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헤이안시대 말기에 사원세력을 누르고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고용한 무사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귀족에 고용된 신분이었으나 점차 강한 무력을 바탕을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막부체제를 탄생시키고 지배계급이 되었다. 무사들은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고 새로운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사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미적감각으로 예능, 다도, 공예, 도자 등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뛰어난 기능의 칼과 갑옷은 대대손손 전해지면서, 단순히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와 신체 보호용 의복의 차원을 넘어 일본 무사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훌륭한 도검과 갑주는 미적 가치를 인정받아 예술품이 되었고, 더 나아가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봉헌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전국시대 이후에 일본 칼의 주류가 된 우치가타나는 칼집 그대로 허리춤에 끼워 칼날을 위로 향하게 하여 찬다. ‘가타나’라고 부르기도 하며, 날 길이는 60cm 이상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와키자시는 우치가타나와 같이 허리에 끼워 칼날을 위로 향하게 하여 찬다. 우치가타나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며, 날 길이는 30~60cm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우치가타나, 칼자루에 끼우는 칼날 부분에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와키자시, 칼자루에 끼우는 칼날 부분 양쪽에 제작자의 이름과 국화무늬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칼
일본 칼의 역사는 야요이 시대(기원전 5세기 ~기원후 3세기)에 대륙에서 칼날이 직선인 큰 칼(大刀)이 전해지며 시작되었다. ‘일본도’라고도 불리는 ‘다치(太刀)’는 헤이안 시대 후기인 11세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칼날이 약간 굽은 곡선 모양의 긴 칼로 무사들이 허리에 차고 다녔다. 16세기 전국시대가 되자 많은 군사가 직접 부딪쳐 싸우는 접근전으로 전투 방식이 바뀌면서 다치보다 가볍고 뽑기 쉬운 ‘우치가타나(打刀)’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와키자시(협도脇刀)’는 우치가타나보다 짧은 칼인데, 에도시대 무사는 한 쌍의 우치가타나와 와키자시를 허리춤에 끼워 지니고 다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무사의 칼과 갑주
몸을 보호하는 투구와 갑옷, 그리고 적을 베는 칼은 무사와 떼라야 뗄 수 없는 것들이다. 칼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1573~1603)까지는 무사와 승려, 농민이 모두 쓰던 무기였다. 그러나 1588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농민이 칼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도수령(刀狩令)을 전국에 내렸다. 그리고 에도막부 제5대 통치자인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무사만이 칼을 가질 수 있도록 엄격히 규제했다. 이로써 칼은 무사 계급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한편 헤이안시대 기마 무사가 입었던 ‘오요로이(大鎧)’는 아릅답고 튼튼했지만 무겁고 대량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런데 16세기 전국 시대에 전투 방식이 보병집단끼리 가까이에서 싸우는 접근전으로 바뀌면서 갑주(甲胄)도 가볍고 쉽게 착용할 수 있으며 대량으로 만들 수도 있는 ‘도마루(胴丸)’, ‘하라마키(複卷)’ 등으로 바뀌었다. 그 뒤에 몸통 부분을 판 하나로 만들어 구조를 단순하게 하고 철을 이용해 방어력을 높인 ‘도세구소쿠(富世具足)’라는 갑주도 나타났다. 평화로운 에도 시대가 되자 무사는 칼과 갑주를 무사 권위의 상징으로 여기고 더는 실제로 쓰지 않았다. 무사는 차츰 칼과 갑주 이외에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독특한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며 새 시대의 주역이 되어 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도마루는 갑옷 몸통 부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오른쪽 옆구리에서 묶는 방식으로 입기에 편하다. 