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사직단(社稷壇, 사적)이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국사지신(國社之神)과 곡식의 신인 국직지신(國稷之神)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곳으로 종묘(宗廟)와 함께 국가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에서는 고대 중국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따라 궁궐 오른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천의식은 부여를 비롯한 고대국가에서 아주 중요시 여겨졌으며 다양한 형태의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사직단은 중국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991년(성종10)에 사직단이 개경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 또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시작한 1293년에 도성(都城)을 설계할때 경복궁 서쪽에 터를 잡았고, 1395년(태조4)에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때 신실(神室)을 비롯한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린 것을 선조대에 복구하여 오느에 이르고 있다. 후손들이 존재하여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종묘와는 달리 사직단은 일제강점기 이후 수난을 겪기 시작하여 경내가 공원으로 바뀌었고, 각종 관공서들이 들어서면서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제사를 준비하던 재실(齋室)과 관헌들이 머물던 관아 건물인 사직서(社稷署)는 남아 있지 않고 안향청(安香廳) 건물만 남아 공원관리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서울 사직단(사적)
사직단은 특별한 장식물이나 화려한 조경 같은 것은 거의 없고 단순하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만 설치되어 있다. 동쪽에 토지의 신을 모시는 사단(社壇), 서쪽에 곡식의 신을 모시는 직단(稷壇)이 설치되어 있다. 제단 주위에는 나지막한 담장을 이중으로 두르고 동.서.남.북 네방향으로 홍살문 형태로 신문을 설치해 놓고 있다. 제단 위에는 다섯방향을 상징하는 다섯색깔의 흙을 뿌렸다.
<도로에서 본 모습>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의 정신세계를 아우러는 중대한 두개 축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존재하는 종묘와는 달리 이해 당사자가 없었던 까닭에 일제에 의해서 공원으로 격하되었으며, 그 후 도시계획에 따라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사직단 대문(보물)>
조선초 사직단을 세울때 처음 지어졌으며,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것을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2년 사직단 앞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원래의 위치보다 뒷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국가를 상징하는 사직단의 정문으로 장식성이 배제된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건물이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사직단 현판과 출입문>
<안쪽에서 본 사직단 대문>
사직단 대문 (社稷壇 大門, 보물),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사직단이란 나라와 국민 생활의 편안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사(社)는 땅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또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 문은 사직단의 정문으로 태조 3년(1394)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숙종 46년(1720) 큰 바람에 기운 것을 다시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 있는 자리는 1962년 서울시 도시 계획에 따라 14m 뒤쪽으로 옮긴 것이다.건물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새부리 모양의 부재를 이용해 기둥 위에서 보를 받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기법과 튼튼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 사직단 정문의 법식과 넉넉한 느낌을 주는 건축 문화재이다. <출처:문화재청>
<사직서 터>
사직단 대문을 들어서면 안쪽에는 이곳을 관리하는 관청인 사직서(社稷署)와 제사를 준비하던 재실(齋室)이 있었다. 지금은 재실과 사직서는 남아 있지 않고 안향청(安香廳) 건물만 남아 공원관리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사직서터(社稷署址)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사직서는 사직단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던 조선시대 관아이다. 사직서에서 숙직하는 관원은 매 5일마다 사직단을 살피고, 음력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신위(神位)를 모신 방인 신실(神室)을 살필 후 고칠 곳이 있으면 예조에 보고하였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에 제를 올리는 사단(社壇)은 동쪽, 곡식의 신에 제를 올리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설치되어 있다. 곡식을 뜻하는 직(稷)은 곡식 중 기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기장을 가장 중요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직단 내부에 담장이 설치되어 있고 사방으로 신문(神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는 삼도로 연결되어 있다. 사직단에는 장식성이 있는 의기나 기물들의 거의 없고 천방지원 사상에 따라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2개의 단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사직단 위에는 ‘오색토(五色土)’라 불리는 각 방위에서 가져온 오색의 흙이 뿌려졌는데,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따라 가운데는 황색, 동쪽은 청색, 남쪽은 적색, 서쪽은 백색, 북쪽은 흑색으로 꾸며졌다. 실제로는 사단과 직단은 서북과 동남 방향에 세워졌으며, 제단을 출입하는 신문 또한 동남.서남.서북.동북 방향에 제단 주위와 바깥쪽에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다. 사직단은 동북방향 신문(神門 정문인 것으로 보이며, 동북쪽에 있는 정문에서 신도가 출발하여, 서북방향 안쪽 신문으로 연결된다. 바깥 담장 안쪽 북쪽 모서리에는 신실이 설치되어 있다. 사직은 종묘와 함께 국가를 상징하는 주요 제사시설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사직단의 설치와 의식절차 등이 명문화되어 있다. 사직단은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설이지만 문화재와 같은 유형적인 유물을 많이 남기지 않고 있다. 이는 중국 북경의 사직단에서도 볼 수 있는 사직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궁궐의) 좌측에는 종묘(宗廟)를 두고 우측에는 사직(社稷)을 둔다. –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사직단 북쪽 담장>
사직단의 동쪽편 담장으로 사직단의 동.서.남.북으로 나 있는 문중에서 제일 큰 북쪽 문(실제로는 북동방향)이 있다.
