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 세병로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사적)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조선후기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수군을 통할하던 통제가 있던 본진을 말한다. 통제영은 이순신 장군이 1대 통제사를 맡으면서 한산도 수군 진영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그 후 전란으로 여러곳으로 옮겨다니다 임진왜란 직후 통제사 이경준의 지휘로 고성현 두룡포로 옮겨졌다. 이경준은 이곳에 객사에 해당하는 세병관을 비롯하여 백화당, 정해정 등의 건물을 세웠다. 통제영은 고종 때 갑오경장(1895년)으로 폐영될 때까지 303년간 유지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 졌으나, 100여 동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1998년 이후 운주당을 비롯한 여러 관아건물들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을 ‘통제영’으로 줄여 부르던 데에서 통영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입구>
<통제영에서 내려다 보이는 통영항>
<통제영 들어가는 길>
<통영항 남망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통제영 공간배치>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사적
삼도수군통제영은 1604년에 설치되어 1895년에 폐영될 때까지 전라 충청 경상의 3도 수군을 지휘하던 본부였다. 임진왜란 때 제1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떠난 정유재란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져 지금의 통영시 두룡포에 자리를 정했다.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부임한 뒤, 제209대 통제사 홍남주(洪南周)까지, 무려 290년간 왜적에 대비하는 조선수군의 총본부로서 오늘날의 해군사령부와 같은 곳이었다. 1998년 2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사라진 건물들에 대한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운주당, 백화당, 병고, 중영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본영군은 의전을 치러는 중심영으로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객사인 세병관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문루인 망일루와 하급관리와 군사들을 위한 공간이, 서쪽에는 통제영을 운영하기 위한 물자를 제작, 공급하는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객사인 세병관 들어가는 길>
본영군
통제사가 제반 의전을 치르던 중심영역으로 통제영 영역 내에서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세병관은 통영시의 언덕 위에서 남해를 바라보며 있다. 그 거대한 규모에서 보여주는 위압과 권위는 이 건물이 승전에 대한 기념성과 군사적 기능이 동시에 추구되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구성을 살펴보면 전면에 내삼문인 지과문, 외삼문인 망일루가 있었다. 백화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뜰 안에는 석인, 기삽석통이 있다. 좌측에는 백화당과 잉번청이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망일루(望日樓)는 통제영 관아를 출입하는문루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다. 통제영이 설치된 직후 광해군 때 처음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통제영 유적지를 복원하면서 다시 지었다. 시간을 알려주는 큰 종이 걸려 있었다.
<망일루>
망일루(望日樓)
광해군 3년(1611년) 제10대 우치적 통제사가 세웠으며, 영조45년(1759년) 제128대 이국현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일명 세병문이라고도 하며, 통행 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커다란 종이 있어 종루라고도 하였다. 소실되었던 것을 200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망일루 옆에는 수량루라는 2층 누각건물이 있다. 원래는 통영 선착장에서 훈련 등을 위헤 숙종 때(1677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매립 등으로 옛 선착장이 없어지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수향루>
수항루(受降樓)
수항루는 2층 누각으로 통영성 남문 밖에 위치하였는데, 임진왜란의 승전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숙종 3년(1677년) 제58대 윤천뢰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수항루는 봄가을 군점(수조)때에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 받는 행사를 거행해 왔다. 해안매립으로 인해 선착장 원래의 모습을 잃어 버려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망일루 안쪽에는 하급관리나 군사들을 위한 2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좌청은 군관과 사병들이 대기하던 건물이며 산성청은 통제영이 있는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들이 근무했던 공간이다. 건물들은 통제영 유적지가 정비되면서 새로 지어졌다.
