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중앙박물관특별전, 외규장각과 의궤] 예(禮)로써 구현하는 바른정치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 주요행사를 훗날 참고하기 위해 남기는 기록문서를 말한다.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 임시 기구인 도감(都監)을 두어 행사를 주관하게 하고 행사를 마친 후 의궤청을 설치하여 의궤의 편찬을 맏게 하였다. 국가 행사에 필요한 절차를 규정한 것이 <국조오례의>라면 의궤는 실행했던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으로 실무적인 용도와 함께 후대에 모범을 보이는 중요한 정치 행위라 할 수 있다.

<왕세자 책례(冊禮) 장면을 그린 병풍, 1784년, 비단에 색, 서울대학교박물관>

왕세자를 책봉하는 의례 중 국왕이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는 ‘책왕세자의(冊王世子儀)’ 장면을 묘사한 병풍 그림입니다. 1784년 문효세자의 책례 때 그린 것입니다. 이때의 의례를 기준으로 삼아 1812년 효 명세자를 책봉하였기 때문에, 효명세자의 책례 장면 또한 이 병풍 그림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림 속 장소는 창덕궁 인정전입니다. 전각 중앙에 왕이 앉았던 어좌가 보이고, 그 앞으로 예복을 갖추어 입은 신하들이 엎드려 있습니다. 어좌 앞 탁자에는 왕세자에게 줄 교명과 죽책, 옥인을 올려 놓았습니다. 전각 앞뜰에는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서서 왕세자의 선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왕조의 정통을 세우다.
바른 예법으로 나라를 이끌기 위해서는 신하와 백성들이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권위가 있으면 위상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실의 위상을 정립하고 강화하기 위한 의례가 각별히 중요했습니다. 특히 왕에게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는 사회적 인정, 즉 정통성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정통성에서 나라와 백성을 이끌 자격과 명분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왕과 왕실의 위상과 정통성은 의례를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확인되었습니다. 왕조의 정당한 후계자를 공표하거나, 국왕에게 위엄을 부여하거나, 왕실의 지위를 격상하는 의례입니다. 바른 예법에 따라 엄숙하면서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왕과 왕실의 특별한 존재감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책례(冊禮)는 조선시대 상왕, 대비.왕비.왕세자, 왕세자빈 등을 책봉하던 국가의례를 말한다. 책례는국왕이 종친과 신하들을 모아 놓고 책립을 선포하고 그에 따른 중요한 의물들인 교명.교책.교보를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책례의 절차를 통해 국왕과 왕세자를 비롯한 당사자들, 신하들의 사회적 관계와 의미를 숙고하게 한다.

<효명세자가 왕세자 책봉 때 받은 교명(敎命), 1812년, 비단, 국립고궁박물관>

왕세자 책봉 때 수여하는 교명은 국왕에 왕세자에게 내리는 훈유와 당부를 적은 것입니다. 왕조의 미래를 책임질 왕세자의 지위가 존귀하면서도 막중함을 강조하고, 본분과 책임을 다하여 훌륭한 왕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효명세자의 교명의 책례도감의 하부 기구인 일방(一房)에서 만들었습니다. 홍색.황색.남색.백색.흑색의 오색 비단에 먹으로 내용을 쓴 후 옥으로 만든 축을 대어 만 두루마리 형태입니다. 교명이 시작하는 홍색 비단에 오르내리는 용 두마리와 ‘교명’이라는 글자를 넣었습니다. 비단을 짤 때 무늬로 넣어 직조한 것입니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중 <일방의궤>에 교명과 교명함의 크기, 재질 및 형태를 그린 도설(圖說)이 실려 있습니다. 실제 유물과 비교해 보면 동일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교명함>

<효명세자가 왕세자 책봉 때 받은 옥인, 1812년, 옥, 국립고궁박물관>

왕세자 책봉의 핵심은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보는 앞에서 왕이 세자에게 죽책과 교명, 그리고 옥으로 만든 도장 옥인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옥인은 왕세자의 상징으로서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의례용 도장입니다. 효명세자의 옥인은 책레도감의 하부 기구인 이방(二房)에서 만들었습니다. 정사각형의 보신 위에 머리를 치켜 든 거북이 안자 있는 형태의 보뉴를 일체형으로 조각하고 붉은 인수를 달았습니다. 바닥면에는 ‘왕세자인’이라고 새겼습니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에 옥인의 형태를 그린 도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실제 옥인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효명세자가 왕세자 책봉 때 받은 죽책, 대나무.금속, 국립고궁박물관>

