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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조각.공예관] 시대별 불상의 변천

고구려 소수림왕(372년)때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래로 국가와 민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불교에서는 원래 스투파라 불리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탑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서방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교에서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이 점자 신앙의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통일신라 이후 선종이 자리잡으면서 탑은 형식적인 면을 보이게 되는 반면에 불상을 모신 금당이 사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중앙박물관 조각.공예관, 불교조각>

삼국시대에는 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황룡사 장륙전같은 금당에 모셔졌던 거대 불상들은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반면에 개인들이 소장했던 작은 금동불상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그 중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반가사유상(국보)이 삼국시대 금동불상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삼국시대 금동불상들은 크기는 작지만 그 만든 수법의 섬세함이나 뛰어난 조형미 등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아고 있으며, 대부분 국립박물관이나 민간이 운영하는 대형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고구려 불상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지역에 존재했던 국가였던 관계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많은 불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중앙박물관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2점의 금동불상을 볼 수 있다.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금동불상은 뒷면에 제작 내력을 적어 놓고 있어 고구려 불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는 불교를 처음으로 도입한 국가로 남북조시대 북위, 동위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고구려 특유의 불상양식이 만들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 국보)은 광배가 남아 있는 높이 16.2 cm의 작은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연가 칠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성경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실제로 발견된 곳은 경남 의령이지만, 평양에 있던 동사에서 만드어 전국에 배포한 천불상 중의 하나이다. 신체의 굴곡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강인한 느낌을 주고 있어 중국 북위 양식을 보이고 있다. 광배에는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 ‘延嘉七年’ 銘 金銅佛 立像’ 경남 의령 발견, 삼국시대 539년, 국보>
<뒤에서 본 모습>

광배 뒷면에 제작 연대와 제작지 등이 기록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539년 고구려 낙양(樂浪, 현재의 평양)에 위치한 동사(東寺)에서 승려 40인이 참여하여 제작.유포하려던 천 점의 불상 가운데 스물 아홉 번째 불상이다. 이 불상은 경남 의령에서 발견되어 불상의 출토지와 제작지가 다른 대표적인 사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금동보살입상(보물)은 높이 15.1 cm의 작은 불상으로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있으며, 온몸을 감싸고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전통적인 보살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좌와 광배는 남아 있지 않지만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작지만 강인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평양 부근 원오리에서 출토된 불상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6세기에 만든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살, 金銅菩薩立像, 삼국시대 6세기, 보물>

평양 근처 절터에서 발견된 흙으로 빚어서 만든 소조불상이다.  서역의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천불상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살, 塑造菩薩立像, 평양 원오리 절터, 삼국시대 6세기>

평양 원오리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흙으로 구워 만든 수백 점의 불.보살상 가운데 하나이다. 틀을 사용하여 뒷면이 평평한 불상을 동일한 형태로 대량 생산하였다. 다불(多佛) 신앙에 기초하여 건축물을 꾸미는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면에는 흰색이나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보살, 金銅菩薩立像, 강원 영월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왼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오른쪽으로 하체를 기울여 몸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보살상이다. 긴 신체와 목걸이 형태는 중국 수나라 보살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두 팔에 걸쳤던 천의는 남아있지 않지만 왼팔의 구멍과 대좌에 남은 끝자락의 구멍으로 미루어 따로 주조하여 결합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구려 불상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중국의 전진(前秦)으로부터 경전과 함께 불상이 전해졌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기원후 4세기에는 고구려에 불상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불상은 대부분 6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불상은 대체로 중국 6세기의 북위(北魏)와 동위(東魏)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하였다. 여기에 단순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고구려인들의 미감이 반영되었다. 고구려 불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로, 고구려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연대와 조성 배경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백제 불상

