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중심지 안동 일대 영남 북부지역은 의외로 불교문화가 발달했던 곳이다. 특히 봉정사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귀족적인 불교문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불교 경전의 판각가 인출이 성행했다. 이런 문화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광흥사에는 훈민정은 해례본을 초기 한글 경전들이 전해오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문경 대승사에서 형성되었던 신겸을 중심으로 한 사불산화파는 불교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은 ‘대웅전관음개금현판’과 중수원문에 따르면 1199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러개의 나무를 접합한 접목조기법(接木造技法)을 만들어졌다. 이국적 풍모, 높게 땋아 올린 보계(상투), 보발의 표현, 조각기법이나 균형미 등 중국 남송 불상 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 12~13세기 불교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고려 1199년경, 안동 봉정사, 보물>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보기 드문 12세기 기년명 보살상으로, 공백으로 남아 있던 12~13세기 불교조각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은 매우 중요한 상이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뺨에는 약간 살집이 있다. 눈은 가늘게 반개하였는데, 수정을 불상 안쪽에서 끼워 눈동자를 표현하였다. 보계(寶髻)는 매우 높다. 착의법은 한 장의 대의를 양어깨에 걸친 통견식이며, 대의 위로 표현된 화려한 목걸이와 영락 장식이 눈길을 끈다. 이는 교토 센뉴지(泉涌寺) 목조관음보살상(1255)과 같은 남송대 보살상의 영향으로 시대와 지역을 대표하는 보살상의 전형이 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53년, 안동 봉정사>
봉정사 관음보살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원문은 1753년에 설봉 사욱 스님이 개금하며 쓴 기록이다. 보살상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적혀 있지 않지만 1363년 윤3월에 개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봉정사 만세루에 걸려 있는 대웅전관음개금현판에는 관음상이 1199년에 만들어졌고 1364년과 1751년에 개금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개금원문과 현판의 개금 시기가 1,2년의 차이가 있으나 현판이 가리키는 보살상이 지금의 봉정사 관음보살좌상이라는 점에 대체로 이견이 없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은 이국적이면서 우아한 얼굴모습, 정교하면서 화려한 보관, 안정된 신체비례, 간결하지만 탄력 넘치는 옷주름의 표현이 특징이다. 조성발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13세기 전반에 조성된 보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종 194점에 이르는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보협인다리니경’과 ‘범서총지집’은 불성 조성시기인 13세기 전반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고려, 안동 보광사, 보물>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뺨에 약간 살이 오른 원만한 상호가 표현되어 있으며, 상의 착의법은 대의를 양어깨에 걸친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다르게 먼저 편삼을 입고 위에 법의를 덧입은 변형된 통견 형식이다. 보관은 조성 당시의 보관이 그대로 전하고 있는데, 여러 장의 얇은 금속판을 덧붙여 제작한 것으로 각각의 판은 연당초문을 투조하고 보관 끝에는 화려한 화염보주 장식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다양한 광물질의 장식을 새겨 넣은 고려시대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범서총지집’은 1150년 평양 광제포에서 선사 사원(思遠)이 교정하여 개판한 간행기록이 있어 서지학·밀교사상·다라니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범서총지집>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 총지사(摠持寺)에서간행한 목판으로 인출한 것으로 당시 목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보협인다라니경>
