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그려진 실경산수화는 우리 산천을 재해석하고 성리학적인 자연관이 접목되어 새로운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정선은 18세기에 유행한 남종화법을 가미하여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였다. 화가들은 실경을 뛰어 넘어 재해석하고 다앙한 실험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림의 소재는 실경산수와 마찬가지로 명승지, 별서(別墅), 야외 모임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중 금강산과 관동팔경, 서울 근교의 경관이 많이 그려졌다.
<삼각산 노적봉, 김득신, 조선 1800년, 비단에 엷은 색, 개인 소장>
노적봉은 삼각산 백운대 남쪽에 솟은 화강암 봉우리이다. 화원 김득신은 적막한 겨울밤의 노적봉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화면 오른쪽에 쓴 정조의 시는 노적봉을 중국 형산(衡山)의 석름봉(石廩峰)에 빗대어 태평성대를 비는 내용이다. 그림을 그린 경신년 칠월 그믐날롤 정조가 승하한 다음날로, 문인 이태영이 정조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어제시(御製詩)를 옮겨 쓰고 시의 뜻을 김득신에게 그리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경과 꼭 닮지는 않았지만 추모의 마음을 실경산수화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실경을 뛰어 넘다
화가는 실경을 뛰어 넘어 재해석과 다양한 실험으로 자신만의 생각이나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실경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감흥을 표출하기도 하고,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감각적인 채색이나 서양의 투시법을 시도하기도 했지요. 추억을 소환해 내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그린 산수화는 실경과 닮지 않았더라도 화가의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냅니다. 그림 속 우리 강산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자연을 바라보고 사유하며 끊임없이 실험했던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가들이 독창적인 조형언어로 표현한 실경산수화를 보며, 그들의 시선이 닿았던 마음속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한양 근교의 명승(京口八景圖), 심사정, 조선 1768년,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근교의 경치를 그렸지만 어느 곳을 그렸는지는 알기 어렵다. 심사정은 남종문인화풍으로 실경을 재해석하였다. 물기가 많은 푸른 먹과 담황색이 조화를 이룬 화면은 심사정 그림 특유의 시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림 옆면에는 강세황의 화평이 남아 있다. 실제 경치와 얼마나 닮게 그렸는지를 실경산수의 평가기준으로 내세웠던 강세황도 이 그림의 서정성을 높게 평가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묘길상(妙吉祥圖), 허필, 조선 1759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허필이 35세에 금강산을 여행한 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억을 되살려 그린 묘길상이다. 기억이 흐릿한 탓도 있겠지만, 불상의 요소를 모두 생략하고 서 있는 수도승으로 왜곡하여 그린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원래 석등이 있던 자리에는 석탑과 그 위에 둥지를 튼 학을 그렸다. 이는 학을 자식으로 삼고 자연에 은거했던 북송의 임포(林逋, 967~1028년)를 떠올리게 한다. 화가 스스로를 은둔처사로 표현하기 위해 실경을 해체하고 재해석한 자전적 문인화로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강세황(1713~1791년)은 조선후기들 대표하는 문인화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75세에 사신단에 참여하여 북경을 다녀왔으며 76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花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의 발전, 풍속화와 인물화의 유행,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피금정도>, <송도기행첩>, <자화상>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새롭게 구성한 피금정, 강세황, 조선 1789년, 비단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중 피금정을 표현한 부분>
피금정은 강원도 금화군에 위치한 정자로,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는 여정에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곳이다. 강세황도 1788년 금강산 유람 때 이곳에 들렀고 이듬해 이 그림을 그렸다. 피금정은 화면 오른쪽 가장자리에 작게 묘사되었고, 중앙에는 수직으로 올라가는 산맥이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왼쪽 아래에 묘사된 인물은 중국 복식을 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조선의 실제 경치와 크게 다르다. 강세황은 피금정의 실경을 새롭게 해석하여 남종문인화풍의 관념산수에 가깝게 표현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이인상(1710~1760년)은 조선후기 문인화가로 <설송도>, <송하관폭도> 들을 그렸다. 명문가 서얼 출신으로 시문과 학식에 뛰어나 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림은 곧은 지조와 성격이 반영되어 담백하면서도 투명한 색감, 깔끔한 멋과 분위기가 특징이다.
