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조선호텔 자리에 남아 있는 환구단(圜丘壇)이다. 환구단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으로 지위를 격상하면서 하늘에 제사을 올리기 위해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1897년에 설치하였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고종 황제가 머물던 덕수궁을 마주보는 작은 언덕에 세워졌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인 황궁우(皇穹宇), 돌로 만든 북(石鼓)과 출입문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조선총독부가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었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중국 북경의 천단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 데, 그 규모나 내용면에서 많이 부족해 보인다. 구한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도 크지 않으며, 원형도 훼손되어서 지금은 도심속에 숨어 있는 작은 정원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국력을 보여주고 장소라 할 수 있다.
<서울 환구단(사적)>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거의 없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은 없어지고 황궁우와 출입문 등이 남아 있다.
<환구단 사진(1907년)과 배치도>
엄청난 면적과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 천단공원과는 달리 규모도 작고 면적도 좁다. 남쪽에 제사을 올리는 원형의 제단이, 북쪽에 위패를 모시는 건물인 황궁우가 있다. 제사 준비시설로 전사청과 재실 등이 있다.
<환구단 정문>
원래는 남쪽편 조선호텔 입구에 있었다. 1960년대 철거된 후 우이동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최근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평삼문을 하고 있다.
<추녀마루 잡상>
환구단(圜丘壇) 정문, 1897년, 서울 중구 소공동
이 문은 대한제국 초기 환구단 시설을 건설하면서 그 정문으로 지은 것이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로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당시의 황궁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의 맞은편 남별궁터에 세웠다. 환구단의 전체시설은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천신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 그리고 그 주변 시설로 어재실, 향대청, 석고각 등을 갖추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황궁우(皇穹宇)와 석고각 안에 있었던 돌북 뿐이다.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의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변에 위치하였는데, 1960년대말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원래 환구단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문의 이전 복원을 논의하게 되었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 환구단 시민광장으로 자리를 정한 것은, 서울광장 및 덕수궁과 마주보고 있어서 보다 많은 시민이 환구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 측칸을 좁게 조정하였다. 기둥 위에는 출목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를 사용하였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사용한 점도 특별하다. <출처:서울시청>
<제단이 있던 자리>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 있던 자리에는 조선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3층제단이 있었다.
<북경 천단공원의 제단>
우리나라에서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제천의례가 행해졌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대 일시적으로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는 했으나 곧 폐지되었다고 한다. 환구단에서 올리는 제사는 삼국시대이 제천의식과는 달리 중국의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환구단은 본래 중국의 천자가 동지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을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에 따라 둥근 원형의 제산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지금도 북경 자금성 남쪽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천단(天壇)이 남아 있다.
<황궁우>
황궁우(皇穹宇)는 제천행사때사용하는 신패를 보관하는 곳이다. 북경 천단공원의 황궁우를 참조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것은 원형의 1층 건물인데 비해 우리나라 것은 팔각형에 3층건물을 하고 있다. 아마도 웅장한 기년전과 비슷하게 지을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궁우 월대를 오르는 계단>
동.서.남 세방향으로 계단을 두고 있다.
<황궁우 단청 장식>
<추녀마루에 세워진 잡상들>
<황궁우 건물 앞 월대>
<동쪽편 계단>
<서쪽편 계단>
<중국 천단공원의 황궁우>
<황궁우 정문>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단이 있던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황궁우 동쪽편 협문>
삼문으로 된 정문과는 달리 작은 협문으로 되어 있다.
<황궁우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 역할을 하는 난간>
<마당에 세워진 해시계>
<마당 안쪽에 모아 놓은 석물들>
<황궁우 정문>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기존의 목조건물과는 달리 중국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지었다.
<황궁우 정문 앞 계단>
계단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국왕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는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 난간 기둥에 세워진 석수(石獸)>
<삼문 앞 작은 석수>
<2009년 황궁우>
<석고(石鼓)>
석고는 광무6년(1902)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이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조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서 당시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출처:서울시청>
<구한말 최고의 조각으로 평가받는 돌로 만든 북(석고)>
환구단(圜丘壇), 사적, 1897년, 서울 중구 소공동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황단(皇壇) 또는 원구단(圜丘壇,圓丘壇), 원단(圜壇,圓壇)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에는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1897년 10월에 완공된 환구단은 당시 왕실 최그의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이 설계를 하였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 황궁우, 돌로 만든 북(石鼓)과 문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현재의 덕수궁)과 마주보는 자리에 지어졌다. <출처: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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