중국 북조를 통해서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 신라와는 달리 백제는 남조의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서 수도를 한성에서 공주, 부여로 천도를 해서 그런지 불교가 국교와 비슷한 수준으로 크게 융성한 국가였다. 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에는 정림사지를 비롯하여 많은 절터가 있으며, 군수리사지에서 알 수 있듯이 왕궁과 사찰이 같이 있을 정도로 불교국가에 가까웠다.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으며 불교 조각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부처, 金銅佛坐像, 서울 뚝섬 발견, 삼국시대 5세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불상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불상이다. 두 어깨를 덮은 옷 모양과 앞으로 모은 두 손, 대좌 양옆의 사자 표현 등은 4~5세기 중국에서 유행하던 초기 불상의 형태와 비슷하다.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어을 때의 불상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은 백제의 수도 부여 군수리 절터 심초석에서 출토되었다. 무른 재질의 곱돌을 깎아서 만든 12.5cm의 작은 불상이다. 민머리위에 상투모양의 작은 머리가 있으며, 지그시 감은 눈과 얼굴의 미소 등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주고 있다. 4각형의 높은 대좌에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를 표현하고 있다. 몸에 비해 머리와 손을 크게 만드는 등 불교가 전래된 4, 5세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처, 蠟石製佛坐像, 충남 부여 군수리 절터, 삼국시대 6세기, 보물>

부처, 蠟石製 佛 坐像, 충남 부여 군수리 절터 출토, 삼국시대(백제) 6세기, 보물
1936년 부여 군수리 절터의 목탑 자리에서 보살상, 광배 파편, 각종 옥, 토기편과 함께 발굴된 백제 불상이다. 탑을 세우거나 사리기를 넣을 때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는 백제 특유의 잔잔한 미소가 돋보이며 대좌 위로 흘러내린 옷주름선도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부처, 金銅佛立像, 충남 서산 보원사 터, 삼국시대 6세기 중엽>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은 높이 20.7 cm의 금동으로 만든 보살상으로 1967년 서울 도봉구 삼양동에서 발견되었다. 머리에 삼각형 관(冠)을 쓰고 있으며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으며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서 있는 전형적인 관음보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원만해 보이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U자형으로 늘어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으며 다리의 윤곽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관음보살, 金銅觀音菩薩立像, 서울 삼양동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전반, 국보>

관음보살, 金銅觀音菩薩立像, 서울 삼양동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전반, 국보
중앙에 부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보관을 쓰고,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7세기 전반부터 보관에 부처의 모습이 나타나고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어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관음신앙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백제 불상
백제가 불교를 수용한 시기는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으로, 중국 남부에 세워진 왕조 중 하나인 동진(東晉)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 였다. 현재 남아 있는 백제 불상은 대부분 6~7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주로 금동이나 돌로 만든 소형의 불.보살상과 삼존불상이 많다. 이 밖에도 비교적 큰 석불과 마애불도 전한다. 삼국시대 당시의 대외 관계와 불상의 특징을 고려할 때, 백제 불상은 고구려의 영향과 함께 중국 남조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줌으로써 일본의 불교 조각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보주(寶珠,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는 구슬로, 여의주라고도 함)를 든 보살상의 유행과 백제관음이라고 알려진 일본 호류사(法隆寺)의 보살상은 이러한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신라 불상

신라는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황룡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을 건립하는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크게 융성하였다. 황룡사 장륙전에는 신라 3대 보물 중 하나인 거대 불상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의 금동불상은 불교를 고구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까닭에 신라 고유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특히 돌을 깎아서 만든 석불과 마애불을 많이 만들었다.

경기도 양평군 신화리에서 1976년에 발견된 높이 30cm의 원통형의 작은 불상이다. 원통형으로 만들어져 사방에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얼굴은 길고 둥글며, 목은 길고 굵게 표현되어 있으며, 양어깨에 걸쳐진 옷을 입고 있으며, 신체의 굴곡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좌와 광배는 남아 있지 않으나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묵직하고 단순한 원통형 몸체, 간결한 주름 등 중국 수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단순하면서 강인한 느낌을 주는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보이기는 하지만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처, 金銅佛立像, 경기 양평 발견, 삼국시대 7세기 전반, 국보>
<부처, 金銅佛立像,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어린 아이와 같은 미소와 신체 비례가 특징인 불상으로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고 왼쪽 어꺠와 오른쪽 허리에 옷을 걸친 모습(偏袒右肩)이다. 허리는 약간 꺾은 자세이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둥근 물건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이국적인 옷과 자세의 불상은 삼국시대 신라 지역에서 특히 유행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부처, 金銅佛立像, 삼국시대 7세기 전반>

