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상나라 때 도자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회유도기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한나라때 녹유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당나라 때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당삼채가 제작되었다. 송나라부터는 중국은 전국 각지의 가마들에서 특색있는 도자기들이 생산되면서 국제교역에 있어서 중요한 거래품목이 되었다. 원나라 때에는 대량생산을 통해 선박을 이용한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도자의 길’이라는 해상실크로드가 생겨났다. 명.청대에는 경덕진을 중심으로 다양한 채색자기가 만들어졌다. 중국의 도자기 수출은 서구사회가 동방무역로 찾아 나서게 되는 대항해시대의 동기가 되기도 했으며, 유럽에 전해진 중국의 도자기들은 서구사회의 생활모습을 크게 바꾸기도 했다
중국의 주요 가마터와 도자기. 북송대까지는 중국 도자기는 황하 주변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나, 북방민족의 압박 등의 이유로 남송대 이후에는 월주요, 경덕진요 등이 중국도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남청북백(南靑北白)
당대에 차 마시는 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자기 문화도 함께 발전하였다. 남쪽 지방의 월요 청자, 북쪽 지방의 형요 백자를 중심으로 ‘남청북백’이라는 지역적 특징이 형성되어 자기의 문화적 가치를 더욱 높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자기(瓷器)
중국 자기는 한대 회유(灰釉) 계통의 시유 도자기에서 시작되었으며, 당대 저장성(浙江省) 월요(越窯) 청자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백자가 생산되어 ‘남청북백(南靑北白)’의 시대를 맞이한다. 청자와 백자의 제작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송대에는 전국 각 지역의 가마에서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생산되어 자기문화의 황금기를 이룬다. 이후 원대에는 백자와 청화백자를 주로 생산한 장시성(江西省) 경덕진요(景德鎭窯)가 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어 명대에는 화려한 채색 자기가 등장하였고, 청대에는 자기 생산의 모든 기술가 예술성이 집약되어 중국 자기 제작 발전의 정점에 이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송나라 이후 중국 각지에서는 각기 특색이 있는 도자기들을 생산하는 가마들이 생겨났는데, 북방지역에서는 백자계통을, 남방지역에서는 청자계통의 도자기를 많이 만들었다. 중국의 주요 가마로는 북방지역의 정요, 요주요, 여요, 균요, 자주요 등이 있고, 남방지역에서는 월주요, 용천요, 건요, 길주요, 경덕진요가 있다. 명대 이후에는 청화백자와 채색자기를 대량생산했던 경덕진요가 중국을 대표하는 곳으로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으며, 서구의 도자기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서양에서 생산되는 많은 생활용품 도자기들에서 중국 경덕진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요주요(耀州窑)는 산시성(山西省) 동천시(銅川)이 부근에 있던 가마이다. 송대에 문양이 이씨는 청자를 만들었다. 금대에는 황갈색 유약을 칠한 자기를 구웠다. 용천요와 비교해서 북방청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월요(越窯)
월요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마로 저장성(浙江省) 일대에 위치한다. 당대에 월주(越州)에 속해 있어 월요 또는 월주요라고도 한다. 월요에서는 동한 말기에 처음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당대에 이르러 독특한 풍격을 이룸으로써 남방 청자의 대표적인 가마가 되어싿. 우리나라 초기 청자의 원류로 추정되는 ‘옥벽저완玉璧底碗’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참외모양 주전자, 꽃모양 대접과 접시, 잔받침 등이 유명하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요주요(耀州窯)
요주요는 산시성(陝西省) 통촨(銅川) 일대에 위치한다. 당대부터 언대까지 700년간 자기를 생산하였다. 당대에는 흑자, 백자, 청자를 생산했고 송대에는 주로 청자를 제작했다. 도자기 표 면은 다양한 문양을 새기거나 찍어서 장식되었으며, 섬세하고 세련된 문양은 당시 도공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주로 반(盤), 완(碗), 병(甁), 잔(盞), 향로 등을 제작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용천요(龙泉窑)는저장성(浙江省) 부근에 있던 중국 최대의 청자가마이다. 북송대에 생겨 금,원때에 크게 흥성했다가 명대 정덕진에 밀려 쇠퇴하였다. 용천요는 장생일.장생이 형제가 만든 가요(哥窑)와 제요(弟窑)가 있다. 가요는 유약에 잔금효과(균열무늬)가 있는 검은색 자기이며, 제요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용천에서 만든 청차의 빛갈은 옥(玉)과 같은 빛깔을 내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용천요(龍泉窯)