<15년 전 추억속 구룡연, 이인상, 조선 1725년,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필선으로만 그린 구룡연 그림이다. 이인상은 금강산 여행에 동행했던 임안세를 위해 유람한 지 15년이 지난 후 이 그림을 제작했다. 폭포를 가운데 두고 아래쪽에 소용돌이 치는 못과 바위를 그린 구도는 당시 유행한 구룡연 그림과 통한다. 그러나 이인상은 채색이나 간단한 선염조차 생략하고 메마른 붓으로 절벽과 폭포의 뼈대만 그렸다. 화가 스스로 ‘마음으로 이해한 것(心會)’을 그렸다고 밝히고 있듯, 마음의 풍경으로 재탄생한 독창적인 실경산수화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손으로 그린 옥순봉, 윤제홍, 조선 1833년, 종이에 먹, 삼성미술관>
손가락에 먹을 찍어 과감하게 그린 옥순봉이다. 윤제홍은 1823년 청풍 부사로 부임했을 때 단양의 명승지를 여러 차례 찾았다. 그는 선배 화가인 이인상의 옥순봉 그림을 참고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인상의 그림에는 실경과 다른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윤제홍 역시 실경에 없는 요소를 추가했는데, 암벽 아래 위치한 정자와 먼산의 폭포는 온전히 상상의 산물이다. 더불어 그가 사용한 지두화(指頭畵) 기법은 과장과 생략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조형언어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먹으로 즐긴 산수(鶴山墨載帖), 윤제홍, 조선 1812년, 종이에 먹, 개인소장>
윤제홍은 푸른 종이에 개성의 박연폭포와 그 아래 범사정(泛槎亭)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인물을 그렸다.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3대 명폭의 하나이다. 폭포 뒤편의 절벽을 제외하고 좌우에는 각이 진 바위를 지두화법으로 그려 실제 경관보다 과장하였다. 손가락과 손톱으로 그린 그림과 글씨에서 윤제홍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총석정>
<해금강>
<삼일호>
<구룡연>
금강산과 강원도지역 명승 그림, 조정규, 조선 1860년, 종이에 먹, 동산방화랑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그린 8폭 그림이다. 구도와 표현에서 김홍도의 영향이 엿보이나 조정규만의 흥미로운 회화적 표현이 돋보인다. 외금강의 명소로는 <구룡연>을 선택하였고 해금강의 삼일포, 해금강, 총석정을 다양한 구도로 표현하였다. <삼일호>는 위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며 원형구도를 사용했고, <해금강>은 아래쪽의 인물들이 저 멀리 기묘한 바위와 파도의 소용돌이를 바라보고 있다. 마지막 폭으로 추정되는 <총석정>에는 ‘경신년(1860) 봄 임전 조정규가 그리다’라는 묵서가 적혀 있어 제작연도를 알 수 있다. 개성적이고 근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수미탑>
<보덕암>
<정양사>
<장안사>
금강산과 강원도지역 명승 그림, 조정규, 조선 1860년, 종이에 먹, 동산방화랑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그린 8폭 그림이다. 구도와 표현에서 김홍도의 영향이 엿보이나 조정규만의 흥미로운 회화적 표현이 돋보인다. 팔폭 중 두 폭에는 내금강의 유명한 사찰인 장안사와 정양사의 광경이 그려져 있다. 비홍교를 건너는 스님의 모습을 그린 <장안사>는 올려다 본 시선으로 포착했다면 정양사는 헐성루와 약사전 너머로 보이는 내금강의 봉우리와 계곡을 표현했다. <수미탑>은 하늘을 뚫을 뜻 솟아오르는 수미탑을 아래쪽에서 선비들과 함께 올려다보도록 묘사하였다. 조선후기 실경산수를 계승하면서도 전통화법에서 벗어난 개성을 표출한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조중묵(?~?)은 조선후기 화원으로 철종어진화사 등을 역임하였다. 헌종, 철종, 고종의 어진을 그렸으며 당시 초상화의 대가로 평가받았다. 그가 남간 산수화들은 남종화풍을 충실히 따라 깔끄하고 정돈된 맛을 풍기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형식적인 면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작으로 <산회청강도>, <함흥본궁도> 등이 있다.