신라불상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은 6세기 전반에 불교를 공인했다. 이에 따라 현존하는 대부분의 신라 불상은 6세기 후반과 7세기에 만들어진 비교적 늦은 시기의 것들이다. 여기에는 금동이나 돌로 만든 부처, 보살, 반가사유상이 포함되어 있다. 신라 불상은 중국 북위(北魏)와 동위(東魏) 불상의 영향을 보이는 예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상은 중국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입체감 있는 불상의 영향이 직.간접으로 보이거나, 신라만의 묵직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특징으로 한다. 7세기에는 특히 화강암을 깍아 만든 비교적 큰 석불과 마애불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훗날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석불 조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불상의 협시보살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단독 불상의 형태로 바뀐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남북조시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5세기말 운강지역에서 미륵불과 삼존상의 협시보살이 형태로 나타나며, 6세기 북제(北齊)에서 크게 성행했다. 한반도에서는 서산 용현리마애삼존여래상(국보)에서 왼쪽 협시불로 나타나고 있다.

<반가사유상, 金銅半跏思惟像, 삼국시대 7세기>

머리에 넝쿨무늬가 표현된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 반가사유상으로 콧수염이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머리 뒤쪽에 꽂이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부처의 머리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가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반가사유상, 金銅半跏思惟像, 경남 양산 발견, 삼국시대 7세기>

반가사유상의 자세를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표현한 상이다. 넝쿨과 꽃모양으로 장식한 보관과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온화한 미소와 살포시 얼굴에 댄 손가락, 유려한 옷주름은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머리 뒤에는 광배 꽂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보물)은 왼다리를 내리고 두 손가락을 뺨에 대고 앉아 생각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과 몸을 가늘고 길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에는 미소가 없으며 옷주름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등 현대미술에서 볼 수 있는 추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보살상에 비해 대좌를 크게 만들어 안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선과 면이 분명하고 잘 다듬어져 조각수법이 세련되었으며, 조형미도 뛰어나다.

<반가사유상, 金銅半跏思惟像, 삼국시대 7세기, 보물>

반가사유상, 金銅 半跏思惟像, 삼국시대 7세기, 보물
얼굴, 몸통, 팔 등 신체를 극도로 가늘고 길게 표현한 반가사유상이다. 머리에는 보관 장식을 연결했던 구멍이 남아 있고, 어깨부터 다리 아래까지 걸친 장신구는 긴 신체를 더욱 강조한다. 연화대좌 아래의 네모난 대좌는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일본 반가사유상에도 많이 남아 있는 대좌 모양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반가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자세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용수사유상(龍樹思惟像)과 같은 여러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彌勒, 미래의 부처)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일본의 아스카(飛鳥), 하쿠호(白鳳)시대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통일신라 금동불상

통일신라는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대표하는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유의 특징을 보여주었다면, 통일신라만이 우리나라 고유한 양식이 많이 형성되었다. 대체로 불상의 제작수법에서 세련되면서도 세밀하고 자연스러운 면이 크게 좋아 졌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불상이나 석탑을 보면 고려시대에 비해서 조형미나 조각수법, 예술적인 표현 등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고구려 불상에서 보여주었던 생동감 넘치고, 힘있는 모습은 다소 줄어들고 후대에 들어서는 정형화된 느낌을 주는 경향도 보인다. 통일신라 때에는 비로자나불이나 약사불이 많이 조성되었고, 지방 호족을 중심으로 철불상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금동약사여래입상(보물)은 높이 29 cm의 작은 금동불상으로 손에 약병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상투모양 머리인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에는 미소가 없어 근엄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귀를 크게 만들었다. 대좌와 광배가 남아 있지 않으며, 발밑에는 대좌에 꽂았던 촉이 남아 있다. 외형이나 얼굴 표정 등이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와 비슷하다.

