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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오정방 고택, 해주오씨 세거지 양성 덕봉리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마을에 소재한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다. 이 고택은 한옥 중에서는 그 연대가 오래된 중종 5년(1510)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50(효종1)에 옮겨진 것으로, 실제로 이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ㄱ’자형 안채 겸 사랑채와 사당, 문간채가 남아 있으며, 외곽에 행랑채가 있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편이며, 창덕궁 후원에 연경당처럼 사랑채와 안채가 한건물이면서 담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성 오정방 고택>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마을에 남아 있는 오정방고택. 조선중기에 처음 자리잡은 이래로 오두인을 비롯하여 해주오씨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살았던 고택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의 건물로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영역은 담장으로 분리하고 있다.

<사랑채>

사랑방과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조선후기에 많이 볼 수 있는 누마루를 두지않고 조선중기 한옥의 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웅장해 보인다.

<옆에서 본 모습>

옆쪽에서 본 사랑채. 누마루가 없는 대신 앞과 옆에 툇마루를 넓게 두어 정자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구한말 양식이 반영되어 툇마루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안채>

안채는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하고, 날개채를 달아내어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 난간>

대청마루 왼쪽 사랑채와 붙은 건너방은 대청마루보다 약간 높게 하고 난간을 설치하여 안채내 누마루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안채와 연결된 부엌>

<안채를 출입하는 문간채>

지금은 대문으로 보이는데 바깥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때는 중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문이 있는 문간채>

지금은 광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섬돌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볼 때 문간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뒷편으로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

<사당 건물>

사당은 앞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건물이다.

덕봉리마을은 옛 양성현 관아가 있었던 양성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고성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집은 중종대에 정무공 오정방이 처음 건립한 이래로 후손들이 계속 살아왔던 집으로, 인근 덕봉서원에 모셔진 오두인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덕봉리 마을은 해주오씨 세거지로, 이집이 종갓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성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교통로인 양성현 소재지와도 가깝고 마을 앞으로 넓은 농토가 펼쳐져 있어서 경제력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한양의 권문세가들은 지방에 경제적 기반이 되는 세거지를 두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해주 오씨는 대대로 경기도 안성에 세거지를 두고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오두인을 모신 덕봉서원이 이 마을에 있다. 덕봉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서원 중 하나이다. 오정방의 후손들은 조선후기 크게 번창하여 한양에서도 대표적인 권문세가였다. 서울 북촌 경행방(현재의 낙원동)에서 터를 잡고 살았으며, 덕봉리마을에는 후손들이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최근에 신축한 큰 규모의 재실이 있다.

북촌 사대부, 해주 오씨
북촌의 경행방(현재 낙원동)에는 해주오씨 오태주와 그 후손들이 살았다. 오태주는 형조판서를 지낸 오두인의 아들로 1680년(숙종6)에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오태주는 공주의 오빠인 숙종과 친하여 서로 간에 자주 시를 주고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명안공주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지 조카 원이 양자로 들어와 가계를 계승하였다. 오원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승지,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고모부이자 당대 예학의 대가인 이재에게 배웠다. 그 아들 오재순 역시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후로도 후손들은 대대로 명문가의 위상을 이어갔다. 오태주와 그 후손들은 집안의 문서를 잘 보전하여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역사를 잘 알려주고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고택맞은편에 있는 해주오씨 정무공파 재실>

최근에 지은 것으로 상당히 웅장하게 지었다. 지금도 이 집안이 상당히 번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성부 오태주 준호구, 1702년, 박한설 기증>

준호구에 의하면 그는 1702년(강희41)에 경행방 오순덕계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는 오태주의 신상을 기록하고 부친.조부.증조부.외조부를 소개하였으며, 또 처인 명안공주의 부친.조부.증조부.외조부를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데리고 있는 노비와 그들의 가족관계를 기재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안성 덕봉리 오정방 고택>

<고택에서 내려다 본 덕봉리 마을>

권문세가였던 해주오씨의 세거지였던 이 마을에는 이 집을 제외하고는 고택이 남아 있지는 않다. 지금은 한가한 농촌마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덕봉서원>

조선중기 문신 오두인을 모신 덕봉서원은 옛 양성현 일대 넓은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뒷편에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는 낮은 야산이 바리봉이 있다. 경치가 빼어난 곳에 자리한 것은 아니지만 들판을 바라보고 있어 개방된 느낌을 주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이 가옥은 조선 중종 5년(1510)에 처음 건립된 이래 오정방, 오사겸, 오숙, 오두인에 이르기까지 해주 오씨 명헌들을 배출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처음에는 덕봉리 252번지에 세워졌던 것으로 조선 효종 1년(1650)에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재 전하는 건물은 문간채, 안채 겸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간채와 안채겸 사랑채가 일곽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외각에 별도의 행랑채나 문간채, 담장 등이 있어 가옥 외부와 경계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와 사랑을 연속하여 단일채로 구성하였는데 특히 ‘ㄱ’자형 몸체에서 ‘-‘자 부분을 길게 연장하고 중간에 사잇담을 두어 안팎으로 나누는 수법은 연경당과 비견되는 이 가옥의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치목수법, 건물의 배치 및 구성수법이 우수하여 조선 중.후기의 살림집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안성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