용천요는 저장성 서남부에 있는 용천 지역의 명칭에서 유래했다. 중국 청자의 상징이었던 월요가 쇠퇴의 길을 걷자 남송 시기에 용천요 청자가 절정기를 맞으며 중국 청자의 새로운 전통을 잇게 된다. 이 시기의 용천요 청자는 남송 관요(官窯)의 영향을 받아 바탕흙이 얇아지고 유약이 두터워지며 질 좋은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한닫. 원대 용천요에서는 일상생활 용품에서 장식용 기물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의 청자를 제작했으며, 큰 화병, 접시 등을 제작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정요(定窑)는 중국 송대 5개 가마 중 하나로 백자를 만들었던 곳이다. 당나라말기부터 송대까지 상아와 같은 백자를 만들어 궁중에서도 사용했다고 한다. 가마터는 허베이성 곡양현 일대에 있다. 금.원대에 장인들이 강남으로 이주하면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정요(定窯)
정요는 송대 5대 명요(名窯)의 하나로 지금의 헤베이성(河北省) 취양현(曲陽縣) 일대에 있었다. 당대에는 백자만 생산하였으며, 송대에는 백자를 주로 생산하면서 흑유(黑釉), 갈유(褐釉), 녹유(綠釉) 자기도 생산하였다. 북송 후기에 도장으로 무늬를 찍는 인화(印花) 기법이 등장하여 바탕흙이 마르기 전에 접시나 대접 안쪽에 도구를 이용해 무늬를 찍어 장식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자주요(磁周窑)는 하북성(河北省) 한단시(邯鄲)에 위치한 가마로, 송.금.원대 민간에서 선호한 자기들 생산하였으며 현재까지 민간용 자기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자주요에서는 백유(白釉)를 많이 만들었고 흑유, 녹유, 삼채 등도 만들었다. 장식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음양각(陰陽刻), 가채(加彩) 등을 사용했다. 다양한 문양과 함께 자유롭고 소탈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자주요(磁州窯)
자주요는 송.원대의 대표적인 민간 운영 가마로 헤베이성(河北省) 츠현(磁縣)에 위치한다. 자주요 자기 제작법이 특징은 흰 바탕에 검은 선으로 그림을 그리는 백지흑화(白地黑花) 장식기법으로 허난성과 산성 등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자기를 제작했다. 자주요의 도자기는 일반 서민들이 사용했다. 자주요의 바탕흙은 정요 백자의 것과는 달리 거칠고 조잡하며 짙은 색을 띤다. 접시, 대접, 병, 항아리, 베개 등이 생산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경덕진요(景德镇窑)는 도자기를 생산했던 중국의 많은 가마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 장시성(江西省) 동북부 창강(昌江) 남부 부량현(浮梁縣)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조시대부터 시작하여 당대에는 백자를 만들었다. 송대에 경덕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우수한 백자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청백자(靑白瓷)가 유명하다. 원대에는 청화백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백자가 만들어졌다. 명대에는 관요(官窯)가 설치되었으며 명말청초에는 이곳에서 만든 자기들에 세계각철 대량 수출되어 중국을 대표하는 생산품이 되었다.
경덕진요(景德鎭窯)
경덕진요는 장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에 위치하며 오대부터 청자와 백자를 생산하였다. 송대에는 ‘영청(影靑)’이라 불리는 청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원대에는 청백자에서 벗어나 난백유(卵白釉) 백자가 등장하고, 아울러 백자의 전성기를 이루는 청화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명.청대에는 청화백자가 대세를 이루면서 투채(鬪彩), 오채(五彩), 분채(粉彩), 법랑채(法朗彩) 등의 채색 자기(彩色瓷器) 제작이 활발해 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오채(五彩)는 유약을 발라 구워낸 백자 표면에 적색, 녹색, 황색 등의 그림물감으로 문양을 그리고 다시 가마에 넣어 낮은 온도로 구워낸 것이다. 송나라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원말~명초에 경덕진요에서 굽기 시작하였으며, 명나라 중기에 대량 생산하여 해외로 수출하였다. 청나라때에는 금채, 분채, 양채 등 다양한 수법이 개발되었다.