<좌청>
좌청(左廳)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건물로 대변좌청(待變左廳)이라 고도 하며, 제54대 신여철 통제사가 1689년에 좌청과 우청으로 분청(分廳)했다고 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산성청>
산성청(山城廳)
통영성(城)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종 44년(1718년) 제83대 오중주 통제사 때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던 것을 발굴 유구와 문헌에 의하여 최근에 중건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망일루>
세병관(洗兵館, 국보)은 조선후기 해군본부격인 삼도수군통제영 객사 건물이다. 건물 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60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수군 선박이 정박했던 통영항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건물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有大)가 쓴 글씨이다. 경복궁 경회루(국보), 여수 진남관(국보)와 함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로 역사성과 건축적인 측면에는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객사 출입문인 지과문(止戈門)>
<세병관에서 보이는 지과문>
<통제영 객사 건물인 세병관(국보)>
<세병관 내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공간>
세병관 앞뜰에는 영기와 장군기를 거는 깃대를 고정하는 돌기둥이 기삽석통(旗颯石桶)이 남아 있다. 사찰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와 기능을 하고 있다.
<기삽석통>
기삽석통(旗颯石桶)
세병관 앞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커다란 두 개의 돌기둥으로 정조 10년(1786년) 제 142대 류진항 통제사가 세웠다. 원래는 세병관 뜰앞 좌우 양편으로 2기가 있었으나, 현재 세병관 앞뜰 담장 부근에 서쪽 1기만 남아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세병관 마당에 있는 석인>
석인
숙종 27년(1701) 제 77대 류성추 통제사 떄 세병관 들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객사인 세병관 동쪽에는 일반적인 관아 동헌과 마찬가지로 통제사 집무공간인 내아군이 있다. 내아군에는 동헌에 해당하는 건물이 운주당을 중심으로 작은 집무공간인 경무당, 살림집인 내아, 병무를 관장하던 사무공긴인 병고(兵庫)가 배치되어 있다. 내아 뒷편으로는 통제영에서 직접 상평통보를 제작했던 공방인 주전소가 자리잡고 있다.
<통제영 내아군>
<동헌 출입문과 행랑채>
내아군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영역이다. 통제영 영역 내에서 중심에 자리하며 세병관 동쪽에 위치한다. 내아군에는 운주당과 이순신 장군의 영당이자 관사인 경무당이 자리하고 그 우측으로 살림채인 내아가 자리한다. 중앙의 관아와 달리 지방의 관아에서는 관리의 식구들이 살림하는 내아가 있어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공존하는 특징이 있는 곳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운주당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수영을 세울 때 집무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휘하 장수와 병졸에 이르기까지 작전은 논하던 소통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인조 때(1645년) 경무당과 함께 창건되면서 동헌건물을 운주당이라 이름지었다. 건물은 앞면 5칸으로 일반적인 감영 집무공간인 선화당에 비해 규모가 적은편이다. 통제영에서 객사인 세병관이 중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운주당>
<운주당 내부>
<운주당 온돌방>
운주당(運籌堂)
인조 23년(1645) 제21대 이왕 통제사 때 경무당과 함께 창건하였다. 운주는 ‘운주유약지(運籌喩幄之)’ 중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것을 말함이니, 즉 통제사가 통제영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운주당 옆에 앞면 3칸 규모의 작은 건물이다. 통제사가 일상적인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경무당>
<경무당 내부>
경무당(景武堂)
인조 23년(1645) 이완 통제사 때 지은 통제사의 작은 집무실인데, 경무당이라 한 것은 이충무공의 뜻을 크게 우러러본다는 의미에서 연유한 것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병고는 행랑채와 함께 하나의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다. 통제영 병무를 관장하던 공간으로 하급관리들의 집무공간인 것으로 보인다.