또 허리와 넓적다리를 가리는 구사즈리(草摺)가 다섯개 이상으로 나뉘어 있어 다리를 움직이기 쉽다. 가죽이나 쇠로 된 작은 직사각형 조각을 ‘고자네(小札)’라고 하는데, 몸통과 허리, 어꺠를 덮는 부분은 이 고자네를 얽어매어 만들었다. 비늘 모양으로 가죽이나 쇳조각을 얽어매는 것을 ‘오도시(威)’라고 하는데, 이 도마루에는 흰 실로 오도시를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16세기 전국시대 때 등장한 도세구소쿠 갑옷은 몸통 부분을 판 하나로 만들면서 이전 갑옷들보다 구조가 단순해져 대량 생산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재료도 가죽에서 철로 바뀌면서 방어력도 향상되었다. 이 갑옷은 판 하나로 몸통 부분을 만들고 적생, 흰색, 남색실로 구사즈리를 엮은 도세구소쿠 갑옷이다. 용머리 장식을 한 투구는 중세시대 투구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몸통을 앞뒤로 나누고 한쪽을 경첩으로 고정하여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든 갑옷이다. 몸통 부분이 두 장으로 되어 있다는 뜻으로 ‘니마이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갑옷은 보라색 실로 고자네와 구사즈리 몸통 부분을 엮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갑주
일본의 갑주는 몸을 감싸는 갑옷 ‘요로이(鎧)’와 투구 ‘가부토(兜)’로 이루어진다. 헤이안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92~1333)에 걸쳐 사용했던 상급 무사용 갑주’오요로이(大鎧)’는 본래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기마 무사가 입었다. 남북조시대 이후에 전투방식이 가까이 붙어서 벌이는 접근전으로 바뀌면서 차츰 가볍고 입기 쉬운 ‘도마루(胴丸)’와 ‘하라마키(複卷)’를 입게 되었다. 대규모 전투를 겪으며 무기와 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양 갑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3~1573) 말기에는 도마루보다 방어 성능을 높인 도세구소쿠(富世具足)라는 갑옷이 나타났다.
차를 마시는 다도(茶道)는 중국 때 성행하여 한반도와 일본에 전해졌다. 특히 일본에서는 선종 사찰과 막부의 고위층과 상급무사, 귀족층들에 인기를 끌었다. 전국 시대 다도가였던 센노리큐(1522~1591)는 흙으로 벽을 바른 소박한 다실에서 검소한 그릇들로 차를 만들고 즐기는 새로운 다도 문화를 창조했다. 이를 ‘와비차(侘茶)’라고 부르는데, 이후 지방 영주 다이묘와 서민들도 차츰 와비차를 즐기게 되었다. 다도는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로 여겨지고 있다.
구로오리베 다완은 현재 일본 기후현 일대에 위치했던 요지에서 생산했던 미노야키 도자기의 한 종류로, 검은 유약을 일부러 바르지 않은 희 부분을 만들고 그곳에 다양한 무늬를 그려 넣은 찻잔이다. 잔의 형태를 왜곡시켜 대담하게 변형한 것이 특징이다. 구로오리베는 가마에서 다 구웠을 때 가마 밖으로 끌어내 급속하게 냉각시켜 철유를 칠흑같은 검은색으로 발색시킨다. 이때무늬를 그려 넣지 않고 형태만 왜곡시킨다면 ‘오래베구로’가 되고, 흰색 유약을 노출시켜 무늬를 그려 넣으면 ‘구로오리베’가 된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다도에서 중국에서 수입된 찻잔(덴모쿠)을 대신해 조선에서 유입된 고려 다완이 애호되었고, 뒤를 이어 일본 국내에서 직접 생산한 찻잔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센노 리큐(1522~1591)는 와비차의 미의식에 어울리는 고려 다완을 선택해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미의식을 표현한 찻잔을 직접 만들어냈다. 그것이 라쿠 다완이다. 구로오리베 다완은 이러한 일본 다도의 발전 과정 속에서 17세기 에도 시대 때 인기를 얻었던 일본 국내에서 생산된 대표적인 찻잔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무사와 다도