병의 목부분에는 동자가, 몸체에는 여덟 명의 신선을 오채로 그렸다. 팔선은 종리권, 장과로, 한상자, 이철괴, 조국구, 여동빈 6명화 남채화, 하선고 두 여선을 합한 8명이 신선을 가리킨다. 이철괴의 호리병에서 사람의 영혼이 빠져 나오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투채(鬪彩)는 먼저 청화안료로 문양의 윤곽선을 그리고 투명유약을 입혀 구워낸 다음, 철화 윤곽선에 각종 채색안료로 도안을 완성하고 다시 저온으로 굽는다. 명나라 때(15세기) 가장 발달했다.
분채(粉彩)는 도자기 장식기법 중 하나로 오채(五彩)와 마찬가지로 백자 위에 채색하여 다시 굽는 방식으로 법랑채라고도 한다. 칠보에 사용하는 산화석을 썩은 재료를 사용하며 색의 수가 많고 세밀한 그림이나 농담(濃淡)의 표현이 쉽기때문에 화조(火鳥)나 인물을 표현하기 쉽다. 청나라 강희제때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제홍유(霁紅釉)는 적색을 띠는 유약으로 ‘선홍유(鲜紅釉)’ 또는 ‘보석홍유’, ‘취홍유’ 등으로 불린다. 명 선덕(宣德, 선종)대에 동홍유가 만들어졌으며, 명청대에 주로 만들어졌다.
자기 제작 기술과 유약의 개발 등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명대를 거쳐 청대에는 화려한 기교, 다양한 기종 등 새로운 발전 양상을 보여준다. 이 매병은 몸체 전면에 복숭아빛 연지색과 흐린 진홍색의 미세한 반점을 띤 유약을 시유(施釉)하였는데, 백색 유약을 사용한 구연부 및 그 안쪽의 흰 빛깔과 대비되어 매우 화려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녹유(綠釉)는 도자기를 굽는 온도가 낮가 납이 들어가서 구리로 녹색을 발색한다. 고대 로마에서 사용되었으며 한나라 때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대 녹유는 기와를 비롯하여 다양한 그릇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으며, 낙랑군과 고구려에도 전해졌다. 당삼채와 요(遼)의 녹유, 송의 자주요 등에서 녹유를 볼 수 있다.
말안장 모양이며, 전체적으로 녹색을 띠었고 유약을 엷게 박락되었다. 원통형 입에 뚜껑이 있으며, 끈을 달 수 있도록 2개의 구멍을 뚤었다. 각각의 구멍에는 인물이 표현되었고, 몸통 부분에는 음각으로 꽃잎을 표현했다. 요대(遙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국 도자는 다양한 유약 개발과 제작 기법을 통해 다채로운 양상을 보인다. 그중 매우 특별한 채색 자기인 법화(法花)자기이다. 법화 기법은 점토 문양 안에 다른 색깔의 유약을 넣어 만드는 독특한 기법으로, 금속공예의 법랑(琺瑯)기법, 칠보 기법을 도자기에 도입한 것이다. 우선 표면에 점토 문양 외곽선을 만들어 높은 온도에서 구운 뒤 문양 안에 감(紺), 황(黃), 청색(靑色) 등의 유약을 칠하고 다시 낮은 온도에서 구워 내는 제작 과정을 거친다. 이때 망간이 주재료인 진한 유색의 바탕 면과 원색을 채운 점토 문양들 간의 강한 색채 대비와 입체감이 살아 감각적인 효과가 돋보인다. 이 항아리에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말 탄 관리가 시총을 데리고 가는 장면을 표현하였다. 항아리의 목 부분에는 구름무늬가, 어깨에는 여의두 무늬 속에서 피어오른 연꽃이 묘사되어 있다. 법화자기는 산시성에서 처음 만들어져 하남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제작되었으며 특히 명대 후기 경덕진요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 법화자기도 경덕진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채색자기(彩色瓷器)
경덕진요로 대표되는 명.청대 자기는 원대의 청화(靑花), 유리홍(釉里紅) 등의 장식 기법을 바탕으로 발전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기술적 성취는 유약 위에 채색을 가하는 채색자기의 탄생이다. 청화가 유약을 입히기 전 청화 안료로 무늬를 장식하는 것이라면, 채색자기는 유약을 입혀 구운 뒤 다양한 색채의 안료로 무늬르 ㄹ그린 후 저온에서 다시 구워 제작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발전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채색자기는 기본적으로 홍(紅), 황(黃), 녹(綠), 남(藍), 자(紫)의 다섯 가지 색채를 사용해 일반적으로 오채(五彩)라고 하며, 분채(粉彩), 투채(鬪彩), 법랑채(琺瑯彩) 등 다양한 기법으로 개발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청화(靑花)는 흰바탕에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위에 투명유약을 입혀서 1300~1350℃의 고온에서 구워낸 자기이다. 당말기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원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명 만력제(재위, 1572~1620) 때 황금기를 이루었으며, 청나라 강희,건륭,옹정제 때 최고수준의 청화백자를 만들었다. 안료인 코발트는 16세기까지 서남아시아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이후 중국산 토청을 사용하게 되면서 색이 나빠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전기에는 청화백자를 만들었으나, 안료의 수입이 어려워 많이 제작되지는 않았다.