보광사 관음보살좌상은 2007년 조사 당시 대부분의 복장유물이 도난된 상태였으나 무릎과 머리 안쪽에 있는 일부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수습된 경전, 다라니, 저고리 1점 가운데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 개성 총지사본(摠持寺本)으로 고려 초기 목판 인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다라니 모음짐인 <법서총지집>도 39장 152매가 발견되었다. <범서총지집>은 1150년 평양 광제포에서 처음 찍어낸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범서총지집> 중 가장 빠른 시기의 자료이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初雕本 佛說迦葉赴佛般涅槃經, 보물) 11세기 거란에 침입에 대응하여 판각한 초조대장경에서 인출한 것이다. 해인사 대장경에는 <가섭부불반열반경(迦葉赴佛般涅槃經)>으로 되어 있는 등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분량이 많지 않지만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을 비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물이다.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 고려 11세기, 의성 운람사, 보물>
운람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납입되었던 복장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부처님의 열반을 다룬 경전으로 부처님의 제자인 마하가섭이 입멸하신 부처님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11세기에 판각된 초조대장경에서 인출한 것인데, 권수 표지와 권미 축봉 등이 완전하게 남아 있어 국내에서 발견된 초조본 가운데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3장으로 구성된 짧은 단권경임에도 불구하고 문자 간에 차이를 보여 재조대장경과의 비교 및 서지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영남 북부의 불교문화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북부 지역은 유교문화의 중심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어떤 곳보다 불교문화의 정수가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고려시대의 귀족적인 불교문화가 잘 남아 있어 주목된다. 봉정사와 보광사의 두 목조관음보살좌상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불교조각이다. 불교 교학의 기반이 되는 경전의 판각과 인출 역시 크게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이 대정전(大莊殿)으로 기능하며 대장경을 봉안하였던 사실은 불교 인쇄문화가 이 지역에서 오랜 기간 꽃 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부석사의 <대방광불화엄경> 경판은 고려시대 여러 경전을 집대성하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었고, 광흥사와 봉정사의 <월인석보>와 같은 한글 경전들은 창제 초기 한글의 대중화에 이 지역 사찰이 크게 기여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영남 북부의 불교회화는 다양한 스님들이 활동하며 조성되었는데, 특히 18~19세기 사불산화파로 대표되는 퇴운 신겸 스님과 하은 응상 스님의 화업이 돋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고려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여러 전적들이 남아 있다. 1007년 개경 총지사에서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을 비롯하여 초조대장경의 일부인 <가섭부불반열반경>, 거란본 경전을 수입하여 새긴 부석사 <대방광불화엄경> 등은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재조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불설방발경.불설이수경, 고려, 의성 고운사>
고려시대에 판각된 해인사 재조대장경의 일부로 현재 고운사에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불설방발경>, <불설이수경>, <자재왕보살경>, <불설이구시녀경> 등 5종이 남아 있다. 표지에 압곡이라는 묵사가 남아 있어 군위 압곡사에서 이안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불설방발경>.<불설이수경>은 합본이며,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의 첫 장은 결실되어 필사한 것이다. 영남 지역의 출판 활동과 경전 유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의미가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재조본 자재왕보살경, 고려, 의성 고운사>
<재조본 불설이구시녀경, 고려, 의성 고운사>
부석사 고려목판(보물)은 <화엄경> 정원본 40권, 진본 60권, 주본 80권 등 3종의 대방광불화엄경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정원본(貞元本)은 반야가 번역한 화엄경 40권을 가리키고, 진본(晋本)은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화엄경 60권을, 주본(周本)은 실차난타가 번역한 화엄경 80권을 가리킨다. 13세기 거란에서 불경을 수입하여 다신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대방광불화엄경 경판, 고려 12~13세기, 영주 부석사, 보물>
<대방광불화엄경 경판, 고려 12~13세기, 영주 부석사, 보물>