차를 마시는 것은 헤이안 시대부터 왕족과 귀족 등 지배 계급이 즐기던 문화였으나 차츰 무사계급으로 퍼져 나갔다. 전국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가였던 센노리큐(1522~1591)가 귀족들이 선호했던 값비싼 중국 찻잔 등을 거부하고 흙으로 벽을 바른 소박한 다실에서 검소한 그릇들로 차를 만들고 즐기는 새로운 다도 문화를 창조했다. 이를 ‘와비차(侘茶)’라고 부르는데, 이후 지방 영주 다이묘와 서민들도 차츰 와비차를 즐기게 되었다. 에도 막부 3대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다도가였던 고보리 엔슈(1579~1647)는 센노 리큐의 다도에 궁정 취향을 더해 무가의 차 문화를 부흥시켜 ‘기레이사비’라는 새로운 풍조를 일으켰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노(能)는 분라쿠(文楽), 가부키(歌舞伎)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예술이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인 14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노멘(能面)이라 부르는 가면을 사용하며, 전용 극장인 노가쿠도(能樂堂)에서 공연된다. 막부세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발전해 왔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하여 무사계층에서 특히 좋아했다. 노(能)의 내용은 죽은이의 혼령이 주인공인 몽환 노(夢幻能)와 현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현재노(現在能)로 나누어진다. 몽환노가 전통적인 노의 형식과 내용을 계승하고 있다면, 현재노는 무사들의 무용담을 표현하고 있어 무사계층들이 선호했던 분야이다.
두꺼비를 뜻하는 말인 ‘가와즈’가면은 광대뼈가 툭 튀어 나오고 눈두덩이 움푹 패여 있ㅇ드며,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물에 빠져 죽은 남성의 혼령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여, <후지토(藤戶)>, <아코기(阿漕)>와 같이 익사한 자의 혼령이 등장하는 극에서 주로 사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눈이 붉게 충혈되고 눈썹과 수염이 솟구쳐 있는 것이 특징인 가면으로, 젊은 무사의 혼령 역할에 사용된다. 특히 ‘아야카시’는 바다에 나타나는 괴물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때문에, 후나벤케이(船弁慶)와 같이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극에서 자주 사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젊은 여인의 역할에 사용되는 가면이다. 여인의 가면은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가닥수와 흐트러짐, 볼의 야윔, 주름살의 수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연령대와 성격을 다르게 표현하다. 이 가면의 명칭인 ‘고희메’는 여인의 가면 중에서도 매우 드문 것으로, 여인의 가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오모테(小面)’가면을 대신하는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나이 든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가면이다. 눈가가 길게 찢어지고 처진 것으로 보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역할에 사용하였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한냐(般若)는 질투를 참지 못해 괴물로 변해버린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가면이다.
뿔이 난 도깨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의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흉하게 변해버린 여인의 역할에 사용하는 가면이다. 눈알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었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다. 이마 위의 크고 높은 뿔은 여인의 몹쓸 질투심이 넘쳐흘러 솟아난 것이다. 노가면은 이처럼 인간으 심리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독특한 방식을 지니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분노에 가득 차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고 눈에는 핏발이 서리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험악한 모습의 가면으로, 질투에 눈이 멀어 생령(生靈)이 된 여인의 역할에 사용한다. 생령이란 질투나 원한 등의 감정이 너무 강해 살아있는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영혼을 말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노 무대 위에서 이승의 남성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전시된 가면과 같이 젊은 남성의 가면은 주로 요절한 무사의 혼령 역할에 사용된다. 무사를 주인공으로 한 ‘현재 노’중에는, 생전에 전쟁을 업으로 삼아 아수라(阿修羅) 지옥에 떨어진 이들의 성불을 기원하는 내용이 많다. 