<병고와 행랑채>
병고(兵庫)
선조 37년(1604) 제6대 이경준 통제사 때 통제영 설치와 함께 세워졌다. 통제영 병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현재 대포, 창, 검 무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운주당 마당에 남아 있는 고목>
내아는 통제사가 거처하는 살림집이다. 통제사는 종2품에 해당하는 고위관직으로 가족없이 단신부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때문에 직위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내아 출입문과 행랑채>
<내아>
내아(內衙)
통제사가 거처했던 곳으로 지방관청의 안채에 해당한다. 현재 안방, 대청, 건넛방, 부엌, 찬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내아 뒷편에는 조선시대 동전을 만들던 공방인 주전소 터가 남아 있다. 상평통보와 도가니, 화로 등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등 주요 군사기관에서 화폐를 주조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통제영도 같은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물품을 만들던 공방과는 달리 통제사 집무공간 뒷편에 따로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엄격히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주전소 터>
주전소 북측
현재 남아 있는 형태로 추정해 보면 기단과 덤벙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벽체는 만들지 않았거나 거적 등으로 임시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초가 내지는 거적 등을 사용하여 만든 임시 건물 형태이다. 내부는 5~6기 정도의 용해로와 연접하여 송풍시설을 두어 주전작업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동전을 제작하는 모습>
주전소
통제영 주전소 유구는 조선시대 동전을 만들던 곳으로, 국내 최초로 조선시대 화폐인 상평통보와 도가니, 화로 등이 출토되었다. 통제영 내 공방지와는 별개로 통제사가 집무를 관장하는 운주당지 주변에서 확인되는 것은 특별한 관리, 감독을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주전소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뿐인 점을 참고해 볼 때, 통제영에서도 화폐를 주조했다는 새로운 실체가 확인된 것으로서 화폐사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주전소 뒷편 정자가 있는 공간>
세병관 서쪽으로는 통제사를 보좌하는 참모인 비장들이 근무하는 비장청 건물이자 손님들을 접견했던 공간이 백화당을 중심으로 통제영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했던 공방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통제영에서는 수군에 필요한 선박, 무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용품 등을 직접 제작했다. 전시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제작하는 인력들을 활용해 평상시에는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영을 대표하는 공예품인 나전칠기도 이곳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공방이 있는 공간 입구에는 관아를 상징하는 큰 느티나무를 볼 있다. 느티나무는 둘레는 5 m로서 수령은 400년 이상 추정되며, 통제영 창건 당시 심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느티나무>
통제사를 보좌하는 참모들의 업무공간이자 손님들의 접대하는 공간인 백화당이다.
<백화당>
<백화당에 전시된 통영연>
백화당(百和堂)
선조 36년(1603) 제 6대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 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裨將)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 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도 맡았으며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백화당 안쪽으로는 통제영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는 12공방이 자리잡고 있었다. 통제영에서는 전시를 대비하기 위해 많은 인원들을 두고 있었으며, 무기류를 비롯한 군수품은 물론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제작하였다. 철제 무기를 제작했던 야장방, 귀금속을 다루는 은방과 석방, 가구를 만드는 소목방, 장식화 등을 그렸던 화원방, 나전제품을 만들던 패부방, 버들고리 제품을 만들던 상자방, 망건 등을 만들던 총방과 입자방, 부채를 제작하던 선자방, 화살통을 만들던 동개방, 가죽제품을 다루는 화자방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제조업 대부분을 통제영에서 운영했다. 통제영이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화당과 12공방이 있던 공간>
12공방
제반 국기와 진상품을 생산하였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군수품 생산과 민생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조정에 진공품과 때로는 중국 가는 사신의 헌상품까지도 조달하는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 공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변방에서 각종 군수품을 자체 조달목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한산진에서 시작하였으나 (1593년) 임진란 이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까지 생산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잉번청>
잉번청(仍番廳)