<대방광불화엄경 경판, 고려 12~13세기, 영주 부석사, 보물>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학의 근본경전으로 전래시기와 한역지에 따라 진본(晉本), 주본(周本), 정원본(貞元本)으로 구분된다. 부석사 고려목판은 <화엄경>의 세 가지 판본을 나무에 새긴 고려시대 경판으로 현재 부석사 장경각에 봉안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통된 <화엄경>이 14~17자인 것에 반해 이 부석사 경판은 34자로 이루어져 있어 거란대장경을 모본 삼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간행기록은 없으나 세 판보의 체제가 비슷하고, 시주자의 인명이 중복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영남 북부의 고려시대 인쇄문화
영남 북부 지역에는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전적들이 다수 남아 있다.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내부에서 발견된 <보협인다라니경>은 1007년에 개경 총지사에서 간행한 경전으로, 경전이 최초 간행된 중국 남송 영파(寧波)지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 영남 북부지역과의 관계를 살벼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의성 운람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내부에서 발견된 <가섭부불반열반경>은 11세기 고려에서 처음 판각한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의 일부이며, 부석사에 남아 있는 <대방광불화엄경> 경판은 고려 후기 거란본 경전을 수입하여 새긴 유일한 경전으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영남 북부 지역 불교 인쇄 문화 전통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훈민정음 목판, 재현품, 안동 광흥사>
<월인석보 권7, 21, 조선 1459년.1542년, 안동 광흥사>
<월인석보 권7, 21, 조선 1459년.1542년, 안동 광흥사>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편한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며 직접 지은 찬불가이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모친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며 발원하여 편잔한 것으로, 두 책을 통해 훈민정음 반포 이후 중세 국어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2013년 광흥사 지장전의 시왕상과 금강역사상의 복장에서 다량의 전적이 발견되었다. 그 중 <월인석보>는 권7, 8, 21 총4책이 발견되었다. 특히 권21의 경우 초간본으로 추정되며 1542년에 제작된 중간본도 함께 확인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보물)은 법화경의 내용을 청색 종이에 금색 글씨로 옮겨 쓴 것으로 권3과 권4가 전해지고 있다. 권3의 끝에 ‘施主權圖南(시주권도남)’이라고 적혀 있다. 고려말에 펴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 고려 14세기, 안동 광흥사, 보물>
감색 종이에 금으로 <묘법연화경>의 내용을 쓴 사경이다. 현재 권3과 권4가 남아 있는데 필체가 유사하여 동일한 인물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 권의 표지 문양이 약간 다르지만 보상화 무늬로 전면을 장식하고 1절에 6행 17자씩 배열한 경문 형식이 고려 사경의 전형을 보여준다. 권3 끝부분에 ‘시주 권도남’이라는 시주질이 확인되는데 ‘권도남’은 1366년에 제작된 <감지금니묘법연화경>에도 등장하고 있어 이를 토대로 광흥사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 역시 고려 말기에 조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보물)이다. 흰종에 먹으로 글씨를 쓴 것으로 전체 7권 중 1,3권이 남아 있다. 각권의 크기와 글씨체가 달라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끝부분에 책을 만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간행연대를 알 수 있다.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 고려 1398년경, 안동 광흥사, 보물>
흰 종이에 먹으로 <묘법연화경>의 내용을 쓴 사경이다. 전체 7권 가운데 권1과 권3이 남아 있다. 절첩본으로 표지에는 감색 종이에 금으로 연꽃무늬와 보상화무늬를 그렸으며, 제목과 권차를 기재하였다. 권3의 앞부분에는 금으로 그린 변상도가 남아 있는데, <묘법연화경>을 설하는 부처님과 그 권속을 오른쪽에, 경전의 내용을 왼쪽에 그렸다. 끝부분에는 장씨 부인 묘우가 돌아가신 부모와 일체중생을 위해 만들었다는 제작 경위와 함께 1398년이라는 정확한 제작 연도를 밝히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광흥사본 한글 경전 <월인석보>의 판각과 유포
영남 북부지역에서 고려시대부터 축적된 목판인쇄에 대한 기술력은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이 지역에는 간경도감의 분소가 설치되었다. 지역의 마을 사람들은 광흥사를 ‘판골(板谷)’이라 부를 정도로 판각 혹은 경판의 보관소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흥사에서는 많은 경전들이 다양하게 판각되었는데, 훈민정음 창제초기의 불서인 <월인석보>가 판각되어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 경판은 광흥사에 남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전후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역에서의 훈민정음 관련 경전의 판각 경험을 바탕으로 <월인석보> 권 1.2는 1568년 풍기 희방사에서, 권 7.8은 1572년 풍기 비로사에서 복각하기도 하였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모운사 지장시왕도, 조선후기, 비단에 채색, 안동 모운사>
