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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화개산 도피안사(到彼岸寺)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화개산(花開山)에 있는 도피안사(到彼岸寺)이다. 도피안사는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라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말 도선국사가 철원지역 호족들과 함께 이 절을 창건하면서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과 삼층석탑(보물)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도선은 이절을 비보국찰(裨補國刹)로 삼았으며 오랜세월 그 명맥을 이어왔다. 구한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된후 1959년 육군 15사단에서 절은 중건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말 신흥세력으로 부상했던 지방 호족들이 중심이 되어 창건된 사찰로 철조불상과 삼층석탑에서 기존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철원 화개산 도피안사>

도피안사가 있는 화개산이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특이한 형택의 삼층석탑과 철조불상으로 산세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다고 전한다. 도피안사는 휴전선에서 부근에 있어 외진곳에 자리한 사찰로 생각될 수 있지만 옛 철원역과 철원군청이 가까운 곳에 있는 사찰이다. 서울과 함경도를 연결하는 교통로이자 넓은 철원평야의 경제력이 뒷받침하고 있는 지역 중심사찰이다.

<도피안사가 있는 화개산>

<일주문>

<천왕문>

<연지>

<해탈문>

불전으로는 물로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를 모신 대적광전과 천불전, 삼성각이 있으며 강당건물인 설법전,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채가 있다.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 많지 않은 사찰로 수행공간이라기보다는 지역 신도들이 찾아 기도를 올리는 성격의 사찰이다.

<도피안사 경내>

<주불전인 대적광전>

<대적광전 내부>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은 철로 만든 불상으로 대좌까지 철로 만들었다. 손은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서 바른손을 감싸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어 비로자나불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때(865년) 만들었다는 내용의 있어 조성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불상이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천불전>

<삼성각>

삼층석탑(보물)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 놓은 삼층석탑을 높이는 4.1m이다.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일종의 이형 석탑으로 불상대좌처럼 생긴 기단 위에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삼층석탑(보물)>

신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자 설법을 하는 강당건물인 설법전은 경내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요사채인 무설전은 사찰 동쪽 언덕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설법전>

<요사채>

<요사채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도피안사(到彼岸寺)
도피안사는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라는 뜻을 가진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末寺)다. 국보 철조비로자불좌상이 모셔져 있고 보물 삼층석탑이 있다. 통일신라 제48대 왕인 경문왕 5년(865)에 도선국사가 철원 지방의 향도 천여 명을 거느리고 산수가 좋은 곳을 찾던 중 화개산 현 위치에 터를 잡고 도피안사를 처음 세웠다. 대한제국 광무 2년(1898)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된 것을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법운 스님이 다시 세웠다. 그후 1941년 1월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김의권 스님이 사찰을 고치고 정비하여 전통사찰로 이어져 오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철원 지역이 공산 치하에 있었던 시기에 사찰도 공산 치하에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 소실된 것을 1957년 11월 육군 제15사단이 복원하여에 군(軍)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1986년에 사찰 관리권이 민간으로 이관되면서 1988년부터 정부의 지원으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을 개축하고 범종각, 사천왕문, 일주문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철원 도피안사, 2022년)

<출처>

  1. 안내문, 철원 도피안사,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