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수원부, 부속관청과 장용외영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 행차시 임시로 머물던 행궁으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다. 이곳은 국왕 행차시 머무는 행궁과 수원유수가 근무하던 수원부 관아, 그리고 정조의 친위부대라 할 수 있는 장용영 군사들이 머물던 군영의 역할을 같이 하던 곳이다. 정조가 화성축성을 끝냈을 무렵에는 전체 430칸으로  궁궐에 버금가는 규모의 행궁이 완성되었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낙남헌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졌다. 현재의 건물들온 199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객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복원되어 조선시대 행궁과 관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풍루>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2층누각을 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관찰사가 있던 감영(監營)이나, 목사(牧使)가 있는 목(牧), 부윤(府尹)이나 유수(留守)가 있던 부(府) 등 규모가 큰 지방행정 기관의 출입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화성행궁의 성격이 수원부 유수의 집무장소이기 때문이다.

신풍루(新豊樓)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년(정조 14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그 후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신풍루 추녀마루의 잡상들>

악귀를 물리치는 잡상은 궁궐 추녀마루에만 설치할 수 있는데,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화성행궁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성행궁 앞 광장>

신풍루 앞에는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아주 큰 고목이 우뚝 서 있다.

<화성행궁 건물배치를 형상화한 조각>

복원되지 않은 객사를 제외한 현재의 건물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화성행궁이라 적힌 현판>

<좌익문>

관아 아문인 신풍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중문에 해당하는 좌익문(左翼門)이 나타나고 좌.우에 수원부(水原府) 부속관청과 장용외영에 속한 남.북군영이 자리잡고 있다.

<느티나무>

중문 앞 마당 집사청이 있는 왼쪽편 마당에 느티나무 고목이 남아 있다. 마당 오른쪽에 북군영과 집사청이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객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마당 왼쪽편 출입문>

지금은 쉼터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는 객사로 연결되는 출입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성행궁에는 일반 관아에 비해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아 건물이 많은 편이며, 정조가 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친위군사조직인 장용외영을 설치했기 때문에 군영 건물 또한 설치되었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는 일반 지방관아 아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신풍루의 원래 이름은 진남루였는데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풍루는 ‘국왕의 새로운 고향’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풍루 좌우에는 수원 화성 장용외영 친군위가 숙직하던 남.북군영이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에는 기병으로 구성된 장용외영의 핵심 병력인 친군가 수직근무하던 북군영과 남군영이 신풍루 좌.우에 자리잡고 있으며 각기 100명씩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북군영 안쪽에는 행궁의 잡무를 맡아 보던 집사청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군영 안쪽에는 수원부에 근무하던 말단 관리들의 사무실인 비장청과 서리청이 자리잡고 있다.

<집사청>

집사란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 등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집사청 건물 맞은 편에 있는 건물>

집사청에는 행각을 두지 않고 두 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집사청에서 북군영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집사청(執事廳)
화성행궁의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좌익문 밖 동북 담 안에 1789년에 세웠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장용외영 기병들이 숙직근무하던 북군영>

지휘부가 숙식하던 건물로 보이며, 주위에 행각들로 둘러져 있다.

<북군영 출입문과 행각>

북군영(北軍營)
‘화성성역의궤’에는 관아건물로 분류해 놓았다. 장용외영의 친군위(화성의 기병)는 처음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곳이 남.북군영이다. (화성행궁 전체는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방위로 볼때 남쪽과 북쪽방향에 군영이 있다.) 1789년 군영 24칸을 지은데다가, 정조 18년 좌우익랑 21칸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을 정하여 각기 100명씩 양영에 나누어 방어하였다. <출처: 수원시청>

<중문 앞 마당 왼쪽>

남군영과 비장청, 서리청, 외정리소가 배치되어 있다.

<비장청>

비장청은 수원부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소 앞에 위치하고 있다.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 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들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창청에 속한 행각>

비장청(裨將廳)
조선시대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등을 따라다니는 관원을 비장(裨將)이라고 하는데, 비장청은 수원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소 앞에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에 세웠는데 1796년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된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수원부 하급관리인 서리들이 근무했던 서리청>

현재 비장청 건물이 서리청이었나, 비장들에게 밀려났던 것으로 보인다.