모운사 지장시왕도는 높게 마련된 대좌에 앉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지장삼존과 시왕, 판관.사자.옥졸.동자 등의 권속을 배치하였다. 지장보살은 화면 중앙에 크게 그려졌으며, 지장보살이 자리한 대좌 아래에 합장한 모습의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있다. 그 옆으로 시왕은 각각 홀을 들고 있거나 수염을 만지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윝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달리하면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배치된 안정적인 구도가 인상적이며, 유려한 필선을 사용하여 섬세하게 표현한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환성당대선사지안진영, 조선 1766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포월당대선사초민진영, 조선 1766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영월당대선사응진진영, 조선 1766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설봉당대선사사욱진영, 조선 1766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기신론소필삭기, 조선 1769년, 의성 고운사>
고운사의 <기신론소필삭기>는 1769년 봉정사에서 판각된 <기신론소필삭기>를 인출하여 장정한 것이다. 1769년 봉정사의 경전 판각 불사 시 환성 문중의 스님들과 인근 지역 사찰에서 활동했던 스님들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판각본 또한 봉정사 뿐만 아니라 인근 사찰에서도 활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보살계의소 경판, 조선 1695년, 안동 봉정사>
<보살계의소>는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제십>의 하권에 대한 천태 지의(538~597) 스님의 강설을 관정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천태원교의 관점에서 해석한 가장 오래된 주석서이다. 1769년 봉정사에서 진행된 경전 대불사 때 <보살계의소>도 반각되었다. 가흥대장경의 번각본이다. 하단에 가흥대장경의 함차인 ‘하(何)’가 적혀 있고, 봉정사에서 번각되면서 형태가 변형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신론소필삭기 경판, 조선 1769년, 안동 봉정사>
<기신론소필삭기>는 송나라 자선(965~1083) 스님이 <대승기신론소>에 당나라 종밀(780~840) 스님의 주석을 달고, 자신이 기(記)를 써서 필삭한 것이다. 봉정사의 <기신론소필삭기> 경판은 가흥대장경의 번각본이다. 경판은 함월 해원 스님이 1753년에 쓴 <중간기신론필삭기서>와 권1~20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봉정사에는 337장 169판이 전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범망경노사나불설심지법문품보살계본 경판, 조선 1769년, 안동 봉정사>
<범망경노사나불설심지법문품보살계본>은 대승의 보살이 지켜야하는 신행 규범과 실천 덕목 등이 담겨 있다. 이 경판의 말미에 있는 간기를 통해 1769년 안동 봉정사에서 판각한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말 봉정사에서는 화엄대강백 황성 지안 스님의 문중인 월암 지한 스님에 의해 다양한 불사가 이루어졌다. 1769년에는 15종의 불교 경전이 간행되는 대규모 불사가 진행되었는데, <보살계본>의 간기에도 지한 스님이 화주를 맡은 것이 확인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환성 지안 문중과 봉정사 경전 판각
봉정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환성 지안(1664~1729) 스님 문도의 결집과 경판의 판각은 조선 후기 영남 북부 지역 불교계의 중요한 불사였다. 환성 지안 스님은 편양 언기(1581~1644)의 제자로 1725년에 금산사에서 화엄법회를 개설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1,400여 명의 대중이 운집하였을 정도였다. 스님의 법맥을 이은 설송 연조(1676~1750), 호암 체정(1687~1748), 함월 해원, 포월 초민 스님은 봉정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제자인 월암 지한 스님은 1766년 문중 스님들의 진영을 조성하며 위상과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중의 결집은 경판의 판각으로 연결되어싿. 봉정사에서 판각한 경전 중 <기신론소필삭기>, <사분계본여석>, <범망경노사나불설심지법문폼보사례본>은 중국 가흥대장경 일부를 번각한 것이다. 경판의 판각은 문중에서 중요시하는 교학의 됴소들을 대외적을 알릴 수 있는 사업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국 사찰과 강원에 보급되어 조선후기 불교 교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광흥사 아미타극락회상도, 조선 1886년, 비단에 채색, 안동 광흥사