막부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로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무사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일은 중요한 의무였기때문일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베시미 가면은 14세기에 간아미(觀阿弥)와 제아미(世阿弥) 부자도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오래된 도깨비 가면의 한 종류이다. 크기에 따라 오베시미(大癋見)와 고베시미로 나누는데, 전시된 고베시미는 지옥의 도깨비 역할에 사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무사의 악극, 노
노(能)는 가면을 쓴 배우가 악기 연주에 맞춰 노래와 연기를 하고 춤을 추며 진행되는 일본의 전통 가면극이다. 노는 나라시대(710~794)에 중국에서 전해진 가무극에서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가 노의 형식을 완성시킨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무사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다. 노는 아즈치모모야먀 시대(1573~1603) 전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무사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유달리 노를 즐겼다고 한다. 에도 막부는 노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연했는데, 쇼군이 다이묘의 저택을 방문할 때나 가문의 후계자가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무사의 성인식, 혼례와 같은 기쁜 일이 있을 때 공연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노 가면
노 가면에느 오키나(翁), 조(尉), 기신(鬼神), 오토코(男), 온나(女)의 다섯가지가 있다. 오키나 가면은 오곡 풍성, 자손 번영 등을 기원하는 의식에 쓰는 가면이며, 조 가면은 주로 노인과 신 역할에 쓴다. 기신 가면은 무섭고 특이한 귀신 역할에 쓰는 가면으로, 용왕이나 동물의 신령, 부처, 악귀 가면 등이 있닫. 오토코 가면은 남성을 나타내는 가면으로 귀족, 무사, 청년, 귀공자, 소년 가면 등이 있다. 온나 가면은 여성을 나타내는 가면으로 젊은 여성부터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연령대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 가면들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귀족문화의 발달과 함께 10세부터는 풍경이나 풍속을 표현한 야마토에(大和絵)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전통적인 동양화라 할 수 있는 수묵화는 15세기에 독자적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에도시대에는 일본미술을 대표하는 분야로 풍경이나 풍속을 간략한 선과 화려한 색채로 표현하는 우키오예(浮世絵)가 많이 그려졌으며, 판화(版畵)형태로 널리 공급되었다. 일본의 그림들은 한국이나 중국의 산수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이런 일본의 회화는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하여 서구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병풍은 에도 시대에 현재 일본 효고 현에 속한 이와지 섬과 시코쿠 섬에 위치한 고치 현이 동쪽 지역 일부를 다스렸던 도쿠시마 번의 영토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묘사한 것이다. 8폭 병풍 2틀이 한쌍을 이루며, 오른쪽 병풍은 아오지국(아와지 섬의 옛 지명)을, 왼쪽 병풍은 아와노 국(고치현 동쪽 지역의 옛 지명)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으로 묘사했다. 도쿠시마 번을 다스렸던 영주인 하치스카 가문에서 제작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와지 섬을 그린 오른쪽 병풍 중앙 하단에는 하치스카 가문의 성인 유라 성이 아직 건재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1630년 유라 성이 폐성되기 이전 시기의 풍경임을 알 수 있다. 유라 성은 장대한 석축 위에 여러 층의 누각이 지어진 훌륭한 모습이다. 유라 성 앞의 항구로 여러 척의 배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묘사하여 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른쪽 병풍 상단 우측에는 아외지 섬에 있었던 마을 숫자와 함께 버려진 옛 성터의 위치를 쓴 기록이 있다. 병풍에서도 석축만 남은 옛 성터를 찾을 수 있다. 