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년)의 능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36년 동안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다.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중국 선현들의 초상화를 태학에 두었다. 당의 균전제를 본떠 자영농에서 정전을 지븍하여 재정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당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가 중단하기도했으며. 대동강 이남을 통일신라의 영토로 확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경주 성덕왕릉(사적)>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다 ( 702년 07월(음) )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래 이름은 융기(隆基)였는데,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고쳤다 『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고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효소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하고 이틀간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 조문·위로하고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형의 장군(將軍)·도독(都督) 칭호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성덕왕이 죽다 ( 737년 (음) )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밑둘레가 46 m, 높이 5 m로 조선 왕릉 봉분규모와 비슷한데 이는 신라가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정형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석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로 세워 받치고 있다. 둘레석 받침돌 사이에는 화강석을 입체적으로 조각해서 만든 십이지신상이 세워져 있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을 둘러세웠다. 무덤 주위에는 사자상과 문인석을 배치하였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받침돌이 남아 있다.
<둘레석과 삼각형 받침대>
둘레석이 돋을새김으로 한 다른 왕릉의 십이지산상과는 달리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각받침돌 사이에 세워진 십이지산상1>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돌난간>
정면에는 상석을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큰 편이며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형태이다. 신라 왕릉의 완성된 형식을 보여주는 38대 원성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성덕왕릉부터 정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분 앞에 있는 상석>
성덕왕릉에는 무인석 1쌍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하나는 일부만 남아 있다.
<무인석1>
<일부만 남은 무인석>
왕릉의 네모서리에는 4기의 사자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기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은 사자상, 문인상 등 석물을 배치한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사자상 1>
<사자상 2>
<사자상 3>
성덕왕릉비는 경덕왕 때(754년)에 세워졌다. 현재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이를 기준은 성덕왕릉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성덕왕비를 세우다 ( 754년 05월(음) )
5월에 성덕왕비(聖德王碑)를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9 신라본기 제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비를 세웠던 거북받침돌>
신라 성덕왕릉(新羅 聖德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김흥광)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兄弟峰)의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 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 (孝昭王)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唐)과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무덤은 밑둘레가 46 m, 지름이 14.5 m, 높이가 5 m이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입체 (立體)로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石獅子)와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십이지신상 2>
<십이지신상 3>
<십이지신상 4>
<십이지신상 5>
<십이지신상 6>
<십이지신상 7>
<십이지신상 8>
<십이지신상 9>
<십이지신상 10>
<십이지산상 11>
<십이지신상 12>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