이 그림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과 보살, 권속을 그린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붉은새과 녹색을 주로 채색하여 차분하고 안정적 분위기르 자아내고 있으며, 화면 하단 짙은 청색의 원형 안에 그려진 동자가 주목된다. 그림 하단에 남아 있는 화기를 통해 이 그림이 하은 응상 스님을 비롯한 7명의 스님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봉정사 영산암 십육나한도, 조선 1888년, 비단에 채색, 안동 봉정사>
이 불화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제자인 십육나한을 그린 것으로 총 6폭 중 2쪽이 전시되었다. 각 폭마다 2~3인의 나한을 나누어 그렸는데, 나한 옆에는 붉은 색의 방제 안에 나한의 존명이 각각 적혀져 있다. 나한은 화면에 꼭 찰 정도로 크게 그려졌으며 십육나한뿐 아니라 공양물을 들고 있는 동자들을 비롯해 원수이, 학, 호랑이 등의 다양한 동물이 함께 그려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사찰의 ㅁ여부전에 걸리는 감재사지와 직부사자도 함께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수정사 지장시왕도, 조선 1821년, 비단에 채색, 의성 수정사>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비롯한 시왕과 권속이 함께 그려진 불화이다. 화면 중앙에 크게 표현된 지장보살은 검은 색 두건을 착용하였으며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옆으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자리하고 있다. 지장보살의 옆에 손을 들어 관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시왕이 지장보살의 좌우에 대칭으로 표현되었다. 대좌 앞에는 작은 화분에 하늘색고 분홍색의 연꽃이 활짝 피어 있어 특징적이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용담사 감로도, 조선 1811년, 비단에 채색, 안동 용담사>
용담사 무량전에 봉안되었던 감로도로, 하단 정면이 확대되고 다양화되는 19세기 이후의 감로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화면 양 옆으로 상단 영역까지도 하단의 장면이 확장되고 있으며 전각으로 구획을 구분하는 등 비슷한 시기의 감로도와 달리 도상을 변용한 점이 주목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단의 장면마다 방제를 적어 내용을 설명하였다. 하단의 한량과 기녀, 연회 집단, 예인 등과 같은 인물이 표현되어 풍속화적인 요소 또한 살펴볼 수 있다. 하단의 화기는 절취되어 ‘가경 16년(1811)’, ‘양공 토운당’ 등 일부만 확인되지만 문경 사불산 대승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사불산화파의 퇴운 신겸 스님이 감로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삼화상진영, 조선 1782년, 비단에 채색, 의성 대곡사>
18세기 대곡사의 삼화상(三和尙) 추선(追善)
대곡사의 삼화상 진영은 고려말 ~ 조선초를 대표하는 지공, 나옹, 무학 스님을 한 폭에 그린 것이다. 지공 스님과 나옹 스님은 당대부터 부처의 화신 혹은 생불로 불렸으며, 무학 스님은 이성계의 왕사이자 나옹 스님의 적통이었다. 세 스님의 문도는 조선 전기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조선 후기에도 이어져, 지공, 나옹, 무학 스님에 대한 추앙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세 스님의 진영이 여러 사찰에 봉안되었는데 1782년에 조성된 대곡사 삼화상 진영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대표적인 의승장으로 추앙받은 청허당 휴정 스님과 사명당 유정 스님으 진영도 같은 해 조성되었는데, 이는 세 스님에 대한 예경과 함께 의승장을 추가적으로 봉안하여 광범위한 의미의 삼화상 진영을 봉안한 것이다. <동사열전>에는 ‘금강산 백화암에 수충각을 세우매 지공.나옹.무학 세 화상과 왼편으로 서산, 오른편으로 사명의 다섯 분 영정을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진영 배치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봉황사 전패, 조선 1692 ~ 1694 추정, 안동 봉황사>
전패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패로, 패신 중앙 패액에는 각각 주상, 왕비 세자 삼전ㅇ르 축원하는 문구가 남아 있다. 주상 패와 왕비 패는 구름형이며, 세자 패는 화염형이다. 그러나 단순한 선각으로 세부 표현을 꾀하며 세 점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어우러지고 있다. 주상 패의 묵서를 통해 탁린 스님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응, 탁밀 스님이 봉황사 삼세불좌상을 조성하였고 제작인 탁린 스님이 불사의 대좌와 함께 전패를 조성하였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모운사 제석천도,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안동 모운사>
