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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한산성 행궁(사적), 광주부 관아에 설치된 국왕의 임시 거처

남한산성에 있는 옛 광주부 관아 건물이자 국왕이 임시로 머물수 있는 행궁이 설치된 사적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南漢山城) 행궁(行宮)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대에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을 축성할때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다. 여러곳에 남아 있는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을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행궁은 국왕의 거처로 정전과 편전에 해당하는 하궐과 국왕이 머무는 내전에 해당하는 상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광주부 관아 건물인 좌승당과 광주유수의 숙소라 할 수 있는 일장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왕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 수 있는 많은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여러차례 증축,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다가 최근에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남한산성 행궁 정문인 한남루(漢南樓)>

행궁은 원래 지역을 다스리던 관아에 국왕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곳이다. 남한산성 행궁 정문 또한 일반적인 관아 아문(衙門)과 마찬가지로 문루(門樓) 형태를 하고 있다.

<동헌 출입문>

남한산성 행궁은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서 조성해 놓고 있다. 문루인 한남루를 들어서면 행궁의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외삼문과 주위에 행각들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피신할 것을 전제로 지은 행궁이기때문에 많은 수행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행각에 많은 방을 두고 있다.

<마당>

아문을 들어서면 마당에 행각은 배치되어 있지 않고 작은 연못이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최근에 복원했기때문에 옛관아의 고풍스러운 멋은 없는 편이지만, 행궁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는 높은 곳이다. 일반적으로 관아 아문을 들어서면 동헌, 객사, 내아가 좌.우에 나란히 배치되는데 반해 행궁은 앞쪽에 지방관이 근무하는 동헌을, 뒷쪽에 국왕과 가족들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중문 안쪽 마당>

중문을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이 있고, 양쪽에 실무관원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이 마련되어 있다. 중문을 지나면 광주유수가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하궐로 들어가게 된다.

<중문 양쪽에 마련된 행각>

비상시 국왕을 수행하는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많은 방을 두고 있다.

<광주유수가 근무하는 동헌인 외행전을 출입하는 중문>

외행전은 행궁으로 사용시 국왕이 집무를 보는 공간으로 출입문은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외행전>

남한산성 행궁의 중심건물인 하궐 외행전 건물이다. 앞면 7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건물이다. 다른 행궁의 예로 볼 때 평상시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공간인 동헌의 역할을 하며, 국왕이 행궁에 머물때에는 국왕이 집무를 보는 정전과 편전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외행전 내부>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관아의 동헌과 비슷한 구조이다.

<외행전 마당>

다른 관아 동헌과는 달리 중문에서 외행전까지 국왕이 지나가는 삼도가 깔려 있다.

<외행전 마당 한쪽편에 위치한 창고 건물>

<행각>

창고 윗쪽에는 길게 늘어선 행각 건물이 있다. 평상시에는 광주유수부 관리들의 집무공간으로, 비상시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관리들이 머문는 공간으로 보인다.

< 내행전이 있는 상궐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계단>

<내행전>

국왕과 가족들이 머무는 침전 역할을 하는 내행전. 얖면 7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관아에는 없는 행궁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대청마루>

대청마루로 된 가운데 3칸은 국왕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거나 집무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어좌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놓여 있다.

<대청마루 왼쪽편 온돌방>

행궁 건물로 침실 겸 서재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대청마루 오른쪽 온돌방>

<내행전 마당>

내행전 앞에는 공식행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큰 마당을 두고 있지 않다.

<내행전 왼쪽 건물>

상궐 내행전 왼쪽으로는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머무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별도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

<내행전 왼쪽편 수행원들이 머물렀던 공간인 작은 건물>

<내행전 오른편 행각>

수행인원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다. 행각으로 보이는 건물로 직급이 낮은 내시 등의 수행원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인다.

<행각>

<좌승당>

내행전 서쪽편 담장 너머로는 광주부유수의 집무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좌승당이 있다. 건물은 앞면 6칸, 옆면3칸으로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주유수는 동헌인 외행전 대신 이 건물을 일상적인 업무공간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좌승당에서 종묘와 사직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좌승당 아래>

좌승당 아래쪽으로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건물인 일장각이 있다. 일반적인 관아 건물의 성격으로 볼 때 광주유수가 머무는 숙소인 내아에 해당되는 건물로 보인다.

<일장각>

일장각은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살림집으로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고위 관직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단심 부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아의 규모 또한 작은 편이다. 마찬가지로 각도 감영 관아의 내아 또한 건물규모가 작은편이다.

<일장각 대청마루>

광주유수가 머물던 공간임을 보여주는 가구배치를 하고 있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상당히 직위가 높은 인물로 대체로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머물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장각 온돌방>

<상궐 뒷편>

상궐 뒷편에 있는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숙종대에 세웠다는 재덕당 건물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 건물>

<정자가 남아 있는 남한산성 행궁 후원>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행궁은 산성도시 안에서 가장 중심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는데, 동.서로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으로 가려진 곳에 위치했다.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둔 두 영역인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고, 뒤에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설치했다. 이는 전국의 행궁 중에서 유일한 사례로 남한산서의 국가와 왕실의 보장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궁 뒤 언덕에는 숙동대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남한산성 행궁 안에는 광주유수의 집무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한산성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이기도 하면서 광주부의 행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재덕당 뒷편 언덕에 세워진 정자>

국왕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광주유수가 손님을 접견하기 위해 세운 작은 정자이다.


<후원에 남아 있는 고목>

<행궁 바깥쪽에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과 우실>

행궁(行宮)은 국왕이 궁궐을 떠나 전국 각지를 순행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를 말하며 행재소(行在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은 궁궐 밖에 머무는 경우는 지방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순행하는 경우와 전란을 피해 머무는 경우, 능행이나 신변치료를 위히 명승지를 찾는 경우 등이 있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국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물렀던 곳은 많았겠지만, 행궁으로 규모를 갖추었던 곳으로는 세종이 치료를 위치 찾았던 온양 행궁,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의 이유로 설치했던 강화와 남산산성의 행궁, 정조가 능행과 정치적인 이유로 세웠던 화성행궁이 잘 알려져 있다.

한강이남 일대를 다스렸던 큰 규모의 지방관청이 광주부 관아는 원래 남한산성 아래 하남시 일대에 있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한 거점인 이곳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조선초기 광주부에는 다른 지방과 같이 목사를 수령으로 두었으나 선조대에 부윤으로 승격되고, 정조대에는 정2품의 높은 직급인 광주유수를 수령으로 두었다. 광주유수는 관할 지역을 다스리는 일반적인 업무 이외에도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사조직을 지휘하는 수장의 역할도 겸했다고 하며, 남한산성에 약 4천명의 주민들과 산성을 지키는 병사 천여명, 산성을 축성하고 관리하는 승병들을 위한 7개의 사찰이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도시를 형성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