<아버지를 기리는 인왕산 그림, 조중묵, 조선 1868년, 비단에 엷은색, 국립중앙박물관>
<인왕산 부분>
홍제원 일대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북한산을 대화면에 포착한 실경산수화이다. 한눈에 담기 어려운 넓은 공간을 수평적 파노라마로 표현하고 주요 지점에 지명을 표기하였다. 박경빈이 부친의 무덤을 인왕산 자락의 명당으로 이장한 후 무덤과 주변 경관을 그리게 한 것으로 선친의 묘소 위치를 후세에 전하려는 기록적인 성격이 강하다. 조중묵은 아버지의 무덤을 그리고자 한 주문자의 의도와 실제 경치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이처럼 특별한 목적의 병풍을 제작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옥호정도,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2016년 이춘녕 유족 기증>
<옥호정도 중 저택>
<옥호정도 중 후원>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자리했던 옥호정을 그렸다. 건물과 정원, 산의 형세를 그리고 각각의 경물에 명칭을 썼으며 화면의 네 가장자리에 방위를 표기하여 도면의 면모가 뚜렸하다. 산수 형세와 건물 묘사의 수준이 높아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산을 그린 준법(皴法)과 나무 표현, 산뜻한 채색은 김홍도 화풍의 영향이 엿보인다. 신선 세계를 상징하는 ‘옥호동천(玉壺洞天)’이라는 각자(角字)가 말해주듯, 화가는 세속에서 벗어난 아취(雅趣)있는 공간으로 옥호정을 표현하였다. 김조순은 1804년에 옥호정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을해벽(乙亥壁)’이라는 글씨를 1815년에 새겼으므로 10여년에 걸쳐 건물과 정원을 꾸민 것으로 추정된다. 김조순은 만년에 옥호정에 주로 기거하며 많은 문인들과 시회(詩會)’를 열었다. 옥호정은 장동김씨 가문의 도시 속 별천지였으며, 19세기 문예활동의 중요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옥호정도(玉壺亭圖), 한양 속 별천지
차곡차고 접은 두꺼운 종이를 펼치면 세로 150.3cm, 가로 193.0cm의 커다란 그림이 나타납니다. 서울 북악산 자락 넓은 터에 들어선 별장, 옥호정을 그린 그림입니다. 담장 밖 개울물은 세속의 소음을 씻어주고, 뒤뜰 바윗돌에 새긴 ‘옥호동천’ 네 글자는 신선 세계로 안내하는 문이 됩니다. 궁궐을 바로 가까이 둔 도시의 한복판에 고아한 원림(園林)이 홀로 다른 세양인양 펼쳐져 있습니다. 옥호정은 순조의 빙부였도 김조순이 여러 해에 걸쳐 꾸민 별서(別墅)였습니다. 정원에 심은 모란과 파초, 시렁을 타고 오른 포도나무에 이르기까지 김조순의 애정이 담긴 듯 느껴집니다. 백련봉에 올라 아침 해를 맞이하고 때로는 정자에 앉아 문인들과 시를 지었던 주인의 생활이 그림 속에서 떠오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6년 이춘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유족에서 <옥호정도>를 기증받았습니다. 조선후기 경화세족(京華勢族)이 꿈꾸었던 도시 속 별천지를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실경산수화의 소재로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명승과 함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면서 살았던 별서(別墅), 그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다. 그림에는 경치가 빼어난 곳에 있는 누각과 정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소를 표현하고 있다.