왼쪽 병풍은 현재의 고치 현 동쪽 지방에 위치했던 아와노 국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바다로 흘러 드는 여러 하천을 중심으로 마을이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일본 병풍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 혹은 비단을 붙인 뒤 종이 경첩으로 연결시켜 만든다. 일본 병풍의 단위는 화면 6장으로 이루어진 1척(隻)이며, 2척이 세트를 이룬 1쌍이 기본적인 형식이다. 화면은 하나당 1선(扇)이라고 하며, 접히는 화면 수에 따라 2곡, 6곡 병풍 등으로 부른다. 나라, 헤이안 시대 때는 병풍의 각 선을 가죽끈으로 연결시켰다. 가마쿠라 시대가 되면 종이 경첩이 발명되어 현재와 같이 앞뒤로 접을 수 있는 병풍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2척 1쌍이 일본 병풍의 기본적인 단위가 된 것은 14세기 전반기부터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가노파와 도사파
에도 막부와 교토 궁정은 그림을 도맡아서 그리는 화가 집단을 두었다. 막부 화가는 ‘고요에시’, 궁정 화가는 ‘에도코로아즈카리’라는 직책을 받았다. 이들은 에도조(江戶城)와 교토 궁궐 전각 안쪽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공식 의례에 쓰는 병풍, 외국 사절에게 줄 선물 등을 제작했다. 가노파는 에도 막부의 고요에시로 활동한 화가 집단이다. 가노파는 공방을 만들어 많은 주문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전국 시대 무장들이 요구하는대로 그림을 그리며 빠르게 성장했다. 1617년에 가노 단유(1602~1674)가 에도 막부 고요에시에 임명된 뒤 가노파는 막부와 관련되 ㄴ회화를 도맡아 그리게 되었다. 한편 도사파(士佐派)는 헤이안 시대에 세운 전통 회화 양식으로 일본 풍경이나 풍속을 그린 화가 집단이다. 에도 시대에 에도코로아즈카리를 맡아 세밀하고 정교한 화풍으로 화려하게 색을 칠하는 우아한 궁정 취향의 작품을 그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도사 미츠오키는 에도 시대 초기 도사파 화가로서, 17세기 중반 궁중화가로 활동화면서 야마토에를 중심으로 하는 도사파를 부흥시킨 인물이다. 헤이안 귀족들의 생활상이 아름답게 묘사된 각 화면에서 에도인들의 귀족 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느낄 수 있다.
<겐지모노가타리> 54첩에서 한 장면씩 골라 그 내용을 적고 그림을 그려 완성한 화첩이다. 교토 궁정의 회화를 도맡아 그렸던 화파인 도사파 화가의 작품으로 인물의 복식과 풍경을 자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장면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금빛 구름으로 감싸고 나머지 부분에 화려하게 색칠한 그림을 배치했다. 이야기는 여러 가지 풀과 꽃이 금으로 그려진 화려한 종이에 쓰여 있다. 첫 줄에는 각 첩의 제목이 쓰여 있어 어떤 내용인지 알게 해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새로운 ‘왕’의 지배권위 – 교토와 <겐지모노카타리(源氏物語)>를 그린 그림
전국시대 무장인 오다 노부나가는 1574년에 <낙중낙외도>와 <게지모노가타리 병풍> 각 한 쌍을 우에스기 겐신이라는 무장에게 선물했다. 왕의 거주지이자 국가 제사와 의례를 치르는 중심지인 교토의 모습을 그린 <낙중낙외도>와 왕권 이야기를 그린 소설 <겐지모노가타리>는 모두 왕조 세계의 권위를 상징한다. <겐지모노가타리>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 신하로 신분이 낮아졌지만 결국 아들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도 준상왕이 되어 권세와 영화를 누렸던 히카루 게지(光源氏)의 이야기이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수도’ 교토와 <겐지모노가타리>로 대표되는 ‘왕조 세계’의 지배자로서 정통성을 지닌 새로운 ‘왕’임을 두 작품으로 과시한 것이다. 이처럼 전국 시대 무사들은 군사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왕에게서 오는 권위를 장악함으로써 지배의 정통성을 얻으려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무사,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말기, 강해진 사원 세력을 누르고 수도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고자 고용한 무사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무사는 처음에는 귀족에게 고용된 신분이었으나 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중앙 조정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동시에 토지를 지배하며 점차 전국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결국 이들은 막부체제를 탄생시키고 지배 계급이 되었다. 