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에 있는 고택인 감고당(感古堂)은 숙종이 계비인 인현왕후의 친정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원래 서울 북촌의 중심인 안국동 덕성여고 교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당이 상당히 넓고 건물들은 화려하면서도 웅장하다. ‘ㄷ’자형 안채는 비교적 조선후기 한옥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랑채는 중국풍의 누마루를 하고 있으며 유리창문을 사용하는 있다.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북촌(北村)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당시 그들이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안국동 감고당>
감고당은 안국동 덕성여고 교정에 원래 있었는데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대 부근으로 옮겨졌다가 최근에 명성왕후 생가가 있는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로 옮겨졌다. 명성왕후는 민유중의 종손인 민치록의 딸로 8세때까지 여주에서 살다가 왕비로 간택.책봉되기전까지 감고당에서 살았다고 한다.
<‘감고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저택 솟을대문>
<안에서 본 모습>
영조가 ‘감고당’이라고 적힌 현판을 내려주어서 이 가옥을 감고당이라 부른다. 한쪽편에는 작은 문간방을 두고 있다.
<솟을대문 오른쪽 행랑채>
<안에서 본 모습>
감고당은 도심에 해당하는 북촌에 있던 대저택으로 행랑채도 바깥쪽 골목길을 향해 창문이 있다. 지방의 세거지에 있는 대저택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이다. 지방의 대저택과는 달리 농사와 관련된 건물은 없고, 하인들이나 손님이 거처할 수 있는 방과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 왼쪽편 행랑채>
‘ㄱ’자형으로 일반 살림집 규모이다.
행랑채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로도 활용하였다. 이곳에서 하인들이 농한기에는 새끼를 까고 가마니를 짜는 일을 하였다.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다. <출처:여주군청>
<바깥주인의 공간인 사랑채>
앞면 5칸에 몸채에 누마루가 있는 6칸규모의 날개채를 달아내었다. 전통적인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사랑채에 중국풍의 건축 양식 등이 반영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을 ‘丁’자형을 이루고 있다.
<날개채>
<누마루>
날개채는 6칸 규모이며, 앞쪽 4칸은 누마루로, 뒷편에는 온돌방을 두고 있다. 누마루는 구한말 크게 유행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기둥 사이에 벽돌을 쌓아 장식하고 있는 중국풍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대청마루>
<누마루>
<온돌방>
사랑채 가운데에는 꽤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려, 누마루와 함께 개방된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건물 왼쪽에는 대청마루보다 약간 높게 만든 누마루가 있고, 그 안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누마루에는 유리창문을 달았다.
<안채에서 본 사랑채>
사랑채
사랑방은 사랑채의 주요 공간으로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행랑채와 중문채 사이에 자리하였고,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고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또한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거나 거문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한 것도 사랑채에서였다.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 문화가 발달하였다. <출처:여주군청>
<중문채>
<안에서 본 모습>
중문과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살림을 돌보는 하인들이 살았던 공간이다.
중문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중문채는 중간계층인 청지기 등이 거처하였던 곳이다. 또한 쌀, 김치, 장작 등을 보관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안채의 부속건물이라할 수 있고, 안채와 사랑채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여성의 거주공간이 안채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다. <출처:여주군청>
<안채>
<안마당>
안채는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감 있는 본채를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채가 있는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앞면 7칸 정도로 큰 규모를 하고 있다. 본채에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양쪽 날개채에는 부엌과 방이 있다.
<전통가구 놓여진 안채 대청마루>
<대청마루 왼쪽 온돌방>
<대청마루 오른쪽 온돌방>
<또 다른 온돌방>
<부엌>
<아궁이가 있는 부엌>
<툇마루>
안채 대청마루 앞으로 툇마루를 달아내어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
안채
안공간인 안채는 몸채, 내당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위치하였다. 안채는 안방, 대청, 건넌방, 웃방, 다락 부엌 등으로 구성되었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꺼려하여 남편이나 친척 외에는 남자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여성들의 외부와의 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랑채와 달리 학문 탐구 등의 활동공간이라기 보다는 가족들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공간으로 가구류도 의복과 침구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 가구 등이 놓여져 있다. 명성황후가 8세 때부터 왕비로 간택.책봉되기전까지 이곳에서 머물렀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왕비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출처:여주군청>
숙종이 인현왕후 친정을 위해 지어준 감고당은 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폐위되었던 기간동안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영조가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感古堂)’이라 적힌 현판을 하사한 이후부터 감고당이라 불렀다. 지금도 안국동 덕성여고 앞 길을 감고당길이라 부른다. 민유중의 후손으로 민유중 무덤 부근 묘막에서 살았던 민유중의 종손 민치록의 딸인 명성황후는 8세때부터 세자비로 간택될 때까지 이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감고당은 쌍문동의 덕성여대 부근으로 옮겨졌다가 200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가옥의 구조는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감고당이 있었던 북촌 안국동 덕성여고 앞 감고당길>
감고당(感古堂)
감고당은 조선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왕비에서 물러난 뒤 이후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명성황후(1851~1895)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3) 왕비로 간택.책봉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렀다.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한후부터이다. 본래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고, 이후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던 여주군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신축하였다. 수차례 이전 건축하고 수리하면서 본래의 모습이 변형되었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구조 형태를 띄고 있다. <출처:여주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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