<약사불, 金銅藥師佛立像, 통일신라 8세기, 보물>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 銅製 奏樂 天人像, 경북 영덕 유금사 출토, 통일신라 8세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은 천상 세계를 아름답게 장엄하는 존재 가운데 하나다. 주로 불상의 광배나 석탑 기단에 돋을 새김으로 장식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보살, 金銅菩薩立像, 통일신라 8세기>
<부처, 金銅佛立像, 통일신라 8세기>
<부처, 金銅佛坐像, 통일신라 8~9세기>
<부처, 金銅佛立像, 통일신라 9세기>
<약사불, 金銅藥師佛立像, 통일신라 8세기>
<약사불, 金銅藥師佛立像, 통일신라 8세기>

약사불(藥師如來)
약사불은 갖가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며 음식과 옷을 제공해 준다고 한다. 보살 신분이었을 떄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한 12가지 큰 소망을 지녔고, 부처가 된 후에는 동쪽에 위치한 유리광세계(琉璃光世界)를 다스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약사신앙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 약사불상은 주로 둥근 약단지를 손에 든 모습의 단독상으로 만들어졌다. 여러 방향에 머무르는 부처를 표현한 사방불(四方佛)에서는 동쪽에 머무르는 부처로 표현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비로자나부처, 金銅毘盧遮那佛立像, 통일신라 8세기 후반>

통일신라 금동불상
통일신라 불상은 삼국시대에 축적된 기술과 중국 당나라의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세련되고 사실적인 모습을 띤다. 이전에 비해 얼굴 표정은 훨씬 섬세해졌고 신체는 알맞은 비례를 보이며 몸을 감싸는 옷자락은 얇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이같은 새로운 표현은 8세기 중엽 석굴암 조각에서 완성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중국의 영향이 약해지면서 통일신라만의 독특한 경향이 부각되었다. 이 시기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갖춤)의 손갖춤을 한 불상, 약사불, 비로자나불을 많이 만들었고, 철불도 만들기 시작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려시대 불상

고려 불상은 통일신라에 비해 세부 표현이나 조각수법, 조형미 등이 크게 떨어져 현재 기준으로도 완성도 높은 불상을 만들지는 못했다. 반면 지방호족의 힘을 과시하거나 민간의 바램을 표현하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석불이나 파주 용미리 석불 등 거대하고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몽골의 침입이후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라마교풍의 불상이나 도교의 영향이 받은 경천사지 석탑같은 불교미술 작품들을 남겨 놓고 있다.

<보살, 金銅菩薩坐像, 고려 14세기>

고려 불상의 전통적인 요소와 티베트-몽골 불상의 이국적 요소가 조화를 이룬 고려 후기 보살상이다. 긴 눈매에 살며시 다문 입술, 단순한 목걸이나 보살상의 자세 등은 전통적인 요소인 반면, 연꽃잎이 위아래로 맞닿은 타원형 대좌, 커다란 원형 귀걸이, 팔에 감긴 천의 형태 등은 새롭게 등장한 형식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보살, 金銅菩薩坐像, 고려 14세기>
<탄생불, 金銅誕生佛, 인천 강화 발견, 고려 후기>

석가모니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오른손으로 하늘을,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말한 장면을 표현한 불상이다. 짧은 치마를 입고 연화대좌 위에 올라서 있으며, 가늘고 긴 신체가 특징인 고려시대 탄생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 金銅佛龕, 고려 14세기>