<북새선은도>를 그린 한시각(1621~ ?)은 화원 가문출신으로 국가적 사업에 다수 참가하였다.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의 숙종 때 송시열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현존하는 초상화는 그의 작품을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새은선도>는 인물과 묘사가 명확하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길주에서 과거 시험 장면>
<뒷편>
<함흥관에서 합격자 발표 장면>
<뒷편>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한시각, 조선 1664), 비단에 색
현종 대의 화원인 한시각이 1664년 함경도에서 실시된 문무과 과거시험을 그린 기록화이다. 7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는 ‘북새선은’이라는 제목 다음으로 길주(吉州)에서의 과거시험 장면과 함흥관에서 함격자를 발표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함경도는 산세가 험하고 기후와 풍토가 척박하여 사람이 살기 힘든 낙후된 지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때문에 북쪽 변방에서 치러진 과거는 지역민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행해져, 임금의 은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청록산수화법으로 길주와 함흥 지역의 관아와 산봉우리 등을 꼼꼼하게 채색하여 17세기 궁중기록화와 실경산수화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관아와 누정이 있는 그림
그림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땅에 들어선 관아와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이 보입니다. 관원들의 근무지인 관아는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곳이자 왕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나 사신접대, 관료의 모임 등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반면 사방이 트인 누정은 업무에서 벗어나 주변의 좋은 경치를 감상하고 휴식을 취하거나 문예 활동을 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사뭇 다른 성격을 가진 관아와 누정에는 조선시대 선비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춘 선비들은 출세와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하는 한편,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사랑하며 그 가운데 자유롭고 유쾌한 마음을 길렀습니다. 과거 시험이 한창 치러지고 있는 함경북도 길주의 객사부터 한양의 청풍계(淸楓溪)에 위치한 장동김문의 누각까지 그림 속 장소를 천천히 둘러보시면서 빼어난 경치도 마음껏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손세기.손창근 기념실은 2018년 손창근 선생이 자신과 부친이 수집한 우리 문화재 300여점을 기증한 일을 기념하는 전시실입니다. 손세기.손창근 기증품을 포함한 이번 주제 전시는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리는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2019.7.23 ~ 9.22)와 연결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화개현구장도(보물)>을 그린 이징(1581~ ?)은 왕실 출신의 화가이다. 산수화는 조선초기 안견파(安堅派)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장식적인 취향이 짙은 이금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화개현구장도(花蓋縣舊莊圖), 그림 이징, 글씨 신익성, 조선 1643, 비단에 먹, 보물>
<그림 부분>
경상도 하동군 옆 화개현에 있는 정여창의 별장을 그린 그림이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섬진 나루에 대나무와 매화를 심고 별장인 악양정(岳陽亭)을 지어 오경(五經)을 연구하였다. ‘화개현구장도’라는 제목 아래 별장이 그려졌으며 하단에는 그림으 제작 배경과 관련된 신익성의 글이 있다. 신익성은 선조의 사위로 글씨에 뛰어났고, 왕실 출신의 화원 이징과 가깝게 지냈다. 63세의 이징은 지리산에 있는 별장에 직접 가보지 않고 하동정씨 문중과 신익성의 말을 듣고 상상하여 그림을 그렸다. 실경산수화는 아니지만 조선 중기 산수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 별서유거도로, 당시 문인들이 바랐던 이상적인 은거지를 반영한 그림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송도부 장원 급제자들의 모임(松都府壯元契會圖), 작자미상, 조선 1772년, 종이에 엷은 색>
<용두회>
<화담의 꽃놀이>
<박연폭포 감상>
<만월대에서 옛일 회상>
<지족사의 종소리 듣기>
1612년 송도에 근무했던 관원 네 명이 모두 장원 급제자였음을 기념하여 용두회(龍頭會)를 연 다음, 이를 기념하는 계회도병풍을 제작하였다. 160년이 지난 1772년, 송도 유수 홍이상의 7세손인 홍명한은 선조의 병풍이 파손되었음을 안타까워하며 6폭 병풍을 다시 제작하였다. 제1폭은 1612년 당시 송도 태평관에서 열린 용두회 장면이고, 제2폭에서 제5폭은 각각 <화담의 꽃놀이>, <박연폭포 감상>, <만월대에서 옛일을 회상>, <지족사의 종소리 듣기>이다. 사계절의 변화에 따른 송도의 명승명소를 그리며 각 폭에 서사정(逝斯亭), 범사정(泛槎亭), 만월대(滿月臺), 종고루(鐘鼓樓) 등의 누정을 표현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심사정(1707~1769년)은 조선중기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증손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지만 과거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그림을 그렸다. 어려서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진경산수뿐 아니라 중국 절파화풍과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강상야박도>, <파교심매도> 등이 있다.