효명세자가 책봉 때 받은 죽책으로 붉은 대나무 조각 36개를 6개씩 연결하여 만들었습니다. 죽책은 장차 왕위를 계승할 사람임을 선포하는 일종의 임명장입니다. 앞면에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내용의 왕명을 새긴 후 금니로 글자를 채우고, 위.아래를 넝쿨무늬로 장식한 변철로 마무리하였습니다. 효명세자의 죽책은 책례도감 소속 일방에서 만들었습니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중 <일방의궤>에 죽책의 크기와 재질, 죽책의 형태를 그린 도설은 물론 죽책에 새긴 왕명의 내용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효명사제책례도감의궤, 1812년, 어람용,>

제23대 왕 순조의 적장사 효명세자(180~1830)를 왕세자로 책봉한 과정을 담은 의궤입니다. 책봉의례를 거행하기까지의 논의부터 행사 준비 과정, 개별 의례의 내용까지 상세하게 수록하였습니다. 왕세자 책례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효명세자는 겨우 네 살이었기 때문에 장중한 의례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염려되어 의례 절차를 두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먼저 인정전에서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는 ‘책왕세자의’를 거행하고, 이어서 세자를 모시는 신하들이 희정당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왕세자에게 교명, 죽책, 옥인을 전달하는 ‘왕세자자내수책의’를 올린 것입니다. 장차 보위를 이을 후계자를 정하는 중요한 의례인 만큼 실수 없이 예법에 맞게 잘 치를 수 있도록 참여자들의 동선까지도 일일이 정리해 놓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국본(國本)을 정하다
왕세자는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될 후계자입니다. ‘나라의 근본’이라는 의미로 ‘국본’이라고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세자를 정하는 책례는 왕실을 이어가고 나라를 안정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왕세자 책례는 공식적인 왕위 후계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입니다. 궁궐 한 가운데 정전에서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하였습니다. 이때 왕세자는 문무백관 앞에서 왕으로부터 죽책, 교 명, 옥인을 받았습니다. 정통성 있는 왕위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의물(儀物)입니다. 이제 왕세자는 여러 왕자 중의 한 사람에서 단 한 명의 정통 후계자로 지위가 격상하게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어진도사 도감의궤는 왕의 초상화를 그리고 봉안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에 적힌 기록을 통해 화원의 선발과정과 그리는 과정의 주요 절차와 논의 사항 등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숙종어용도사 도감의궤, 1713년, 어람용>

1713년 숙종의 어진 도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재위 중인 국왕의 얼굴을 화원이 직접 보고 그린 어진 관련 의궤 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입니다. 앞서 1695년에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그려 강화도 장녕전에 봉안하게 하였는데, 이 어진이 숙종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하여 다시 그리게 된 것입니다. 이때 숙종은 신하들에게 자신의 어진을 대할 때 사배례를 올리도록 명하였습니다. 이에 돌아가신 선왕의 어진에 올리는 사배례를 살아있는 왕의 어진에도 적용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반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국왕의 어진 또한 실제 국왕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며 사배례를 관철시켰습니다. 그 구체적인 의례의 내용이 의궤 속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의 초상화, 1725년(영조1), 비단에 채색, 경기도박물관, 보물>