그러나 무사들은 무력만을 앞세운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여 각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흐름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전 지배계층이었던 귀족과는 달리 독특한 미적 감각으로 전통 예능, 다도, 회화, 공예, 도자 등에서 자신들만의 예술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예술은 무사가 ‘전사’라는 자아를 유지하면서 ‘통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세계문화관 일본실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킨 무사의 새로운 면을 바라볼 수 있는 전시를 선보인다. 칼을 든 전사이면서 교양을 갖춘 문화인이자 통치자였던 무사를 아는 일은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검은 옻을 칠하고 금가루를 뿌리는 마키에 기법으로 벗풀과 덩굴무늬를 그려 넣은 가마이다. 벗풀무늬는 지금의 히로시마시에 근거지를 두었던 다이묘 모리(毛利) 가문의 상징이었으므로 이 가문의 여성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마키에 기법으로 가문의 상징과 덩굴무늬를 넣은 가마는 상류 무사 계급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가마 안쪽은 금색 바탕 위에 화려하게 색을 칠한 꽃과 새 그림으로 꾸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여성이 타는 가마 – 온나노리모노
지위가 높은 무사 가문의 여성이 타는 가마를 ‘온나노리모노(女乘物)’라고 한다. 5미터쯤 되는 긴 대를 가마 위쪽 끝에 끼우고 앞뒤에서 사람이 들어 나른다. ‘온나노리모노’는 신분에 따라 구조와 디자인이 정해져 있었다. 신분이 높은 쇼군 가문과 상급 다이묘 가문 여성이 사용하는 ‘온나노리모노’는 겉에 검은 칠을 하고 금가루를 뿌려 무늬를 그리는 마키에(蒔繪) 기법으로 호화롭게 꾸몄으며 안쪽은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나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그린 송죽매 그림, <겐지모노가타리> 그림 등으로 꾸몄다. 특히 무사 계급의 혼례 도구로 만드는 가마는 가문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높을수록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네모 반듯한 쟁반 모양에 3단 서랍을 배치한 화장 도구 받침대 겸 수납함이다. 서랍에는 거울과 빗 등을 넣어 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손잡이가 달린 거울 에카가미를 넣어 두는 상자이다. 에카가미는 고려와 조선의 손잡이 거울과 사용 방법과 모양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아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처음 나타났다. 일본 병경은 처음에는 지름이 10cm 정도인 작은 거울이었으나 에도 시대가 되면서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고 17세기 말에는 지름 24cm 전후의 큰 거울이 나타났다. 거울이 커지면서 거울 뒷면을 꾸미는 문양도 다양해졌는데,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나 거북, 학과 같은 장수와 행복을 상징하는 무늬, 후지산을 비롯한 명소, 가문의 문장 등이 장식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이를 검게 물들이는 오하구로 화장도구이다. 이를 검게 물들이는 것은 에도 시대 귀족과 무가 부인들의 중요한 몸가짐이었다. 미미다라이는 대야 양쪽에 귀 모양 손잡이가 달린 것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를 물들이는 검은 액체를 바를 때 주위가 더러워지지 않게 하려고 쓰는 대야인데 입이나 손을 씻을 때도 썼다. 와다이는 미미다라이의 높이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누키스는 미미다라이의 덮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손톱을 다듬을 때 사용하는 칼 두자루와 그것을 보관하는 상자이다. 상자 안에 공간을 나눌 수 있는 별도의 칸막이가 있어 두 자루의 손톱칼을 분리하여 보관할 수 있다. 다른 혼례도구와 마찬가지로 칠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금가루를 뿌려 고정시키는 ‘마키에’ 기법으로 접시꽃, 모란,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혼례도구