<산수도(山水圖), 심사정,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도롱이를 입고 소에 탄 인물로 보아 비 갠 후의 산수임을 알 수 있다. 중경(中景) 너머 성곽 안쪽으로 수목(樹木)에 가려진 가옥과 복층의 누각이 그려졌고 다층탑은 진한 먹으로 강조되었다. 한양 도성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화풍상 한양의 여덟 경치를 그린 <경구팔경도>와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심사정은 18세기 활동한 사대부 화가로, 남종화풍을 변형하여 자신만의 화법을 형성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소나무와 계곡으로 둘러싸인 누정(松鷄樓亭圖), 이인상, 조선 1741년 이후, 종이에 엷은 색>
능호관 이인상은 명문가의 서얼 출신으로 고위직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이름난 선비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서화를 제작했다. 그의 벗 이윤영의 서재인 담화재(澹華齋)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는데, 이 그림 좌측에 “담화재에서 그렸다”고 적혀 있다. 소나무에 둘러싸인 누정에서 한 명의 인물이 흐르는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다섯 그루의 소나무는 뿌리를 드러내거나 몸통이 휘어져 있으며 그 가지들은 한데 얽혀 있다. 이인상의 필력과 개성이 잘 담겨있는 부채그림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장동팔경 중 창의문(彰義門)과 백운동(白雲洞), 정선, 조선 1749년대 이후, 종이에 엷은 색>
장동팔경은 서울 인왕산과 북악산 일대에 이르는 마을, 장동(현 효자동과 청운동 일대)의 여덟 군데 뛰어난 경치를 일컫는다. 장동은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이 살던 곳이있다. 정선 역시 이 지역에 거주하며 사대부들의 저택이나 이들이 즐겨 찾던 명승지를 팔경(八景)의 소재로 삼았다. 창의문은 한양 사소문 중 하나로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으며, 인조반정 때 창의군이 이 문으로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였다. 청풍계의 북쪽에 있는 백운동은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계곡이 깊고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도성의 명승지로 이름이 높았다. 필치와 색채 사용이 매우 능숙하며 경관의 핵심과 운치를 잘 전달하고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청풍계’>
<대은암과 청풍계(大隱巖, 淸楓鷄), 정황,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엷은 색,>
정황은 정선의 손자로 호는 손암이며 정선의 화풍을 본받았다. 대은암은 백악산 남쪽 기슭, 육상궁 북쪽에 있는 큰 바위이다. ‘대은을 닮은 듯한 바위라는 뜻으로 남곤의 친구 박은이 바위에 붙여준 이름이다. 매일 밤늦게 퇴근하는 남곤이 알아봐주지 않아 이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청풍계는 인왕산에서 발원하여 동쪽 기슭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으로 김상용이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후 안동김씨가 크게 세력을 펴고 살았던 곳이다. <대은암>과 <청풍계>는 <장동팔경첩>에 수록된 정선의 그림과 비교할 때 구도 및 화법이 상당이 유사하여 정선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용만승유첩(龍彎勝遊帖), 작가 미상, 조선 1723년, 비단에 색>
1723년 4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된 조태억이 사신들이 입국하기 전 평안북도 의주 일대를 유람하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서화첩이다. ‘용만’은 의주의 별칭으로,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다. 중국과 조선의 국경에 자리잡고 있어 예로부터 군사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서화첩은 유람한 관료들이 명단과 <통군정아회도(統軍亭雅會圖)>, <압록강유람도(鴨綠江流覽圖)>, <관기치마도(官妓馳馬圖)>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 상단에 통군정, 구룡정을 배치하여 정자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시점으로 그려졌다. 의주의 경물과 건축의 명칭이 적혀 있어 당시 지형과 건물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관원들이 국가적 행사를 수행하는 도중에 승경지를 유람하고 그 모임을 그린점에서 한시각의 <북관수창록(1664년)>과 비교할 만하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죽서루도, 엄치우,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삼척 죽서루를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다.