사대부 출신 화가 조영석(1686~1761)이 자신의 맏형 조영복의 54세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1724년(경종 4) 조영복이 충청도 영춘(단양)으로 귀양을 가자 그를 찾아가 초본을 그렸고, 조영복이 귀양에서 풀려난 이듬해에 채색한 것입니다. 1713년(숙종 39) 도사(圖寫)한 숙종의 어진을 1748년(영조 24)에 다시 그릴 때, 영조가 이 그림이 실제 조영복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다고 칭찬하면서 조영석에게 숙종 어진을 맡아 그려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영석은 기예(技藝)로 왕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의 예가 아니라며 거부하였습니다. 영조는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따로 책임을 묻지는 않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어진(御眞), 위엄을 더하다
어진은 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어진을 그릴 때는 도사도감이나 모사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도사’는 왕의 모습을 직접 그리는 것이고, ‘모사’는 이전의 어진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입니다. 도감이 설치되면 도화서 화원 중 실려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작업을 감독하에 했습니다. 어진이 완성되면 대신들이 모여 살펴보는 봉심(奉審) 의례를 행하였는데, 이떄 실제 왕을 대하는 것 같은 예를 갖추었습니다.문무백관이 예복을 입고 어진을 모신 건물 앞에서 3번 절을 하는 사배례를 올린 것입니다. 어진에 대한 의례의 격을 최고 수준으로 높임으로써 어진의 주인공인 국왕의 위상을 강화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단종장릉봉릉도감의궤, 1699년, 어람용>

1698년부터 1699년까지 노산대군을 ‘단종’으로 복위하면서 그의 무덤을 왕릉으로 높여 다시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처음에 단종의 무덤은 제대로 된 봉분도 없었습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지역 향리였던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거두어 가매장하였던 것입니다. 1516년에서 가매장한 자리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갖추어 ‘장릉(莊陵)’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단종의 무덤을 왕릉으로 봉하기 위한 논의 과정과 왕릉으로 고쳐 조성한 공사의 구체적 내용이 의궤에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왕으로 바뀐 무덤 주인의 지위에 맞추어 왕릉으로서의 격식과 위상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잘 살필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때 올린 시호 금보, 1698년>

단종을 다시 왕으로, 그의 부인을 왕비로 추숭하면서 만든 금보입니다. 돌아가신 두 사람의 덕을 칭송하는 호칭인 시호를 짓고, 이것을 도장으로 만든 후 금으로 도금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됨됨이나 사회적 지위가 명칭에서 드러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왕과 왕비가 돌아가시면 살아 있을 때의 훌륭한 업적을 잘 표현하는 한자(漢子)를 선택하여 시호를 지었습니다. 단종의 시호는 ‘순정안장경순 돈효대왕’, 왕비 정순왕후의 시호는 ‘단량재경정순왕후’입니다. 두 시호 모두 어질고 예법을 잘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동학지, 20세기>

단종과 관련된 사찰인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의 문헌자료를 모은 것입니다. 동학사는 세조가 직접 행차하여 단종과 단종을 모신 여러 신하들을 위해 제사를 올린 사찰입니다. 지금도 동학사 동쪽에 숙모전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여기에 단종과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상권에 단종 연간의 중요 사실들을 모은 <단종대왕실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단종과 관련된 인물 및 유적들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서 단종이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배당하던 일과 조선후기의 단종 복위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왕실을 높이다.
왕실 조상들의 지위를 높여주는 추숭(追崇, 추존追尊) 의례는 왕실 전반의 위상을 높여 위엄을 더할 뿐만 아니라 그 후손인 현재 왕의 권위 또한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조선 후기에는 예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왕통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제6대왕 단종입니다. 12세에 왕이 된 단종은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준 후, 역모에 휘말려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후 숙종은 단종을 다시 왕으로 추숭하고, 초라했던 그의 무덤을 왕릉으로 봉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의궤 속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분무녹훈도감의궤, 1729년, 어람용>

1728년 3월에 발생한 무신란(이인좌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이들을 분무공신으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난의 평정을 총지휘한 오명항 등정공신 15명과 8,776명에 달하는 원종공신을 선정하고, 이들을 포상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예로써 우대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더불어 난을 진압하는 동안 각지에서 중앙에 올린 보고문서, 난의 주동자들을 잡아들인 후 심문한 내용, 영조가 역모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비망기까지 다양한 성격의 자료를 총망라하여 무신난을 둘러싼 영조 즉위 초반의 정국을 자세하게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신하와 백성을 향하다
조선의 왕이 권위를 강화하고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것은 결국 질서를 잡어서 나라를 잘 이끌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법으로 위엄을 갖춘 왕이 다음으로 할 일은 신하와 백성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조성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른 예를 실천함으로써 이루고자 한 바른 정치의 모습입니다. 그 첫걸음은 신하를 예로써 대하고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자세를 내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의에 기반을 둔 군신관계를 정립하고,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려는 애민의 자세입니다. 왕의 권위는 내세운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신하와 백성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오명항 분무공신화상, 조선후기, 비단에 색, 경기도박물관>

