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전(佛殿)은 불교의 교리와 세계관을 구현한 공간이다. 불단에는 불상을 봉안하고 그 뒷편에는 불화가 걸려 있다. 승려 장인들은 각종 예술적인 재능과 신앙심을 바쳐 아름다운 불국토를 만들었다. 승려장인들은 도전을 거듭하여 새롭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단응이 만든 ‘목각설법성’은 입체감있는 조각을 통해 다른 시각의 불국토를 보여주고 있으며, 화엄이 그린 화엄경변상도(국보)는 화엄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복잡한 불교의 우주를 그림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조각승 단응 등이 만든 <아미타여래삼존과 아미타여래의 설법장면(보물)>, 화승 화련 등이 한 화면에 펼쳐낸 불교의 우주(송광사 화엄경변상도, 국보)가 전시되어 작품의 장엄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73. 단응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첫 불상, 마곡사 영산전 목조석가여래좌상, 단응 등 20명, 조선 1681년, 공주 마곡사>
수조각상 단응이 1681년 2월부터 6월까지 열아홉 명의 조각승을 이끌고 제작한 <마곡사 영산전 목조칠불좌상> 일곱구 중 하나입니다. 칠불좌상은 지난 세상에 나타난 일곱 부처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일곱 부처 중 석가모니로 불리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오른손을 무릎에 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크기도 다른 여섯구의 불상보다 10센티미터 정도 더 큽니다. 이 불상들은 단응이 수조각승으로 활약하며 조성한 첫 작품입니다. 단응은 주로 경상북도 북부와 그 인근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졌으나, 이 칠불상의 기록이 소개됨에 따라 충청남도 지역 불사에도 참여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참여한 탁밀과 학륜 등 조각승 여섯 명은 3년 뒤 1684년 단응이 예천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만들 떄도 동참했습니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목조대좌 역시 중요한 작품입니다. 대좌는 높이가 낮은 ‘亞’자 모양의 삼단 수미좌(須彌座) 위에 다시 연꽃 모양 대좌를 얹었습니다. 대좌의 형태와 세부 문양은 1684년 단응이 만든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과 흡사하여 단응과 그를 따르던 조각승들이 만든 대좌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새로운 장르의 개척자, 단응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까지 활동한 단응은 당시 여러 지역에서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각자 개성을 발휘해 불교조각의 다양화에 기여했던 대표 조각승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작은 목조불감을 비롯해 지난 세상에 출현했던 일곱 부처의 불상 등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그는 경상도 지역에서 명망있던 고승인 소영 신경 등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불상과 불화를 융합한 목각설법상(木刻說法像) 같은 새로운 종류의 상을 조성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각승 단응(端應), 탁밀(卓密) 등 만든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불화와 조각을 절묘하게 접목한 독창적이면서 창의적인 작품이다. 현존하는 6점은 문경 대승사, 예천 용문사, 상주 남장사, 서울 경국사,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남원 실상사 약수암)에 남아 있다.
<74. 조각승 단응 등이 만든 아미타여래삼존과 아미타여래의 설법장면,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단응 등 7명, 조선 1684년, 예천 용문사, 보물>
1684년(숙종10) 가을, 단응과 탁밀 등 조각승 아홉 명이 예천 용문사 대장전에서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를 새롭게 구현했습니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설법상 속 부처가 겹겹이 배치되어 괴로움 없는, 지극히 안락한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가 환영처럼 펼쳐지는 듯합니다. 나무를 위쪽에는 인도의 고대 문자인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범자인 ‘옴’자와 거꾸로 된’卍’자를, 아래쪽에는 ‘明’자와 ‘心’자를, 그리고 사이에 중국 고전인 <주역>의 64괘 중 아홉개를 배치하여 불교와 유교 등이 혼합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불사에서는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소영 신경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경의 문도였던 단응은 그의 수행관과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금빛 찬란한 부처의 세계로
‘목각설법상’은 조선의 승려 장인이 어떻게 하면 법당을 더 아름답고 경건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신심을 드높일지를 고민한 끝에 탄생한 독창적인 장르였습니다. 목각설법상은 불전에서 불상 뒤쪽에 배치되어 기종의 후불화 역할을 대체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깊이감이 느껴지는 입체적인 평면을 만들어 불국토를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금빛 찬란한 목각설법상을 처음 보았을 떄의 반응을 상상해 봅니다. 마치 오늘날 3D 영상을 보며 실감 나는 체험을 하듯이 직접 불국토에 가서 여러 존상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요?(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엄경변상도>는 <화엄경>의 7처 9회의 설법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색 있는 구도를 하고 있으며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생을 사용하여 화면이 밝고 화려하다.