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종종 문학과 그림의 대상이 되어 강세황, 김홍도 등도 이를 주제로 한 그림을 남겼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오십천 건너편에서 죽서루를 부감하거나 그보다 가까이에서 마주본 시선으로 그린 반면 엄치욱은 옆면에서 바라본 죽서루를 표현했다. 누각의 아래쪽으로 관아의 부속 건물 및 가옥들을 표현하고 절벽 아래로 배 한적을 배치하였다. 마치 북송대 문인 소식의 적벽부(赤壁賦)를 연상시켜 실경보다는 이상향을 담은 그림처럼 보인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백상루도(百祥樓圖), 조익, 조선 17세기, 종이에 색>
평안남도 안주(安州)의 관아 건물의 하나인 백상루를 그린 것이다. 백상루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누각이며, 관서팔경이 하나였다. 정(丁)자 형의 당당한 건물 형태에 청천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위치에 서 있어서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으로 ‘관서제일루(關西第一樓)’라 불렸다. 화면 중앙에 백상루를 부각시켜 건축적 특징과 그 위용을 압도적으로 표현했다. 진하게 채색한 백상루 뒤쪽으로 청천강이 흐르고 건너편의 마을과 원산(遠山)은 담채로 따뜻하게 그렸다. 화면 상단에는 고려 충숙왕의 시와 함께 문인화가 조익이 1644년에 충청도 신창(新昌)에서 그렸다는 내용의 글이 있다. 조익이 퇴거한 후에 기억을 되살려 그린 그림으로, 관아의 누각을 대형 화면에 단독으로 묘사한 매우 특별한 작품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규장각도(奎章閣圖), 전 김홍도, 조선 1776년, 비단에 색>
정조는 즉위한 해인 1776년 선왕인 영조의 글을 봉안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창건하였다. 이곳은 당대의 뛰어난 젊은 관료들이 연구에 전념한 공간으로, 중추적인 학술 기관이 되었다. 화면 중앙에 규장각이 실제보다 크게 그려졌고 사방에 부속 건물들을 에워싸듯 묘사되었다. 대각선 방향에서 일정한 각도로 시점을 이동하는 평행원근법(平行遠近法)으로 궁궐과 담장을 표현했으며 건축물과 수목(樹木)은 정밀하게 채색하였다. 규장각 뒤편으로 북악산을 그려 왕실의 전통과 권위를 강조했다. 왕실의 건축물을 대형 화면에 단독으로 묘사한 매우 특별한 작품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함흥본궁도(咸興本宮圖), 조중묵,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함흥본궁은 태조 이성계가 즉위 이전에 살았던 집터에 지은 궁궐로, 현재 함경북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에 위치한다. 태조가 양위한 뒤 머물렀던 곳으로 함흥차사의 일화가 깃들어 있다. 조중묵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과 평행투시도법(平行透視圖法)을 사용하여 함흥본궁의 전체 모습을 그렸다. 태조와 4대 선조의 신위를 모신 오조성전(五祖聖殿)이 중앙에 위치하며 그 주변으로 태조가 직접 심은 소나무들이 그려졌다. 정전 앞 누각인 풍패루(豊沛樓), 이안청(移安廳) 등 전각을 비롯한 경내 주요 유적에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림 상단에는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1889년에 쓴 발문이 있는데, 말라버린 소나무에서 새싹이 새로 돋아나게 된 일을 기록하였다. 그는 새로 돋아난 소나무처럼 한말의 쇠락해가는 조선이 부흥하길 기원했던 것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폭 함흥 낙민루(樂民樓)>
<3폭 함흥 귀경대(龜景臺)>
<4폭 함흥 천불산(千佛山)>
<5폭 함흥 일우암(一遇庵)>
<6폭 안변 국암(國巖)>
<7폭 안변 석왕사(釋王寺)>
<8폭 감산 괘궁정(掛弓亭)>
<9폭 명천 칠보산(七寶山)>
<10폭 경성 무계호(無溪湖)>
<11폭 경원 두만강(豆滿江)>
함경도의 명승 열곳(關北十勝圖), 조중묵, 조선 1890년, 비단에 색
함경도의 명승 열 곳을 그리고 시를 더하여 열두 폭으로 만든 병풍이다. 1890년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한 한장석이 조중묵에게 그림을 주문하고 시를 지었고, 그 시의 글씨는 아들 한광수가 썼다. 숙종 때 남구만이 함경도의 명승을 그림과 시로 엮은 <북관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를 남긴 이래 회화식 지도 형식의 함경도 실경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조중묵은 넓은 공간을 지도처럼 부감하면서도 산수는 남종문인화풍으로 그려 함경도를 신비롭고 이상적인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조중묵은 헌종 ~ 고종 때의 화원으로, 1888년 함경도 감영에 화사군관(畵師軍官)으로 파견되어 <함흥본궁도>를 그리기도 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