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관할했던 옛 광주부(廣州府)에서 설치.운영했던 중등교육기관인 광주향교(廣州鄕校)이다. 광주향교는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비교적 이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광주부 옛 읍치가 서쪽편에 있던 것을 숙종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경기도의 다른 향교에 비해서 규모도 큰 편이다. 평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를 앞에, 제향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를 뒤에 둔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광주부 관아는 남한산성내 있었던 반면에 향교는 원래 관아가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남 광주향교>
조선숙종대에 지어진 것으로 경기도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공사중인 외삼문 (1012년 9월)>
<명륜당>
<옆에서 본 모습>
강당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고을규모에 비해서 명륜당 건물이 작은 편이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앞면 5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방의 갯수가 많은 편이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많았던 것도 있지만, 한양에서 한강이남 지역을 여행할 때 잠시 묵어가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맞은편 서재>
<제향공간 출입문인 내삼문>
<공자와 선현들의 위채를 모신 대성전>
앞면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광주부의 위상에 걸맞게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대성전 앞에는 동.서무>
<담장>
<향교를 관리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는 살림집>
<향교의 내력을 말해주는 고목>
경기도 광주(廣州)는 고려 성종때 전국에 설치한 12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광주목이 설치된 곳으로 현재의 광주시,성남시, 서울의 강남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한성 백제의 수도가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의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거점이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던 시기 광주호족은 전국의 유력 호족 가운데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초 광주목사는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방어사(防禦使)를 겸직했으며, 선조대에 광주부로 승격되면서 부윤(府尹)이 파견되었고, 숙종대에는 유수(留守)가 파견되는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원래 광주의 중심지역은 현재 하남시 춘궁동 일대였는데, 병자호란 이후에 관아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인 이성산성과 고려초기 절터이 춘궁동사지가 있으며,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남아 있다.
<광주향교 주변>
향교 서쪽에는 통일신라시대 이곳을 관할하던 이성산성이 멀지않은 곳에 있다. 이 지역이 한강유역 주요 교통로를 관리하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향교 남쪽 남한산성>
<옛 광주부 관아가 있었던 하남시 교산동 일대>
<최근에 복원한 남한산성 행궁>
광주유수가 근무하는 광주부 관아이자 비상시 국왕이 임시로 머물 수 있는 곳이다.
광주향교 (廣州鄕校), 경기 하남시 교산동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 교육기관으로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일반적인 향교의 건물배치는 앞에 외삼문 안쪽에 공부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서재를 두고 뒤의 높은 곳인 내삼문 안에는 공자와 성현(안자, 자사, 증자, 맹자)를 제사 지내는 대성전과 공자의 제자 및 송나라와 우리나라의 현인을 제사하는 동.서무를 두는 전학 후묘의 배치를 이룬다. 이 향교가 세워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고을 서쪽에 있었던 것을 숙종 29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광주향교는 경기지역에서 드물게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서재와 동.서무를 모두 갖춘 큰 규모의 향교이다. <출처: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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