숙종 14년(1688) 제66대 이세선 통제사가 건립하였으며, 통제영 공방의 건물이나 물건 등을 지키는 사람이 근무하던 곳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야장방>
<무기를 만드는 모습>
야장방(冶匠房)
쇠를 녹여 화살촉, 칼 등 병기 및 각종 철물을 주조하던 곳으로 19세기 초기에는 연마장, 도자장(刀子匠) 등으로 구성된 연마방이 별도로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은방, 석방>
은방(銀房) 석방(錫房), 은방: 금과 은을 세공하여 각종 장신구 제품을 만들던 곳, 석방: 주석과 백동으로 각종 장석을 만들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소목방>
소목방(小木房), 나무로 가구 및 문방구 등을 만들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화원방>
<화원방 내부>
화원방(畵員房), 각종 지도 및 군사적 목적의 의장용 장식화를 그렸던 곳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패부방>
<패부방 내부>
패부방(貝付房), 자개를 붙여 나전제품을 만들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상자방>
<상자방 내부>
상자방(箱子房), 버들가지 등을 엮어 상자를 만들던 곳이나 현재는 염장(대발) 공방으로 사용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총방, 입자방>
<총방, 입자방 내부>
총방(驄房) 입자방(笠子房), 총방: 말총을 엮어 망건, 탕건, 유건 등을 만들던 곳. 입자방: 흑립이나 벙거지, 삿간, 패랭이 등을 만들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선자방>
선자방(扇子房)
단오절에 임금이 하사하던 부채를 제작하였던 공방으로 부채의 형태에 따라 단선과 접선 그리고 별선으로 구분하였다. 1894년 <통영지>에 진공품(진귀한 공물) 중 부채가 88개로 기록되어 있어 통영에서 대규모로 부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공내헌>
공내헌(工內軒), 공방을 관리하던 공감의 집무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동개방>
동개방(茼箇房), 활과 화살을 함께 꽂아 넣어 등에 지는 가죽주머니인 동개와 활을 허리에 꽂는 궁대(弓袋)를 만들던 곳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공록당>
공록당(工綠堂), 공고(工庫)에 딸린 집무공간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화자방>
화자방(華字房), 가죽을 사용하여 군화와 말안장을 만들던 곳으로 화자는 벼슬아치들이 관복 아래에 신는 가죽으로 만든 긴 장화 모양의 목화를 말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석수조>
석수조(石水槽), 물을 저장하여 자개 등을 갈고 닦는 등의 작업을 하던 곳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제영 앞쪽에는 통제사 참모장에 해당하는 우후(虞候)가 집무를 보던 공간이 우후군이 자리잡고 있다. 우후는 정3품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 통제사 밑에서 군령을 주로 담당하였다. 우후군은 집무공간인 동헌과 거처인 내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객사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관아와 비슷한 규모를 하고 있다. 통제사가 있는 운주당과는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통제영 아래 우후군>
<출입문>
<우후군>
우후군
우후군은 통제사 참모장인 우후가 업무를 보며 기거하던 곳으로 중영 및 내아로 이루어져 있다. 우후군은 군사관계의 시설들로서 통제영의 직할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격상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하고 위계상 중간적인 위치에 놓인다. 또한, 수군으로서 선창에 있는 군선을 관리하므로 통제영과 선창과의 관계에도 중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전면에 자리한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통제영 동헌 앞 마당에는 역대 통제사들의 업적을 비리는 공덕비들을 모아 놓고 있다. 비석들은 통영시내에 흩어져 있었는데 그 중 58기를 모아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이외에 역대 통제사 중 전의 이씨 문중에서 배출한 통제사 4명 중 9명의 비석이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2013년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통제사비군>
통제사비군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관.민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인데 표제도 숭덕비.추사비.거사비.사적비.불망비.타루비.유예비.선정비 등으로 다양하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두룡포기사비, 6대와 9대 통제사를 역임한 이경준의 비>
<2014년 발굴된 땅속에 묻혀있던 비석>
이곳에 있는 비석 24기는 전의 이씨(全義 李氏) 문중 배출 삼도수군통제사 14명 중 9명의 것이다. 2014년 통영시 무전동 873번지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로 매몰 이유도 불명확하다. 내용적으로는 사적비.청덕선정비.영세불망비가 각각 5기, 거사비.선정비.유예비.유애거사비가 각각 2기, 불망비가 1기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삼도수군통제사는 충청도, 전라도, 경사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조선시대 해군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종2품의 고위칙이다, 3도에는 충청수영, 전라우수영,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경상좌수영이 설치되었으며 통제사는 경상우수영 절도사를 겸임했다. 임진왜란 직후 이순신 장군이 1대, 2대 통제사를 역임했으며 이후 고종 때 갑오경장(1895년)으로 폐영될 때까지 303년간 209대 195명의 통제사를 배출하였다.
