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군(安山郡)은 경기도 안산시와 시흥군 남쪽에 있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읍치는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을의 규모는 크지 않은 편으로 종3품 군수(郡守)가 고을 수령이었다. 안산은 서해안 시화호 일대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서해안 방어와 연안항로의 중요한 요지로 군사적으로 중요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말.조선초 대부도 부근 서해안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했으며, 해안에는 조선중기까지 초지진이 설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장아구현이 설치된 이래 여러차례 그 명칭과 지위가 바뀌었다가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고려말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안산군으로 승격된 이래 그 지위가 구한말까지 유지되었다. 경기도 서해안에 위치한 안산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개편으로 시흥,과천과 함께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가 이지역에 반월공단이 세워지면서 도시화되어 1986년 안산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인구 70만이 넘는 대도시로 인천과 함께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이다.
<안산군 관아터>
안산시 수암동 수암봉 등산로 입구에 남아 있는 옛 관아터이다. 안산읍성은 북쪽과 동쪽 능선에 의지하여 둘레 772 m의 크지 않은 규모의 읍성이다.
<객사 앞에 남아 있는 고목>
안산읍성이 있었던 안산시 수암동 일대에는 안산군 관아가 있었는데 옛 관아건물들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지금은 최근에 복원된 객사건물만이 남아 있다. 복원된 안산객사는 앞면 9칸, 옆면 3칸 규모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객사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가운데 3칸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정청이고 양쪽에 앞면 3칸 규모의 좌.우익랑이 배치되어 있다. 익랑은 각각 온돌방 1칸, 대청마루 2칸으로 이루어졌다. 좌.우익랑은 조성에서 파견된 관리나 사신 등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이곳 안산객사는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기 위해 머문적이 있어 안산행궁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옛 안산읍성 건물터에 복원한 안산객사>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관아 건물로 양쪽 익랑에 온돌방과 대청마루를 두어 이곳을 방문한 관리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이기도 하다. 안산객사는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방문하면서 잠시 머물렀기때문에 안산행궁이라고도 부른다. 건물은 앞면 3칸의 정청(正廳)과 좌.우 익랑(翼廊)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객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앞에서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뒤에서 본 모습>
<국왕의 궐패를 모시는 정청>
<현판>
‘수리산(修理山)’을 뜻하는 ‘취암지관(鹫岩之館)’이라 적한 현판이 달려 있다. 서해안 바닷가와 가까워서 수리산에는 독수리가 많이 서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산객사 좌익랑(左翼廊)>
<옆에서 본 모습>
앞면3칸, 옆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작은 온돌방과 넓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좌익랑은 서반(무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안산객사 우익랑(右翼廊)>
안산객사
객사는 정청에 전패(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 국왕의 친정을 상징할 뿐 아니라 지방관이 국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었다.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보다 오히려 격이 높아 관아시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배치는 고을의 진산을 등친 채 남향을 취하여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았고, 관아 내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였다. 객사는 한말까지 기능이 유지되었으나, 일제에 강점되면서 궐패 봉안이 중지되고 그 기증도 중지되었다. 객사의 정청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익사보다 한단 높게 조성되었고, 좌우익사는 팔작지붕으로 온돌과 마루를 놓았으며, 정편 3칸, 측면3칸으로 축조되었다. 이곳은 1797년(정조21) 8월16일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하룻밤 묵어간 적이 있어 ‘안산행궁’이라 불리기도 한다. <출처:안산시청>
오늘날 안산은 서해안 갯벌을 간척하여 대규모 공단이 들어선 도시로 시화호가 있는 해안 주변에 도심이 형성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안산군 읍치는 도심 동북쪽 군포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수리산 서쪽편 자락에 위치한 수암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국도변과 고속도로 부근에 위치한 작은 촌락에서 발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도로가 수암동 주변을 지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객사 앞 건물터와 관아 출입문이 있었던 자리>
<관아 건물터와 안산군 읍치였던 수암동 일대>
<읍성 뒷편 수리산>
<읍성 성벽 터>
관아 뒷편으로 읍성 성곽이 둘러져 있는데 성문과 성벽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흔적만 남아 있는 북문>
<석축 일부만 남아 있는 성벽>
안산읍성 및 관아지,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
안산읍성은 수암봉의 능선을 이용하여 평지를 감싸도록 쌓은 전형적인 평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772m이고, 주요 방어 지역을 여겨지는 서쪽과 북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이 매우 가파르며, 몇개의 높은 단을 이루고 있다. 평지인 남쪽은 돌을 쌓았는데, 도로로 인해 절단된 곳을 보면 성벽의 바닥부분과 내부에는 부분적으로 석축을 하고 그 안쪽에는 흙을 다져서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는 조선 초기의 무장이었던 김정경(1345~1419)의 거처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으며,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은행나무 세그루가 남아 있다. 관아는 단원구 목내동에 있다가 1441년(세종23) 이전 수암동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다시 1669년(현종10)에 이곳으로 옮겼다. 정문인 평근루와 객사.동헌 등의 행정시설, 옥사와 창고가 있었을 것이나, 모두 파괴되고 곳곳에 흩어진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발견된다. 성의 남쪽에는 조선시대의 안산 관아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수암면사무소로 이용되던 건물터가 남아 있다. 객사 건물은 2010년에 복원되었다. <출처: 안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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