<75. 화승 화련 등이 한 화면에 펼쳐낸 불교의 우주,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화련 등 13명, 조선 1770년, 비단에 색, 송광사 성보박물관, 국보>
화련을 비롯한 화승 열세 명은 인도 마가다국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가 일곱장소에서 아홉 번에 걸쳐 <화엄경>의 방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과정을 한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737명이나 되는 존상이 등장해 복잡해 보이지만 설법회 명칭과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함께 적어 두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성 당시 승려들은 이 불화를 <화엄경> 주석서 목판 수천매가 보관된 화엄전이라는 특별한 수행 공간에 봉안했습니다. 전각을 드나들던 승려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장엄하고 복잡한 화엄사상과 불교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 화폭에 내용을 모두 담기까지 끊임없이 불교 교리에 매진한 화승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이 구현한 우주
불교의 우주는 관념 속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입니다. 깨달음을 얻어 모든 것을 초월한 부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시공을 넘나들며 두루 존재합니다. 승려 장인은 화면을 빼곡히 채우는 천불을 비롯해 시간적 개념의 불세계와 공간적 개념의 정토를 표현했습니다. 불교에서 그리는 세계는 모든 것이 하나에 그치지 않고 한없이 연결되며 무한히 겹쳐져서 우주를 이룹니다. 조선 후기에는 화엄교학이 유행하여 비로나자불의 서원(誓願)으로 이룩된 정토인 연화장 세계를 그림으로 펼쳐 낸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불교 사상을 온전히 이해한 수행자였기에 이토록 무궁한 불교의 우주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관음보살이 살고 있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수월관음도이다. 18세기 최고의 화승으로 평가받은 의겸이 그린 그림으로 전체적으로 고려시대 그림과 비슷하나 다양한 안료를 사용하여 짙게 채색하고 있다.
<76. 화승 의겸 등이 다양한 기법으로 그린 관음보살, 관음보살도, 의겸 등 5명, 조선 1730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의겸이 화승 네 명과 함께 보타락가산에 머무는 관음보살과 가르침을 얻으려고 그를 방문한 선재동자를 그렸습니다. 엷은 색과 먹으로 부드럽게 산수를 표현한 데 비해 관음보살은 짙게 채색했습니다. 다양한 안료를 자유롭게 사용한 의겸의 솜씨가 잘 드러납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화승 의겸은 1730년 고성 운흥사에서 이 불화 조성에 참여한 행종, 채인과 관음보살도를 비롯해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불화를 그리는 화승 중에는 의겸처럼 불상 제작에도 능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그림 그리는 파랑새 이야기>
옛날 어느 사찰에서 법당 벽화를 완성할 장인을 찾지 못해 근심하던 차에 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벽화를 그릴테니 벽화가 완성되기 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한 동자승이 안을 들여다보니, 법당 안에는 붓을 문 파랑새 한마리가 날아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엿본 것을 안 파랑새가 바로 날아가 관음보살도의 눈동자는 미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참다운 성보를 만드는 마지막 절차를 암시합니다. <관음보살도>에 그려진 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지만, 마치 성스러운 그림을 그렸던 전설 속 파랑새가 떠오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송광사 응진당에 있는 불화로 석가모니와 보살들을 그린 영산회상도를 중심으로 십육나한도가 배치되어 있다. 그림들은 응진전 내부에 신앙적인 구도에 맞추어 제작되어 당시의 구도와 제도를 살펴볼 수 있다.
