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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면천읍성, 옛 면천군 읍치

충남 당진군 면천면에 있는 면천읍성(沔川邑城)이다. 조선초 세종 때(1439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읍치에 쌓은 읍성이다. 성을 둘레는 약 1,200m 정도로 큰 돌을 다듬어 쌓았았는데 바깥쪽은 석축이고 내부는 흙으로 덮어 경사진 토축을 이루고 있다. 서쪽과 남동쪽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남쪽 성벽과 남문은 최근에 복원하였다. 성문은 4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남문과 옹성을 복원해 놓았다. 조선초 해안에서 가까운 읍치에 쌓은 평지성으로 쌓은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와 내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진 면천읍성>

면천군은 홍주진관에 속했으며 종4품 동첨절제사가 파견(면천군수가 겸임?) 되었으며, 산하에 수군(선군,船軍)이 배치되었다. 조선초에는 충청지역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면천지역으로 운송하여 창고에 두었으나 성종 때 공세곶으로 창고로 옮기면서 그 기능이 약해졌다. 경기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해산물과 소금의 산지이기도 했다. 읍치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읍성이 세워졌다.

<면천읍성 위성지도>


<면천군지도, 여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년>

 면천읍성은 일제강점기 이후 면소재지로 도시화가 덜 진전되어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동쪽은 저수지를 쌓으면서 성벽이 훼손되었으나, 서쪽 성벽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서문이 있던 자리 남쪽은 원형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으며 북쪽은 복구되기 전 모습이 남아 있다.

<서문터와 서쪽 성벽>

성벽은 바깥쪽은 큰 돌을 다듬어 석축을 쌓았는데 높이는 3.6m 정도이다. 안쪽부분은 흙으로 경사지게 쌓아 토축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바닥의 폭은 6.8m, 윗면의 너비가 2.4m이다.

<바깥쪽 성벽>

<안쪽 성벽>

<성벽 위>

<정비되기 전 모습을 보여주는 서문 북쪽 성벽>

<서문 북쪽 성벽(안쪽)>

<허물진 성벽을 볼 수 있는 서남쪽 성벽>

남쪽 성벽은 최근에 복원공사를 하여 옛 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옹성이 있는 남문과 양쪽의 치성, 성벽 등이 복원되어 있다.

<서남쪽 성벽>

<서남쪽 성벽(안쪽)>

<남쪽 성벽>

<남쪽 성벽>

<남쪽 성벽(안쪽)>

<남문과 주변 성벽>

<남문 동쪽 성벽>

<남문 동쪽 성벽(안쪽)>

방어시설로는 치성 3곳이 확인되었으며 원래는 7곳의 치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문은 4곳에 두고 있으며 남문은 옹성을 쌓아 방어하고 있다.

<서남쪽 치성>

<남쪽에서 본 모습>

<남문 동쪽 치성>

<남문 옹성>

<남문 옹성 입구>

<남문 옹성 내부>

<남문 문루>

<내부에서 본 모습>

당진 면천읍성(남문)
면천읍성은 세종 21년(1439) 11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읍성으로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과 옹성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36m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 왜구의 공격을 막기 쉽고, 그 옆에 수로가 있다.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 시작한 면천읍성 복원 정비 사업으로 원기루 등 누각을 비롯한 남문의 여러 시설물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으며, 2014년에 완료하였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읍성 서쪽 치성과 주변 성벽에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남아 있다. 성돌에는 ‘기미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축성연도(세종21년)를 확인해 주고 주고 있다. 면천읍성은 충청도 인근 고을의 인원들이 파견되어 축성되었는데 책임 군현, 축성구간 등의 내용이 글로 새겨져 있다. 현재 글자가 새겨진 3개의 성돌이 확인되었다.

<글자가 새겨진 서쪽 치성 부근 성벽>

면천읍성 각자성돌, 500여년 전에도 공사실명제가 있었다.
면천읍성에는 읍성의 축조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각자 성돌이 남겨져 있다. 각자성돌은 면천읍성 공사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돌에 책임 군현의 이름을 새긴 성돌이다. 면천읍성에서 확인되는 각자성돌에는 연도, 구간 책임 군현, 축성구간 등이 새겨져 있는데, 현재의 공사실명제로 공사가 끝난 후 그 구간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해당 군현에서 보수를 책임진다는 표시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는 50여군의 장정들이 면천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면천읍성의 축성에 많은 군현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각자성돌은 총 3개이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치성에는 ‘기미년’이라는 축성연대와 옥천이라는 고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옥천현에서 축성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글자가 새겨진 서치성 성돌>

1. 서치성에서 확인되는 각자성돌에는 ‘기미년 옥천서면 장육십척 사촌’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기미년은 세종21년(1439)으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서 확인하는 축성기록과 일치한다. 옥천은 현재 충청북도 옥천으로 해당 구간부터 옥천현이 축성한 구간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쪽 성벽에는 ‘석성종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볼 수 있다. 석성현 인원이 축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성종면’이 새겨진 성돌>

2. 읍성의 서벽에는 ‘석성종면’이라고 새겨진 성돌이 확인된다. 석성은 현재 충남 부여군 석성면으로 해당 군현의 축성 흔적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치성 끝 부분에는 ‘기미년’이라는 글자와 함께 ‘옥천’, ‘결성’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옥천현과 결성현 인원이 담당한 부분의 경계로 보인다.

<‘옥천’과 ‘결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

3. 서치성 끝 지점에서 확인된 각자성돌은 ‘기미년 옥천 종말’과 ‘기미년 결성수공 사십육척 팔촌 시면’이라 새겨져 있는데 각각 옥천의 끝 지점과 결성(충남 홍성군 결성면)의 첫 지점을 알려주는 성돌이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면천군(沔川郡)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허물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2007년 옛 동헌 출입문인 풍락루를 복원했으며, 면천초등학교가 사용했던 객사터는 2016년 학교가 이전하면서 객사건물을 복원하였다.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읍성 성벽과 객사터에 남아 있는 수령 1,100년의 면천 은행나무, 객사터 앞 오래된 낡은 주택들과 상점들이 읍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면천읍치>

<면천군 객사>

<동헌 출입문인 풍락루>

<객사 마당에 남아 있는 수령 1,100년 은행나무>

<읍치 마을>

당진 면천읍성,
이 읍성은 1439년(세종21) 11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읍성으로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과 옹성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36m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바깥면에 옥천.진잠.석성 등 충청도 관내의 군현 명칭이 새겨진 성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읍성을 쌓는데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성을 쌓은 규정이 잘 반영된 우수한 유적으로 해안지역 읍성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당진군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면천군(沔川郡)”, sillokwiki,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