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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명성황후 생가, 민유중 묘막으로 세워진 고택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이다. 솟을대문이 있는 ‘-‘자형 행랑채, 사랑채와 중문이 있는 ‘ㄱ’자형 문간채, ‘ㄱ’자형 안채, 바깥쪽에 ‘-‘자형 별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옥의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짜임새있게 꾸며진 중부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을 살 보여주고 있다.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 아버지 민유중의 묘막으로 지어진 이 가옥은 서울 북촌 감고당과 함께 민유중 후손들이 살아왔던 집이다. 원래 가옥 중 안채만이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사랑채,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명성황후 생가>

이곳은 숙종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세워진 가옥으로 대대로 민유중의 후손들이 살아왔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손으로 이곳에서 명성황후를 낳았다.

<솟을대문이 있는 문간채>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문간방과 광을 배치하였다. 대문 양쪽에 문간방과 광을 두고 있다. 하인들이 거처하는 방이지만 기와을 얹어 짜임새있게 지었다.

<문간방>

문간방에는 하인이 일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사랑채>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이 있고 그 왼쪽편에 마루와 사랑방이 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쪽으로 문이 있는 형태이다. ‘ㄱ’자형 건물로 안채와 함께 ‘ㅁ’자형 구조를 만들고 있다. 사랑채는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마루와 온돌방>

<사랑채 대청마루>

1칸규모로 크지 않은 편이며, 여름 한철 시원하게 지내는 공간이다.

<왼쪽 온돌방>

왼쪽에 온돌방으로 된 날개채를 달아내었다.

명성황후 부모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1799~1858)과 어머니 헌창부부인 한산 이씨(1818~1874)이다. 민치록의 자는 원덕, 호는 서하, 시호는 순간이다. 숙종의 두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개성유수 기현이고 어머니는 정씨이다. 민치록은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두었는데 형제들이 모두 일찍 죽어 명서황후는 무남독녀로 자랐다. 명성황후가 8세 되던 해에 민치록은 영천군수 벼슬을 끝으로 서울 감고당에서 죽었다. <출처:여주군청>

<안채>

‘ㄱ’자형으로 지어진 안채는 주로 부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주택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몸체, 내당 등으로 불리며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등으로 구성된다. 명성황후 생가 중 유일하게 원래 있던 건물이다.

<안채 대청마루>

집안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분합문을 달고 있다.

<명성황후 부모가 생활했던 안방>

<대청마루 오른쪽 건너방>

아궁이 위로 대청마루보다 높게 툇마루를 달아 놓고 있다.

<부엌이 있는 날개채>

명성황후의 어린시절
명성황후는 1851년 9월 25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셩부원군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이며, 명성황후가 8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영천군수 벼슬을 끝으로 서울 감고당에서 사망했으니 8세 이전에 이곳에서 글 공부를 하며 어린시절을 보내고, 여주를 떠나 서울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여주군청>

<안채 옆에 따로 지은 별당>

앞면 3칸규모로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주택에 부속된 별당은 주택 내에서 사랑채의 연장으로 가장의 다목적인 용도로 쓰여 지거나 자녀나 노모의 거처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대청마루 내부>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손으로 영천군수 벼슬을 끝으로 서울 감고당에서 사망했다. 명성왕후는 이곳에서 태어나 8세이전까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8세에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왕비로 간택.책봉될때까지 서울 감고당에서 지냈다. 명성황후 생가 주변에는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 순종이 직접 글을 지은 ‘명성황후탄강구리비’, 하마비 등이 있었고, 1995년이 이곳을 정비하면서 명성황후기념관, 민가마을 등을 짓고 서울 북촌에 있던 감고당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 비석이다. 탄강은 왕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구리는 고향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탄강구리는 명성황후께서 태어나신 옛 마을이란 뜻이다. 원래 이 자리에 명성황후가 어린시절에 공부하던 별당이 있었으나 1895년 동학농민혁명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이 비석은 1904년도에 세워졌다. 비석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경서’라고 새겨져 있는데 ‘광무팔년(1904년) 오월 어느날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라는 뜻이다. 명성황후의 아들이자 조선 27대 임금인 순종황제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여주군청>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비각>

<‘명성황후탄강구리’라 적힌 비석>

비석 뒷편에 명성황후의 아들인 순종이 직접 쓴 글이 있다고 한다.

민유중 묘.신도비
민유중(1630~1687)은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의 장인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신도비는 묘로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민유중은 1650년(효종1)에 과거에 급제한 뒤 승문원과 예문관 등의 요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묘에는 민유중과 선생의 부인이 합장돼 있으며, 봉분 주위에는 호석이 둘러져 있다. 신도비에는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를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의 기단석의 몸통은 거북이 형상이며, 머리는 용의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틀어져 묘소를 향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150m지점에 민유중의 묘가 있다. <출처:여주군청>

<민유중 신도비>

<명성황후 생가 앞에 조성해 놓은 연못>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생가,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명성황후는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뛰어난 외교력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고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되었다. 이곳은 1851년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까지 살던 집이다. 원래 1687년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는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1995년도에 사랑채.행랑채.별당 등을 복원하였다. 생가 주변에는 명성황후나 태어난 곳임을 알려주는 민유중의 묘.신도비, 하마비 등의 문화재가 있다. 경기도와 여주군은 1995년부터 명성황후의 업적을 기리고 역사의 산 교육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명성황후기념관, 공연장, 감고당, 민가마을, 추모비 등을 건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여주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