 본채를 이루고 있다. 집주인이 천석꾼이었다고 하며 많은 곳간을 두고 있다. 마을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저택에 속하지면 기난을 낮게 하고 건물들은 소박하게 지어졌다.

<낙선당 고택>

<낙선당 고택에서 보이는 안골마을>

창은정사는 안골에서도 제일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집으로 19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마을 고택 중에서는 비교적 늦은시기에 지어졌지만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대저택이다.

<창은정사>

<마을 안쪽길>

<중턱에 있는 초가집>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있는 큰 규모의 한옥>

<‘ㄱ’자형 한옥>

<초가집>

<반대편 언덕에서 보이는 안골>

<물봉골로 넘어가는 길>

이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여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1433-1484)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 손씨가 양동 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주 이씨는 찬성공 이번(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일이 많았다. 그동안 두 집안에서는 우재 손중돈(1463-1529)과 회재 이언적(1491-1553) 등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설창산 산줄기에 마을이 들어선 모양새가 독특하고 아름답다. 산에서 뻗어내린 네 줄기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기와집이 네 채나 남아 있어 눈여겨 볼 만하다. 집들은 대개 ‘ㅁ’자 모양인데, 이는 조선 중기 영남 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이다. 다양한 가옥의 조화는 우리나라 전통 역사마을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주변의 산, 들판, 강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함께 ‘하늘의 별처럼 늘어서 있는 마을의 고택(星羅古宅)’은 진풍경이다. 양동마을은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1984), 세계문화유산(2010), 형산강팔경(2016)으로 선정되어 보전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