<77. 의겸이 판테온처럼 구성한 송광사 응진당 영산회상도와 십육나한도, 송광사 응진당 영산회상도와 십육나한도, 삼베에 색, 송광사 성보박물고, 보물, 1. 영산회상도, 의겸 등 11명, 1724년>
<2. 제11.13.15존자, 붕안 등 3명, 1725년>
<3. 제12.14.16존자, 회안 등 3명, 1725년>
의겸은 전각 전체를 장엄하는 큰 불사를 맡았습니다. 그는 1724년부터 1725년까지 제자들을 이끌고 송광사의 응진당, 영산전, 불조전 등 전체 불화를 새롭게 그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들은 전각 내부를 통일된 주제로 장엄하기 위해 건축 공간 벽면 전체를 하나의 화폭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응진당 영산회상도>에는 불화 조성을 주도한 수화승인 의겸이 이름이 있지만 함께 조성한 <십육나한도>에는 그의 이름이 없습니다. 여러 폭의 불화를 제작할 때는 각기 주제를 분담하되, 조성을 주도하는 수화승의 밑그림과 제작 방식, 양식 등을 화승들이 습득하였기에 불화 전체가 외형적으로 통일되었을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78. 화승 의겸 등이 그린 영취산에서 석가모니의 설법 장면, 해인사 영산회상도, 의겸 등 12명, 조선 1729년, 비단에 색, 합천 해인사, 보물>
의겸을 비롯해 열두 명의 화승이 1729년에 완성한 영산회상도입니다. 석가모니부처를 중심으로 보살, 나한, 사천왕, 팔부중 등 존상 253명을 크기를 달리하며 원근감 있게 그렸습니다. 금니를 자유자재로 사용한 붓의 필력과 본존에 채색된 금색을 바탕천 뒤쪽으로 배어 나오게 한 배채법에서 그가 조선 전기 불화 전통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화 화기에는 의겸 이름 앞에 ‘붓의 신선’이란 호칭이 적혀 있습니다. 불보살과 나한이 입고 있는 옷의 문양부터 대좌와 같은 기물에 이르기까지 매우 화려합니다. 화면 전체를 장식한 금니 문양 등의 섬세한 표현은 왜 그를 ‘붓의 신선’이라 불렀는지 짐작케 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붓의 신선, 의겸
의겸은 조선 전기의 불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여 불화의 또 다른 전통을 만든 18세기의 대표적 화승입니다. 의겸에게는 붓의 신선을 뜻하는 ‘호선(毫仙)’,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승려라는 의미의 ‘존숙’, 최고의 존칭인 ‘대정경(大正經)’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불화의 안정적인 구도와 탁월한 인물묘사, 세심한 필선은 왜 그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보여줍니다. 의겸은 대형 괘불의 조성과 전각 전체를 장엄하는 대형 불사를 여러 차례 총괄했고, 그 어떤 화승보다도 먼 길을 오가며 왕성한 삶의 자취를 남겼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자리한 곳을 정토로
사찰의 전각은 불교 교리와 세계관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공간입니다. 불단에는 신앙의 대상을 상징하는 불상이 봉안되고, 그 뒤편에는 불화가 걸려 전각이 상징하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신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을 정신과 믿음이 깃든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만들었던 승려 장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명예나 부귀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는곳마다. 주인이 되고, 하늘 일마다 진실하고 아름답게 임했던 예술가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함께한 모든 이의 행복을 바란 그들은 진정한 예술가이자 수행자였습니다. 그들의 손끝에서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와 고요한 설법 장면이 만들어졌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79. 화승 신겸이 그린 사십이수관음보살도 밑그림과 완성작, 고운사 사십이수관음보살도 밑그림, 신겸, 조선 1828년, 종이에 먹, 통도사 성도박물관>
<2. 고운사 사십이수관음보살도, 신겸 등 40명, 조선 1828년, 비단에 색, 의성 고운사>
화승 신겸이 제작한 <사십이수관음보살도>의 밑그림과 완성작입니다. 밑그림의 유려하고 복잡한 필선에서 30년 이상 활동하며 이룩한 신겸의 높은 경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마흔두 개의 손에 갖가지 물건을 들고 있는데, 이 가운데 촉지인과 설법인을 한 여래의 모습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입니다. 긴 얼굴에 큰 코, 가운데 몰려 있는 이목구비는 신겸 특유의 얼굴표현 방식을 보여줍니다. 밑그림 하단에는 ‘푸른 붓’을 의미하는 낙관도 찍혀 있어 화승으로서 신겸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색을 입혀 완성한 불화에는 화승 40명이 참여했습니다. 강렬한 색채 대비와 적극적인 금색의 사용이 돋보입니다. 불화에 장식성과 화려함을 더하는 신겸의 화풍이 작품에 잘 나타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80. 신겸이 필사한 사경, 묘법연화경요해, 신겸, 조선 1821 ~1824년, 감지에 금니, 서울 청량사>
<필사한 사경>
화승 신겸이 1821년부터 1824년까지 여러 사찰 승려의 도움을 받아 직접 필사한 사경입니다. 권마다 기록된 시주자 명단에는 경상도 인근 사찰뿐 아니라 강원도, 충청도 등 다른 지역 사찰의 승려들까지 폭넓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권5에는 신겸의 법과 계를 받은 제자 24명이 계를 만들어 필사를 도운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밖에도 신겸은 10년에 걸쳐 다른 승려들에게 종이와 먹을 시주받아 <화엄경소초> 80권을 필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신겸은 불화뿐만 아니라 경전의 필사에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가 완성한 사경에는 수행승으로서의 그의 면모와 큰스님으로 존경받던 폭넓은 인맥이 담겨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81. 승려 장인, 신겸의 얼굴, 신겸 진영,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문경 김룡사>