모운사 제석천도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과 일부 권속을 그린 것이다. 모운사 제석천도 화면 중앙에는 정면을 향해 선 제석천이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제석천 옆으로는 여러 권소이 그려졌는데, 특히 화면 왼쪽 상단에 자리한 권속이 들고 있는 부채의 표현이 주목된다. 부채 안은 흰색 원 안에 먹선으로 수미산을 표현한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이 시기 조성되는 대부분의 제석천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반해,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점도 독특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운림사 산신도, 조선 1872년, 삼베에 채색, 의성 운림사>
운림사 산신도는 1827년 법준 스님이 조성한 불화이다. 화면에서 산신은 검은 눈썹에 눈을 날카롭게 표현하였다. 머리에는 푸른색 관모를 쓰고 붉은 천의를 두르고 있으며, 왼손에 긴 칼을 메고 오른손에는 흰 깃털로 된 익선을 들고 호랑이를 타고 있다. 산신의 앞, 뒤로 암벽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깊은 산 속에 산신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운람사 산신도는 신겸 스님이 그린 지보암 산신도의 산신의 얼굴과 고운사 백련암 신왕도의 검의 모양이 닮아 있어 사불산 화파의 신겸 스님 영향을 받아 조성한 불화로 보인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광흥사 동종(보물)은 1583년에 만들어진 종으로 한국 범종을 전통적인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높이 60cm 정도의 작은 종이지만 매끄러운 곡선과 사실적인 용의 표현 등 조각수법이 우수하다. 세부 문양은 단순하지만 4면에 표현된 보살입상이 돋보인다. 기록된 명문에 따르면 인근 수암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사장과 승장의 협업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광흥사 동종, 조선 1583년, 안동 광흥사, 보물>
광흥사 동종은 크기는 작지만 종신의 매끄러운 곡선과 사실적인 용의 표현 등에서 완성도를 보여준다. 종신에 점으로 새겨진 주종기가 남아 있어, 1583년 하가산 수암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종의 조성은 주장 김자산과 17세기 조각승인 원오 스님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사장과 승장의 협업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사불산화파의 활동
사불산화파는 조선 후기 문경 사불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화승 집단이다. 이들은 영남 북부를 기반으로 활동하였으며, 사불산화파를 대효하는 수화승인 퇴운 신겸 스님의 활동기(18세기 후반 ~ 19세기 전반)에 이르면 이 시기를 선도하는 화승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사불산화파의 화맥은 신겸 스님에서 의운 자우 스님, 하은 응상 스님으로 계승되었으며, 전통에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였다. 신겸 스님은 활동 후반기인 1820년부터 고운사의 산내암자인 백련암의 조실로 주석하면서 고운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의 불화의 조성에 참여하였다. 하은 응상 스님은 19세기 후반 사불산파를 이끌던 수화승으로,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변화르 시도하였고 새로운 양식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궤안, 대한제국 1904년, 의성 고운사>
궤안은 어첩이나 전패를 안치하였던 것이다. 어첩은 기로소에 보관하던 임금의 입사첩으로 생년월일, 입사 연월일, 어명, 아호를 적은 것이다. 등받이 윗부분 양끝에는 용의 머리가 조각되었으며, 팔걸이 끝부분에는 봉화으이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이 두 동물은 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밀이기도 하다. 등받이에는 구름무늬와 함께 중앙의 안상무늬 안헤 ‘수(壽)’자가 적혀 있어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연수전의 성격를 잘 드러낸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연수전 사진>
기로소의 의미와 연수전의 건립 과정
기로소(耆老所)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조선시대 설치한 관서이다. 문신으로서 2품 이상의 벼슬을 가지고 70세 이상인 신료가 들어갈 수 있었다. 장수는 덕의 상징이었고,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관리의 숫자도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기로소에 입소한느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본래 신료들을 위한 관서였기 때문에 국왕은 양로의 은혜를 베풀어야 할 주체였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기로소에 입소한 고사가 있었기 때문에 국왕 역시 입소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실제 기로소에 입소한 국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뿐이었다. 국왕이 기로소에 입소하는 경우 이를 긴며하기 위하여 진연을 열었다. 행사 이후 진연의 내용은 의궤로 정리되고 계첩을 제작하였다.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는 진ㅇㄴ은 1902년 8월까지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본래 영조의 어첩봉안각 외에 별도의 전각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기로소의 허가가 나지 않아 어첩봉안각을 수리하영 축리전을 중건하였다. 1904년에 최종적으로 연수전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판을 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문서함, 대한제국 1904년, 의성 고운사>
