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내 동장대가 바라 보이는 상원봉 아래에는 조선시대 행궁터가 남아 있다.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양주목 관할이었기때문에 양주행궁이라 한다. 조선시대 중요한 행궁이었던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수원 화성행궁은 관아와 행궁을 겸하고 있지만, 양주행궁은 관아와는 별도로 북한산성내에 지어졌다. 양주행궁은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대에 지어졌는데, 행궁이 험한 산중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고 숙종과 영조가 잠시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행궁은 내전 정전과 외전 정전, 부속건물 등 총 124칸 규모였다고 한다. 북한산성은 그 규모가 크고 지형이 험준하여 유지.보수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수도를 방어하는 산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했기때문에 행궁 또한 유지되지 못하고 건물은 수해로 무너진 후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북한산성 행궁지(사적)>
북한산성 동장대가 있는 상원봉 아래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행궁터이다. 양주행궁이라 불렸던 이곳은 숙종대에 한양 도성 중심의 방위전략을 보완하기 위해 북한산 계곡에 산성을 쌓고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허물어지기 전 양주행궁 사진>
<북한산 계곡에서 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경리청 상창 터>
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는 산성에서 가장 큰 식량창고였던 경리청 상창이 있었다고 한다.
<창고 흔적>
이곳에 창고가 있었던 흔적으로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흩어져 있다.
<행궁으로 올라가는 길>
<계곡 주변으로 행궁 건물 흔적들>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돌로 쌓은 축대>
<북한산성 행궁터>
<발굴작업 현장 출입을 막고 있는 표식>
<등산로 주변에 볼 수 있는 옛 건물터>
기와를 비롯한 건축자재들이 건물터 주변에 흩어져 있다. 행궁에는 내전 정전과 외전 정전을 비롯한 총 124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행궁으로서는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행궁터에서 수습한 기왓장들>
<행궁 건물터>
<행궁에서 보이는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와 주변 봉우리들>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이다. 행궁은 전쟁 등 국가 비상상황시 왕이 잠시 피난할 때 머물거나 지방 순시나 휴양 등을 위해 지방관아에 설치한 임시 처소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행궁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조성한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등이 있고, 왕이 온천에서 휴양을 하기 위해 설치한 온양행궁과 이천행궁, 왕이 능묘에 참배를 하기 위한 화성행궁, 전주행궁 등이 있다.
<북한산성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서문>
은평구 일대에서 계곡을 따라 북한산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다. 북한산에는 대동문, 대성문, 보국문, 대남문, 대서문을 비롯한 많은 출입문이 있으며, 계곡이 흘러 내려가는 대서문이 주 출입문이라 할 수 있다.
<북한산성 중성문>
북한산성은 험준한 산과 계곡을 막아 조성한 산성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하는 주출입문인 서쪽방향으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상대적으로 방어에 취약한 지점이었기때문에 대서문 안쪽 행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벽을 쌓고 중성문을 두고 있다.
북한산성 선정비군,
이곳의 비석들은 북한산성 관리의 최고 책임자가 재임할 당시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로, 현재 26기 정도 남아 있다. 비석을 세워 비문을 기록한 선정비가 대부분이며, 따로 비석을 세우지 않고 암벽에 비문을 새긴 선정비도 있다. 이들 선정비의 건립시기는 모두 19세기인데, 이 시기 북한산성의 관리는 총융청과 무위소가 맡고 있었다. 이에 비문에는 해당 관청의 관리책임자였던 총융사와 무위소 제조, 경리사의 선정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서울시청>
<북한산성 선정비군>
산성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행궁터 부근 북한산성을 관리들의 선정비들을 볼 수 있다. 주로 19세기에 이곳을 거처간 관리들의 공덕비이다.
<북한산 산영루 터>
선정비 부근 북한산성 계곡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곳에 세워졌던 ‘산영루’라는 누각이 있던 자리이다. 일제강점기때 홍수로 누각이 떠내라간 이후 복원되지 않고누각을 받치고 있던 초석들만 남아 있다. 이 누각은 북한산성을 쌓기 이전부터 중흥사 아래 경치좋은 명소로 많은 명사들이 다녀갔던 유서깊은 곳이다.
<북한산 산영루의 옛모습>
<산영루 아래 북한산 계곡>
<중흥사 절터>
북한산성내 승병들을 지휘하던 승병대장인 총섭과 승병들이 머물던 큰 절인 중흥사 절터. 일제강점기때 홍수로 떠내려간 이후 최근에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중흥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원증국사가 머물때 크게 중수하면서 사찰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북한산성 행궁 아래 계곡>
행궁은 대서문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내 가장 큰 절이었던 중흥사를 지나 상원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북한산성 행궁권역
북한산성 행궁을 중심으로 경리청 상창과 관성소, 호조창 등이 있었던 곳이다. 행궁은 전란시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고, 관성소는 산성 관리를 총괄하는 주관 부서인 경리청의 산성 내 현지 현청이며, 상창과 호조창은 산성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식량창고였다. 이런 주요 시설이 조성된 ‘행궁권역’은 북한산성에서 제일 중요한 장소였으며, 위치상으로도 산성의 중심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출처:고양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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