<서리청 행각>

<밖에서 본 모습>

서리청(書吏廳)
서리(書吏)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 건물을 이청으로 쓰게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된 것이다. <출처: 수원시청>

<남군영>

화성행궁 제일 앞쪽에 위치한 남군영 건물. 앞면 5칸 규모의 건물로 아마도 사무실과 지휘부가 숙직하던 장소로 생각된다. 복원된 건물이지만 당시 화성의궤에 워낙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기때문에 원형과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남군영 100명의 군사들이 숙직했던 방들이 있는 행각들>

<밖에서 본 모습>

남군영(南軍營)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관아 건물로 분류해 놓았다. 장용외영의 친군위(화성의 기병)는 처음 좌.우열로 각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곳이 남.북군영이다. 1789년 군영 24칸을 지은데다가 정조 18년 좌우익랑 21칸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된 것이다. 1798년 군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을 정하여 매년 각기 100명씩 양영에 나누어 방어하였다. <출처:수원시청>

화성행궁 유여택 앞쪽에는 외정리소가 설치되어 있다. 외정리소는 역대 임금이 화성행궁을 행차할 때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당시 화성행차른 준비에서 결과정리까지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수원유수가 그 업무를 겸임했다고 한다. 지금도 정조시절 화성행차 결과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우리의 빼어난 기록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수원화성의 의미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화성행궁 유여택 앞에 있는 외정리소>

외정리소는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시 화성행궁의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외정리아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출입문>

<외정리소 마당>

외정리소는 수원유수가 거처하는 유여택 마당 행각 바깥쪽에 건물을 지어 공간을 마련하였다.

<외정리소의 중심이 되는 건물>

크지는 않지만 온돌방과 대청마루를 갖춘 관아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자 같은 건물>

건물은 온돌방 바깥쪽에 툇마루를 두어 정자나 사랑채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행각>

외정리소 행각은 사람이 근무는 작은 온돌방도 있지만, 행사를 정리하기 위해 많은 책자 등을 보관하기 위한 다락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물건들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각 내부>

정리사가 행사의 준비를 위해 행사 기물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장면을 연출한 공간이다.

<기층헌(起層軒)>

궁중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들이 보관되어 있다.

외정리소(外整理所)
정리소는 1795년 을묘원행(乙卯園行)에서 펼쳐질 각종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기관이었는데, 화성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행궁에서 행사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영내 조방(소속 관원들이 조회하는 건물)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 화성행궁이 완공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外整理使)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수원유수가 겸직하였다.현재의 건물은 1998년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출처: 수원시청>

화성행궁(華城行宮)
행궁은 왕이 항상 머물며 국사를 주관하는 본궁(本宮)과 달리 전라, 휴양, 능원 참배 등으로 지방에 행차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재소(行在所)로 사용하는 곳이다. 화성행궁은 화산 현륭원 참배의 목적 외에 정조 임금이 1804년 양위 후 장차 수원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으므로 그 어떤 행궁보다도 대규모로 건설되었으며 팔달산 동쪽 기슭 수원화성의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화성행궁은 1789년 옛 수원 읍치였던 화산아래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긴 수원신읍(水原新邑)의 관아로 건축된 후 이듬해인 1790년 5월7일 약 430칸의 관아가 완공되면서 행궁의 역할도 지니게 되었다. 이후 1794년 화성성역을 시작하면서 각 건물을 증축하거나 재배치하여 1796년 화성성역이 끝날 무렵에 무도 합하여 576칸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1795년 윤2월 혜경궁 회갑연의 다양한 공연 예술 및 행사가 치러진 중심무대였으며 정종와 후대의 국왕들이 능행차 때마다 머물렀던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이었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그 터는 경기 도립병원, 신풍초등학교, 수원경찰서 등이 자리하였고 낙남헌, 노래당 건물만이 신풍초등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에 1989년 10월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96년부터 본격적인 화성행궁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2년 1단계로 전체 576칸 중 482칸을 복원 완료하였다. <출처:수원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