세계를 매혹시킨 청화백자(靑畵白瓷)
경덕진의 청화백자는 원대 14세기부터 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무역의 경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코발트가 수입되고, 경덕진의 질 좋은 백자원료와 유약의 생산으로 아름다운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우수한 원료와 다양한 제작 기술의 개발로 경덕진의 청화백자는 중국 내 뿐만 아니라 명.청대에는 전 세계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청화백자는 코발트 안료를 사용하여 붓으로 무늬를 그린 후 투명유을 씌워 구워내면 흰바탕에 푸른색의 무늬가 강렬한 색상대비를 이룬다. 크기가 큰 대형의 자기부터 소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작되었으며, 도자표면에 묘사된 무늬 역시 세밀하고 정교한 꽃과 과일무늬부터 회화성을 강조한 사군자, 산수, 인물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명대 암수 한 쌍의 사자조각상이다. 수사자가 발로 누르고 있는 공은 권력을 상징하고 암사자의 새끼 사자는 계승자를 의미하여 자손이 흥성해져서 관직에 오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 사자상은 궁궐의 아문이나 대문에 배치되다가 송대 이후에는 벽사와 길상의 의미로 개인의 주택이나 공원 등에도 세워지게 되었다. 명.청대에 이르러 이와같이 암수 한 쌍의 사자상을 문 앞에 세우는 형식이 정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흙, 돌, 금속으로 만든 다양한 제품에 옻칠을 하는 칠기(漆器) 역시 한(限)대에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옻칠을 사용하면서 금, 안료 등 다양한 재료로 다양한 문양을 넣어 장식하였으며 후대에 도자기로 발전되는 기반이 되었다.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 낙랑과 삼한 등 한반도에도 옻칠을 한 유물들이 발견되고있다.
이 칠합(漆盒)은 다양한 제작 기법과 기교로써 최상의 화려함을 표현한 청대 공예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조칠(彫漆) 기법으로 만들었으며, 이 합은 여러 번 칠한 칠층의 색감 변화로 입체감과 화려함을 극대화했다. 뚜껑 윗면 중앙에는 칠보(七寶)가 감긴 화분의 오색찬란한 기운 위로 커다란 ;春’자가 있고, 글자 획 위로 소나무 아래 복숭아를 든 신선과 사습이 표현된 원을 배치하였다. 굽바닥에 ‘대청건륭년제’가 새겨져 있어 이 합이 청나라 건륭 연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칠기
중국 칠기고예는 일찍이 7천여 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존재했다. 이후 수천년간 끊임없이 발전하여 채회(彩繪), 전칠(塡漆), 상감(象嵌), 조칠(彫漆), 금칠(金漆) 등의 다양한 기법을 선보이며 중국 전통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전국시대의 옛 무덤에서는 일상생활 용구에서 제기, 악기, 무기 그리고 장례용 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칠기가 출토되어 중국 고대 칠공예의 제작 상황을 알려 준다. 당대에 시작된 조칠기법은 송.원대에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척홍(剔紅) 또는 조홍칠(彫紅漆)이라고도 불리는 조칠은 나무나 동으로 만든 몸체에 붉은색 칠을 수십번 한 후 조각하는 기법을 말한다. 붉은색의 화려한 효과를 내는 조칠은 명.청대에 이르러 일상생활 용기에서부터 병풍, 침상, 의자, 건축 장식에 이르기까지 제작 범위가 확대되면서 중국의 독보적인 공예 예술로 발전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2년, 2022년
- 안내문, 산동성박물관, 2014년
-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