1728년 3월에 발생한 무신란(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에 녹훈되고 ‘해은부원군’이라는 작호를 받은 오명항의 공신화상을 베껴 그린 이모본입니다. 오명항은 사로도순무사에 임명되어 무신란 진압을 총지휘하였으며, 한 달도 안 되어 난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움으로써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공신에 책봉된 인물에게는 품계를 올려주고 노비와 재물을 하사하였으며, 그 후손들도 관직에 임용하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습니다. 왕명으로 초상화를 그려서 내려주는 것도 그러한 은전 중 하나입니다. 나라에 공이 있는 충신의 모습을 후세에 대대로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회맹축 목판, 조선, 국립광주박물관>

1404년 태종이 건국 초기의 삼공신(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과 함꼐 회맹할 때 작성한 회맹문을 판각한 목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공신으로 책봉되면 국왕과 역대 공신 및 그 적장자손들이 모여 신의와 충성을 맹서하는 제례인 회맹제를 열었습니다. 회맹제가 끝나면 당시의 제문과 참석 대상 명단으로 구성된 회맹축을 제작해서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떄 공신들에게 나누어 준 회맹축은 목판에 새긴 후 인출하는 방식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이삼 분무공신교서, 1728년, 비단에 필사, 한국유교문화진흥원>

1728년 3월에 발생한 무신난(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 2등에 녹훈되고 ‘함은군’에 봉해진 이삼의 공신교서입니다. 무신난을 평정하는데 이삼이 세운 공로를 치하한 후 공신화상을 그려주고 본인과 가족들으리 품계를 2등급 올려주며, 노비와 말, 은자 등을 내린다는 내용의 왕명을 적은 것입니다. 공신으로 책봉되었을 때 국가로부터 받는 은전의 내역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서 국가가 공신을 예로써 우대하는 모습을 잘 살필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충신을 기리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에게 공신의 칭호와 다양한 특혜를 내렸습니다. 이것을 ‘공신녹훈(功臣錄勳)’이라고 합니다.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은 정공신(正功臣)으로, 작은 공을 세운 사람들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삼았습니다. 정공신은 소수였지만, 원종공신은 수백명, 수천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반백성이나 노비도 포함되었습니다. 공신녹훈이 끝나면 국왕과 공신들이 모여 회맹제(會盟祭)를 열었습니다.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서로 의리를 지키고 대대로 나라에 충성하자고 맹서하는 의식입니다. 공신녹훈과 회맹제는 군신이 하나되는 의례입니다. 신하는 충심으로 왕을 보필하고, 왕은 충신을 예우함으로써 신의를 보이는 것입니다. 나아가 왕과 관료 및 사대부,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가 함께 나라를 지키고 왕조를 이어간다는 인식을 확인하는 의례이기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친경의궤, 1739년, 어람용>

