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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심곡서원(사적), 정암 조광조를 모신 서원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 사적)이다. 조선중기 성리학적 관점에서 개혁을 주도했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를 모신 서원이다. 이 서원은 효종 원년인 1649년에 세워졌으며, ‘심곡(深谷)’이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았다. 아파트숲으로 둘러싸인 마을 뒷산에 서쪽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입구의 홍살문, 내.외삼문, 강당인 일소당과 사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인근 정몽주를 모신 충렬서원에 같이 모셔졌으나 이후 현재 장소에 심곡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옮겼다. 조광조를 모신 서원은 용인 심곡서원, 서울 도봉서원 등 전국적으로 많았지만, 그의 묘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적인 중요성을 인정받아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던 전국 47개의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지방 명승지에 세워졌던 다른 많은 서원들에 비해서 건물의 규모나 외형에 있어서는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경기도 서원의 형태를 하고 있다.

<용인 심곡서원(사적)>

조광조 묘역에서 멀지 않은 마을 뒷동산에 세워졌는데 지금은 주변이 아파트 숲을 이루고 있다. 홍살문,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

<외삼문>

<심곡서원 현판>

효종으로부터  ‘심곡’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그의 묘역과 가까이 있었던 까닭에 구한말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강당인 일소당(日昭堂)>

강당건물은 앞면3칸, 옆면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사방에 널문을 달았으며, 문을 열면 정자처럼 사용할 수 있다. 강당건물의 규모로 볼 때 교육기능보다는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역할을 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동재>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규모가 작아 실제로 이 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많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맞은편 서재>

<장서를 보관하는 장서각>

서원의 규모에 비해 큰 편이다. 이곳에는 많은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1985년 도난당했다고 한다.

정암 조광조는 14세때 성리학자 김굉필 문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호조,예조,공조의 좌랑, 홍문관 승지,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는 중종의 신임을 받아서 다양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이후 조광조의 개혁에 반감을 가진 중종반정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의 역공을 받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했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역사적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후대에 조선사회를 주도했던 사림세력을 추앙을 받았다.

<제향공간>

서원 건물 중에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당 앞쪽에 제사준비를 위한 퇴간이 마련되어 있다.

<내삼문>

<사당>

<고직사>

사당 옆에는 서원 관리인이 머무는 고직사가 있는데, 지금은 양옥으로 지은 살림집이 들어서 있다. 이 서원의 제향기능이 지금까지도 계속 유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원 옆 작은 연못과 고목>

<조광조의 글을 모은책인 정암선생문집>

조선 중종때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하다 훈구세력의 공격을 받았던 조광조의 대표적인 글들을 모은 책이다.

용인 심곡서원(深谷書院),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1519) 때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49)에 세워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강당인 일소당·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