문서함은 문서 등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자로 뚜껑과 몸체가 연결된 직육면체 형태이다. 전면 중앙 원형 금속 판에는 넝쿨 문양과 수(壽)자문 두 개가 새겨져 있다. 뻗침대의 끝부분에는 팔각형 바탕에 팔괘가 새겨졌다. 전체적으로 주칠이 되어 있으며, 기로소와 관련된 무서들을 보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사경회첩, 조선 1744년, 비단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기사경회첩은 영조가 51세 되는 1744년 9월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서문, 어제, 선온시 그해의 기로신(耆老臣)의 초상화, 행사도, 화원 명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로소 의례 과정을 묘사한 행사도 중 영수각친림도는 영조가 9월9일 어첩을 보관하는 영수각에 방문하여 기로소 의식을 행하는 장면이다. 오른편의 영수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사각형 공간에 기둥만 세워 계자난간이 둘려져 있으며, 가운데에 방 1칸 정도의 공간을 둔 특이한 형태의 건축이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고운사의 연수전에서도 보인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임인진연도병, 대한제국 1902년, 비단에 채색, 국립국악원>
<임인진연의궤, 대한제국 1902년, 국립고궁박물관>
<임인진연의궤>는 1902년 51세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열린 진연의 전 과정을 상세히 적은 궁중 기록물이다. 총 4권으로 의식 절차, 공연 종목, 기물, 복식, 음식, 인언과 비용 등 분야별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진연의 준비부터 끝날 때까지의 과정과 반차도를 함께 수록하여 의례에 참석한 대신들의 자리 및 기물, 악기 등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이 의궤를 바탕으로 진연 장면을 10폭의 병풍에 채색하여 그린 것이 임인진연도병이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선생안, 조선 1803년, 의성 고운사>
<선생안, 조선 1803년, 의성 고운사>
<선생안>과 <금옥당상록>은 금옥청에 종사한 스님들의 명단을 적은 문서들이다. 금옥청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어첩봉안가을 관리하던 고운사의 건물 혹은 기관으로 추정된다. 책에는 통정대부, 가선대부, 승통, 총섭 등의 직책 아래 금옥청에 종사한 스님의 법명이 적혀 있다. 특히 <선생안>의 뒷부분에는 기로총섭, 기로소총섭 등의 직책이 보여 1902년 이전 어첩봉안각의 설치와 사찰 내의 봉안각 운영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서 선생안(耆老所 先生案)
선생안 조선시대 각 기관의 명단을 기록한 책으로 안책(案冊) 또는 제명록이라고도 한다. 고운사에 남아 있는 기로소 선생안은 두 권으로 조선 태조부터 고종 가복까지 기로소에 입소한 605명이 명단을 적은 문서 1책과 고종이 기로소를 입소할 시기의 기로신 27명을 등재한 선생안 1책이다. 기로신 명단에는 연수전 현판을 쓴 김성근과 상량문을 지은 윤용선 등이 기록되어 있어 연수전의 건립에 기로신들이 관여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운사에는 고운사 스님들의 명단이 적힌 선생안도 한권 남아 있는데, 고운사의 금옥청(金玉廳)에 종사한 스님들의 명단을 적은 문서이다. 금옥청의 성격은 앍 수 없으나 당시 고운사에 설치되었던 어첩봉안가을 관리하는 기능을 하는 건물 혹은 기관으로 추정된다. 책의 뒷부분에는 기로총섭, 기로소총섭 등의 직책이 보여 1902년 이전 어첩봉안각의 설치와 운영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소 선생안,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기로소 선생안,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경상북도의성군등운사고운사 축리전원당중건축원문, 대한제국 1903년, 의성 고운사>
1903년 고종의 원당인 축리전을 수리하면서 작성한 축원문이다. 왕실에서 의성군을 통해 내탕금 1만냥을 지급하여 충당하도록 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연수전호절목추후마연, 대한제국 1904년, 의성 고운사>