1739년 1월 28일 영조가 직접 참여한 친경 의례에 대한 의궤입니다. 이때 영조는 도성 동쪽 밖 선농단에서 농경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인근의 동적전으로 가서 쟁기질을 했습니다. 이 의례에는 인근 고을에서 선발된 100명이 농민과 75세 이상의 노인 40명 등 일반 백성들도 참여 했습니다. 의궤 앞부분에 친경의례가 열린 행사장의 배치도인 틴경도가 있습니다. 적전이 내려다보이는 관경대 바로 아래 중앙에 왕이 쟁기질을 할 자리인 ‘친경위’가 크게 써 있고, 그 옆으로 대신과 종친 및 여러 신하들의 자리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는 쟁기질을 몇번씩 해야 하는지 횟수도 표기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국조오례의, 조선,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국조오례의, 조선,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시대의 국가 의례는 5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국가 제사는 길례(吉禮), 국가 및 왕실의 경사는 가례(嘉禮),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빈례(賓禮), 군사와 관련된 군례(軍禮), 왕실의 장례와 관련된 흉례(凶禮)입니다. 이것을 ‘오례(五禮)’라고 하며, 오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한 책이 <국조오례의>입니다. <국조오례의>에는 농산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 선종제에 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림 자료와 관련 설명을 모은 <서례(序例)>에서는 <풍운.뇌우.산천.성황단> 그림에 붙여 선농단이 도성 동쪽 교외에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권2 길례에서는 국왕이 제사를 올릴 때의 절차인 ‘향선농의’와 국왕 대신 신하가 제사를 올릴 때의 절차인 ‘향선농섭사의’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왕이 직접 참여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던 친경의궤에서 국왕 거동 관련 의식만 수록한 것과 다른 모습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만백성을 돌보다
유교의 성인 맹자가 “항산(恒産, 안정적인 먹거리)이 없으면 항심(恒心, 바른마음)도 없다.”라고 했듯이 의례나 예법도 백성의 삶이 편안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예의 실천이 백성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습니다. 이 의례를 ‘친경(親耕)’이라고 합니다.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 경칩이 지나면 길을 날을 택하여 도성 동쪽 밖 선농단에서 농경의 신에게 제사를 올립니다. 그후 근처에 마련한 밭 적전(籍田)에서 소가 끄는 쟁기를 5번 밀어 땅을 갈았습니다. 이 행사에는 왕세자와 여러 신하들, 그리고 평범한 농부들도 참여했습니다. 국왕이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과 고락을 같이 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선농단이 표시된 한양지도, 김정호, 1850년대, 종이에 색>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보다 앞서 만든 전국지도 <동여도> 중의 한양지도입니다. 중앙을 둥그렇게 에워싼 성곽의 오른쪽 밖으로 ‘선농단’이 보입니다. 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입니다. 선농단은 농경의 신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입니다. 국왕이 직접 농사 시범을 보이는 친경의례의 시작이 선농단에서 올리는 제사였습니다. 제사를 마친 후 왕은 선농단 오른쪽 ‘동적전’이라고 표시된 곳으로 갔습니다. ‘적전’은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땅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왕은 5번 쟁기를 밀어 밭을 가는 시범을 보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벼베기, 볏단쌓기, 경직도 중>

<도리깨질, 벼 까부르기, 경직도 중>

농사짓기의 수고로움을 그린 경직도, 조선후기, 종이에 색
경직도(耕織圖)는 일년 동안의 농사 장면과 길쌈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중국 남송 때 절강성 어잠현의 현령이었던 누숙이 농사 장면과 길쌈 장면을 시와 그림으로 엮어 황제에게 바쳤는데, 이것을 후대에 본떠 그린 것입니다. 원래는 45장면이었지만 지금은 농사 장면 12장, 길쌈 장면 18장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보는 장면은 ‘벼 베기’, ‘볏단 쌓기’, ‘도리깨질’, ‘벼 까부르기’입니다. 그림 위쪽에는 각각의 일감에 어울리는 시를 적었습니다. 국왕은 항상 백성들의 농사짓는 노고를 생각해야 한다는 교 훈적인 내용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예(禮)로써 구현하는 바른정치
의궤는 국가의례나 행사에서 모범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모범적인 의례란 바른 예법을 잘 따른 의례입니다. 의례에 맞는 예법을 규정한 것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같은 전례서(典禮書)라면, 의궤 그 예법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의 경험을 모은 것입니다. 의례에서만 예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국왕이 추구해야 할 바른 정치도 예법을 따르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효나 충, 신의같은 사회적 덕목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예(禮)입니다. 왕이 먼전 바른 예를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따르게 하는 것, 그것이 예로써 구현하는 바른 정치입니다. ‘의식의 궤범’ 의궤, 거기에 만세의 모범이 될 조선의 의례 경험과 품격의 통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2. ‘조선왕조의궤’, 위키백과, 2023년
  3.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1. ‘책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2. 어진도사(영정모사)도감의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