혼례 도구는 여성이 혼인할 때 가져가는 모든 생활 도구를 가리킨다. 놀이 도구, 서랍장, 화장품, 문방구, 의류 수납 도구, 음식기 수납 도구 등이 있다. 원래 헤이안 시대 귀족 사회에서는 대부분 남자가 처가로 가서 혼례를 올렸다. 그러다가 무사가 권력을 잡은 가마쿠라시대부터 강력한 가부장제가 이루어지고 지방 영주 사이에 정치적인 의도로 혼인 관계를 맺는 일이 많아졌다. 이때부터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서 혼례를 올리는 형식으로 바뀌면서 여성이 혼인할 때 모든 생활 도구를 만들어 가지고 가게 되었다. 무가의 혼례 도구는 무가 계급이 권력과 문화 면에서 왕성한 시기를 맞이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제일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전형적인 고쿠타니 아오데 양식의 그릇으로, 전체를 진한 색깔로 칠한 대접이다. 붉은색 물감을 전혀 쓰지 않고 보라, 노랑, 녹색, 파랑 가운데 세 가지 또는 두가지 색을 썼다.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그릇 전체에 색을 칠하는 것이 아오데 양식의 특징이다. 이 작품은 배경에 노란색 국화를 깔고 그 위에 초록색 참외 줄기와 잎, 보라색 열매를 대담한 구도로 표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초록, 노랑, 보라색으로 호랑이와 바위, 대나무를 표현하였으며, 그릇 뒷면에는 운수가 좋기를 바라는 뜻에서 ‘복(福)’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파랑, 노랑, 녹색으로 민들레와 나비를 표현했으며, 그릇 뒷면에는 운수가 좋기를 바라는 뜻에서 ‘복’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소매스케(梁付)’란 하얀 바탕에 코발트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리질의 투명한 잿물을 발라 구워 문양이 남색으로 드러나게 만든 도자기이다. 이 작품에서는 안개에 싸인 커다란 매화나무를 표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이로에(色繪)’는 잿물을 발라 구운 도가지 위에 부드러운 물감으로 무늬를 그려넣고 색을 칠해 낮은 온도에서 한번 더 구운 것이다. 소나무는 평안과 장수, 대나무는 무사, 매화는 생기를 뜻하여 좋은 운수를 기대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접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무사의 자기, 고구타니와 나베시마
일본 자기는 1610년대에 규슈 히젠지방(지금의 사가현과 나가사키현 일부)에서 조선의 기술과 중국의 형식이 결합하여 생겨났다. 1640년대에는 잿물을 발라 높은 온도로 구운 도자 겉면에 물감으로 무늬를 그리고 낮은 온도로 한 번 더 구워 빛깔ㅇ르 내는 채색 기술이 들어왔다. 고구타니(古九穀) 자기는 1640 ~ 50년대에 만들어진 초기 채색 자기이다. 다이쇼지번(지금의 이시카와현)을 다스렸던 마에다 도시하루가 중심이 되어 만들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히젠 지방 아리타요에서 만든 자기라는 견해도 있다. 에도 시대 전기 무가 사회의 시대정신과 문화를 반영하여 자기 무늬가 힘이 넘치고 강렬한 것이 특징이다. 나베시마(鍋島)자기는 사가번을 다스리는 나베시마 가문이 다쿠가와 가문과 다이묘들에게 바치려고 만든 최고급 자기이다. 주로 식기를 만들었는데 지름이 약 15cm, 약 21cm, 약 30cm인 둥근 접시가 주요 품목이다. 남빛 바탕에 빨강, 녹색, 황색을 칠하고 복숭아, 항아리, 책, 물레방아, 토끼 등을 그린 세련된 디자인이 매우 참신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에도 시대와 근대 공예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체제 아래에 있는 다이묘들은 여러 물건을 만드는 직속 장인을 두었다. 직속 장인에는 칼장신구를 만드는 ‘긴코시(金工師)’, 칠고예품을 만드는 ‘마키에시(蒔繪師)’, 도자기를 만드는 ‘야키모노시’ 등이 있었다. 이 장인들은 쇼군 가문과 다이묘 가문에서 필요한 생활 도구들도 만들었다. 에도 막부가 통치권을 교토 조정에 반납하여 무사 시대가 끝난 메이지 시대에는 공예가 경제 발전에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칠보공예품, 금속 공예품, 칠공예품, 도자기 등을 적극적으로 국외에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자 했다. 장인들은 공예가로 변신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내기도 했다. 또한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제실기예원’에 임명되어 고위 관리 대우를 받으며 공예품 만들기에 몰두했다. 제실기예원은 미술공예가를 보호하고 공예품 제작을 장려하기 위해 만든 직위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2022년
-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