<초상화가 남아 있는 역대 통제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통제사의 정식 명칭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충청·전라·경상 삼도 수군을 총괄하는 조선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통사(統使), 통수(統帥), 통곤(統閫)으로 부르기도 했다. 1593년(선조26년)부터 1895년(고종32년) 폐영 될 때까지 303 년간 209대, 재임 14명으로 195명의 통제사를 배출하였다. 제1, 3대 통제사 이순신, 제2대 원균이다.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는 각 도(道)의 수장인 관찰사(군권 , 행정권, 사법권을 가진 종2품)와 대등한 관계였으나 실제로는 그 이상의 권한이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 전체 병력의 1/4 이상에 해당하는 조선수군 80% 가량의 삼도수군을 통솔하는 막강한 군권, 사법권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통제영 운영을 위한 군액(軍額, 세금) 징수, 통영곡(統營穀, 군량미) 운영, 소속 전선(배)을 이용한 물류업과 지역별 창고업, 상평통보 자체 제작과 사용, 12 공방 운영 등을 통한 든든한 재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삼도수군통제영 고지도>
삼도수군통제영 고지도, 통영지도 1872,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통영은 지금의 경남 통영시 문화동, 태평동 일원에 있었던 수군통제사영으로 조선후기 수군의 총본영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시 이순신 장군이 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이끌고 왜구를 물리쳐 통제사를 제수받은 것이 시초이다. 초대 통제사였던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는데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전란 후 여러 곳을 옮겨다녔는데,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를 거치다가 1601년(선조 34) 체찰사(體察使) 이덕형의 장계로 1604년(선조 37) 통제사 이경준의 지휘 아래 고성현 두룡포(頭龍浦)로 옮기게 되었다. 그후 1678년(숙종 4) 윤천뢰 통제사 때에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성곽을 축조하였다. 이 지도는 1872년 제작된 경상도 지도첩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삼천진지도(三千鎭地圖)와 함께 따로 분리되어 있던 것이지만 표현 양식, 내용 등을 통해 볼 때 1872년 군현지도 제작사업 때 만들어진 것이다. 통영을 중심으로 주변의 거제, 고성, 사천, 남해에 이르는 지역을 회화식으로 그렸는데 특히 조감도식의 방법을 사용하여 지역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밀하게 그린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정교한 솜씨로 보아 전문 화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 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통영에서는 화사군관(畵師軍官) 한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지도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도의 내용을 보면 우선 산천, 바다, 도서 등의 자연적인 지형이 산수화풍으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조선후기 회화식 지도에서 나타나는 방위의 혼란이 이 지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즉, 산의 봉우리를 지도의 상단인 북쪽을 향하게 그리고 조감도식으로 위에서 사선적으로 투시함으로써 일관된 방위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축척에 있어서 중심부와 주변부에 차별적인 축척을 적용함으로 써 중심 공간인 통영이 상당히 부각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도 강한 집중력을 유발시키고 있다. 통제사영이 있는 성곽 내부 공간은 다양한 관아 건물들을 상세히 그렸는데 객사인 세병관(洗兵館)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안과 성밖에는 지붕 모양을 빽빽하게 그려 넣음으로써 촌락의 밀도를 표현하고 있다. 바다의 포구에는 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각종의 전선과 더불어 거북선의 모습도 보이고 있으며, 미전이 들어선 해안가에는 범선(帆船)도 그려져 있다. 이 시기 통영이 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상업 활동의 요지로도 부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파수가 있는 해구(海口)에는 책문(柵門)과 같은 것이 그려진 점도 이채롭다. 전체적으로 통영의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잘 보여주는 지도이다. (안내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22년)
<출처>
-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 안내문,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22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