기로소에서 고운사로 보낸 문서이다. 축리전을 연수전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연수전 운영의 세칙, 각 직책의 업무, 선발 원칙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의성군고운사신건축리전수호장정,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1902년 5월에 작성된 기로소문서에는 고운사에서 ‘스님들을 소집하여 영수각을 별도로 지어 어첩을 받들고, 앞으로 기로소 봉안각의 초석을 고치고 기둥을 바꾸고자 도모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문서에 의거하여 기로소에서 축리전을 수호하는 고운사 스님들의 직함과 업무를 적은 책이다.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기로소에 두고 1부는 고운사로 보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소 문서, 대한제국, 의성 고운사
기로소 문서는 연수전 건립에 관련된 문서이다. 1902년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하게 되자 고운사에서는 영조의 선례를 들며 기로소에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운사는 기로소 봉안각을 중수하고 영수각을 별도로 지으려고 했으나 기로소의 반대로 인해 축전으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릭 축리전의 명칭을 영수전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연수전으로 결정되었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소 문서>
영수각을 별도로 만들어 어첩을 봉안하고, 기로소 봉안각의 기둥 설치 및 초석을 고칠 것에 대하여 기로소의 허락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소 문서>
축리전 원당 건립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소 문서>
축리전 공사가 끝났으나 전패 봉안을 못하고 있음, 이에 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소 문서>
축리전의 이름을 영수전으로 바꾸고자 기로소에 허락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기로소 문서>
연수전 수호답의 도조를 남부하지 않는 이산운의 처벌을 요청하는 문서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연수전 상량문 현판, 대한제국 1903년, 의성 고운사>
연수전을 중수하며 적은 상량문을 목판에 옮긴 것이다. 매행 14~19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34행이다. 글자는 해서체로 일부 먹흔이 남아 있다. 현판의 내용인 상량문은 조선 말기의 문신 윤용선이 고종의 명을 받아 작성하였다. 연수전 상량문의 앞뒤가 잘려나가고 일부 내용만 적혀 있어 정확한 내용 파악이 어렵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연수전 기문 현판, 대한제국 1902년, 의성 고운사>
연수전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현판이다. 현판에는 황태자의 상소로 시작된 고종의 기로소 입소 과정과 고종의 수복을 축원하는 글, 고운사에 연수전이 자리하게 된 과정을 기록하였다. 기문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종이 기로소에 입소한 1902년 7월이며, 찬자는 안철용이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연수전, 왕실의 장수를 축원하다
고운사에는 왕실 축원을 목적으로 연수전(延壽殿)이 남아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1744년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고 기로소에 입소한 역대 왕의 이름을 적은 어첩을 봉안하기 위한 어첩봉안각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경내에 왕의 어첩이 봉안되어 있는 만큼 왕실과 관청의 보호와 지원 속에 사세가 확장되었다. 1902년에는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며 이 건물을 중수하고 기로소로부터 연수전이라는 이름을 받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연수전의 형태는 경복궁 인근에 위치한 기로소 영수각 건물(현재 소실)을 모본으로 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연수전 내.외부에는 왕의 위상과 무병장수, 부귀영화의 의미를 담은 다양한 벽화로 장엄하여 왕실을 축원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왕실의 어첩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건립 과정과 운영 현황이 기록된 자료들이 다양하게 전한다.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 안내문, 불교중앙박물관, 2023년
- ‘보물 광흥사 동종,’,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보물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권1,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보물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3,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보물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보물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보물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 ‘보물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