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위치한 화산서원(花山書院)이다. 이 서원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오성대감으로 잘 알려진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년)을 모시기 위해 인조대(1631년)에 세워졌으며, 숙종으로부터 ‘화산(花山)’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현재의 화산서원은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7년 지방유림들이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뒷쪽에 사당이 있고 앞쪽에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있으며, 강당은 두고 있지 않다. 이항복을 모신 서원은 그가 귀향을 떠났다가 죽은 북청에 세워진 노덕서원(老德書院)이 서원철폐령에 살아남은 서원이다.
<포천 화산서원>
<홍살문>
<외삼문>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복원된 것으로, 강당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동.서재를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학을 양성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서원을 찾는 손님이 많았다는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건물배치이다.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
앞면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실제로는 이곳을 찾은 손님들이나 서울에 기반을 둔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이 그의 묘소에 제사를 올릴때 묵을 수 있도록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강학기능의 거의 없어진 조선후기 서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맞은편 서재>
백사 이항복은 선조대 문신으로 호조참의, 동승지 등의 벼슬을 거치고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모시고 따랐던 중요 인물 중 한명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이 되었고 청백리에 추대되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광해군 10년(1618)에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산서원이 있는 포천시 기산면 일대에는 이항복의 묘가 있으며, 서울출신인 백사 이항복 집안의 세거지가 있었던 곳이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많은 정승들을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며 이시영, 이회영 등 많은 인물들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었다. 이 지역은 금강산 유람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 중요관청인 양주목 관아와 도보로 하루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고, 북쪽으로는 ‘오성과 한음’이야기로 유명한 친구인 한음 이덕형을 모신 용연서원이 반나절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금강산과 관동팔경 유람을 떠났던 많은 선비들이 묵으면서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제향공간>
<화산서원에서 보이는 주변 마을>
화산서원 앞 가산면 일대는 포천에서도 농토가 넓은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일가가 만주로 떠날때 처분했던 재산에 이 일대의 농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멀리 백사 이항복의 묘소가 있는 낮은 야산이 보인다.
<포천 용연서원>
이곳에서 북쪽을 10km 정도 떨어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자리잡고 있는 용연서원이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유명한 조선중기 문신 한음 이덕형을 모신 사원이다.
화산서원(花山書院), 경기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조선 선조 때의 명신 백사 이항복의 학문가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고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인조 13년(1635) 건립되었다가 숙종 원년(1675)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내린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1년 지방유림들의 뜻을 모아 복원되었다. 현재 사당과 동.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항복은 선조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모시고 따랐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이 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광해군 10년(1618)에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8월달에 모든 관직을 회복하고 고향인 포천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문충공이다. <출처:포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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