<얼굴부분>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사불산 대승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화승 집단을 대표하는 신겸의 초상화입니다. 신겸은 화승이자 대선사로 존경받았으며, 화면에는 ‘퇴운당 대선사 신겸 진영’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는 완숙한 경지에 다다른 화승으로 경전의 필사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불사 내용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는 증명의 역할까지 맡는 등 수행승이자 예술가로서 승려 장인의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현재 전하는 화승의 초상은 매우 드문 편으로, 실제 불화를 그린 화승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이자 사찰의 가장 큰 어른, 신겸
승려 장인이 실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화승 신겸은 ‘대선사’로 존경받으며 승려 문중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 도상과 화풍을 구사했습니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불화의 필선은 화승으로서 그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며 오랜 시간에 걸친 경전 필사는 수행승으로서 그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화승이자 선사로서 그의 삶과 정체성은 후배 화승에게 이어졌습니다. 드물게 남아 있는 신겸의 초상화는 실천적 자세로 불사와 수행에 임한 그의 삶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그들이 꿈꾼 세계
조선시대 불상과 불화가 봉안된 전각에서 우리는 승려 장인이 꿈꾼 아름다운 불교 세계와 마주합니다. 이들은 불교 교리를 바탕으로 동원할 수 있는 각종 시각 매체의 힘을 빌려 자리한 곳을 아름다운 불국토로 만들었습니다. 승려 장인은 매일 어두운 전각에서 향을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를 올렸고, 앞 시기의 누군가가 만들어 낸 금빛 찬란한 부처와 마주하며 새로운 영감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법당은 그림과 조각, 공예품이 어우러진 마치 갤러리와 같은 아름다운 곳이었으며, 승려 장인의 꿈과 불교의 진리가 담긴 성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식화된 기존의 표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거듭했습니다. 목각설법상이라는 입체적인 정토(淨土)를 만들고, 시공을 초월한 부처의 세계를 표현하고, 무수하게 중첩된 불교 세계관을 하나의 평면에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89. 서방정토로 오르는 승려 뒷모습, 염불서승도, 김홍도, 조선 19세기 초, 모시에 엷은 색, 간송미술문화재단>
노승이 연꽃 위에 앉아 있습니다. 뒷모습이라 스님의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곧은 자세에 야윈 목, 달빛처럼 머리 주변을 비추는 둥근 광배는 그의 오랜 수행을 짐작케합니다. 김홍도는 간략한 필선으로 승려의 머리를 그리고, 붓질 몇 번으로 폭이 넓은 잿빛 장삼을 표현했습니다. 감상자를 보지 않고 뒤돌아 앉아 서방 세계를 향하는 노승의 꼿꼿한 모습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롯하게 수행하며 또 다른 예술을 만들어 낸 조선의 승려 장인이 떠오릅니다. 초월적인 존재를 그린 불교회화를 일반 화화와 동일하게 논할 수는 업겠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처럼 우리 곁에는 마음이 머물고 싶은 곳,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손끝으로 펼쳐낸 또 다른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승려 장인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장인을 기억하며>
불교미술은 조선 후기 문화를 떠받치는 하나의 축이었고, 승려 장인은 이 시기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 숨은 주역이었습니다. 승려 장인은 사찰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모두에게 열린 미술 세계를 펼쳐 보였습니다. 이상향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며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치유와 안식을 주고자 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스스로 공동체적 성격을 띠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물 또한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과 같은 집단은 근현대 역사의 굴곡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도로서 승려 장인의 전통은 없어졌을지 몰라도 공동체를 꿈꾸었던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단절되지 않고 문화적 DNA로 우리 삶에 남아 지금도 자연스럽게 여러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지 않을까요? 만든 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선 후기의 불상을 바라보며 승려 장인들을 기억해 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