불감은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으로 고려말부터 조선 초까지 석탑 안에 봉안되었다. 목조 건축을 충실히 재현한 불감의 문 안쪽에는 역사(力士)를 조각했고, 안쪽 벽면에는 부처와 보살을 표현하였다. 불감 바깥에는 부처의 세계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중(八部衆)을 각각 양옆과 뒷면에 새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고려시대 불상
고려시대 불상은 신체의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통일신라 불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불교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불상을 만들었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 불상의 전통을 이어 돌이나 철로된 항마지촉 불상(降魔觸地印,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갖춤)과 비로자나불상을 주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키가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석불도 많이 만들었다. 고려 후기에는 고려전기보다 세련되고 온화한 모습의 불상이 유행하였다. 또한 중국 원나라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은 이국적인 불상도 함께 만들어져 일시나마 유행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선시대 불상

조선시대 불교는 고려와는 달리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지 못했고, 조선초 개혁정책으로 사찰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토지와 노비들을 많이 잃었다. 조선중기까지 많은 사찰들이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폐사하게 되었으며 큰 불사를 일으키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명종때 문정왕후가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고, 그 인력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들이 활약함으로써 조선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큰 불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 다만, 대웅전같은 불전 건축 위주였기 때문에 인상적인 불상을 제작하지는 못하고, 개인적으로 시주해서 만든 작은 불상들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 靑銅佛龕, 경남 고성 출토, 조선 1471년>

불감(佛龕)은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으로, 안에는 불상이나 보살상을 넣고 탑 속에 봉안하였다. 불감은 지붕이나 문 등 실제 건축물을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불감 받침은 분청사기로 제작되었다. 받침 윗면에는 불사의 대좌를 뜻하는 불좌(佛座)라는 글씨가, 측면에는 영락 15년(1417) 9월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석조지장보살좌상(보물)은 높이 33.4cm의 작은 불상으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을 깍아 만든 석조불상으로 몸체는 뚜껍게 도금하였으며 대좌에는 붉은 빛 칠을 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목은 짧으며 다리와 양손을 작게 표현하고 있다. 바위 형태 대좌 뒷면에는 불상의 조성경위, 시주자, 제작연대를 밝혀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정덕 십년’이 새겨진 지장보살, ‘正德十年’ 銘 石造 地藏菩薩 坐像, 조선 1515년, 보물>

조선 전기인 1515년 승려 장인으로 추정되는 화원 ‘절학’과 산인 ‘신일’이 함께 만든 지장보살상입니다. 한 덩어리 돌을 깎아 울퉁불퉁한 암석 모양 대좌 위에 앉은 지장보살을 표현했고 뒷면에 조성기록을 새겼습니다.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은 조선 전기 지장보살상의 특징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는 사찰에 필요한 상당수의 것들을 승려 장인이 만들었는데, 조선 전기부터 승려 장인들이 활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관음보살, 銀製 鍍金 觀音菩薩 坐像, 조선 15세기>
<아미타불, 銀製 鍍金 阿彌陀佛 坐像, 조선 15세기>
<부처와 보살, 金銅佛坐像.金銅菩薩坐像, 경기 남양주 수종사 오층석탑, 조선 1628년>
<부처와 보살, 金銅佛坐像.金銅菩薩坐像, 경기 남양주 수종사 오층석탑, 조선 1628년>

1957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수종사 오층석탑에서 30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는 인조 6년(1628) 정의대왕대비가 발원하고 승려 성인이 제작한 불보살상 23구가 포함되어 있다. 인목대비로 잘 알려진 정의대왕대비는 선조의 계비였으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폐서인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위된 후에도 자주 불사를 행하였는데, 수종사 불상에는 억울하게 죽은 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한 인목대비의 염원이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조선시대 불상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기때문에, 고려시대와 같이 국가주도의 불교 문화는 융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1천년 넘게 우리 민족의 생활 깊숙이 파고든 역사를 바탕으로 그 전통을 면면이 이어왔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나 세조와 같은 군왕을 비롯한 왕실의 후원아래 수준 높은 불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들이 큰 활약을 함에 따라, 전란 이후에는 전쟁에서 훼손된 많은 절과 불상을 새로 짓고 만들었다. 지방에 있던 승려 장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시기 불상은 대부분 조선 초기에 비해 형태가 단순하고 세부묘사가 적은 소박한 모습을 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