<사직단 북문>
홍살문 형태로 되어 있는 삼문이다. 사직단은 사방으로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데 북문만 삼문으로 되어 있다. 다른문은 신이 드나드는 신문(神門)만 있고, 북문만 제관이 출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문에서 제단으로 들어가는 길>
종묘와 마찬가지로 삼도(三道)로 되어 있다. 삼도는 북문에서 출발하여 서문 앞을 지나 남문으로 연결된다.
<판위>
제단 앞에는 제관이 대기하는 판위가 설치되어 있다.
<서쪽 담장에서 본 제단>
동쪽에 토지의 신을 모시는 사단(社壇), 서쪽에 곡식의 신을 모시는 직단(稷壇)이 설치되어 있다. 제단 위에는 5가지 방향에서 가져온 5가지 색깔의 흙이 뿌려진다. 제단은 천방지원 사상에 따라 사각형을 하고 있으며, 4방향으로 계단과 홍살문을 두고있다.
<사직단 서쪽 신문과 담장>
<서문 안쪽으로 보이는 직단(稷壇)과 홍살문>
<사직단 서쪽편 모서리에 있는 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신실(神室)>
앞면 1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건물이다.
<사직단 남쪽편 담장>
<남쪽편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사직단>
<사직단 남쪽 신문>
<남문 안쪽으로 보이는 제단>
신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홍살문 앞에 제관이 대기하는 판위가 설치되어 있다.
<담장 안쪽에서 보이는 동쪽편 신문>
<사직단 동쪽편 담장>
<동쪽편 담장 안쪽으로 보이는 사직단>
<사직서의궤, 1804년>
사직의 제도와 의식절차, 관련 행사 등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의궤, 1783년 종조의 명으로 처음 편찬되었으며, 본 의궤는 최초의 의궤에 1783년 이후부터 1804년 2월까지의 기록들을 추가로 기록한 것이다. 정조는 1783년 사직제를 지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당시까지 <사직서의궤>가 편찬되지 않았음을 알고 의궤 편찬을 지시하였다. 본 의궤의 내용을 보면, 1783년까지으 기록들은 서체가 일정하고 참고 문헌이 명시되어 있는 반면, 그 이후부터 1804년까지의 기록들은 서체가 다르고 참고문헌이 밝혀져 있지 않다. 권두에는 <사직서전도>, <단유도설>, <찬실도설> 등의 그림이 실려 있어서 사직단의 전경과 사직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규장각>
<사직단친향병풍(社稷壇親享屛風)>
사직단에서 왕이 제사 지내는 절차 등을 기록한 병풍(복제품). 종묘 제사와 함께 국가에서 진행하는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다.
서울 사직단에 왕이 직접제사 지내는 절차 등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병풍이다. 사직단은 서울과 전국의 큰 고을에 설치되었다. 서울에 있는 사직단은 종묘가 왕궁의 동쪽에 있고 사직단은 왕궁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 경복궁의 서쪽인 지금의 종로구 사직동 자리에 설립되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사직단의 사는 토지의 신을, 직은 곡식의 신을, 단은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뜻한다. 사직단에는 단을 2개로 만들어 산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다. 사단에는 국사지신을 북향으로 모시고, 후토지신을 동향으로 함께 모셨다. 직단에는 국직지신을 북향으로 모시고 후직지신을 동향으로 함께 모셨다. 사직단에서는 정례적으로 지내는 기곡제 등을 지냈다. 토지와 곡식은 나라을 유지하는 기틀임과 동시에 민생의 근본이었으므로, 먼 고대로부터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 지내는 전총이 있었다. 사직단에서 지내는 제사는 민생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의례중의 하나로 여겼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달성 현풍현 사직단>
사직단은 전국의 주.부.군.현에 설치되었는데, 도심에 자리하고 있었고 왕조가 멸망해서 그런지 일제강점기에 전국에 있는 사직단은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남원과 산청 단성의 사직단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북경 사직단>
북경의 사직단은 명대인 1421년에 천안만 서쪽 중산공원에 세워졌다. 청나라때까지 매년 2월과 8월제 제사를 올렸다. 사단과 직단이 따로 있는 우리나라 사직단과는 달리 하나에 제단으로 되어 있다. 명나라 사와 직의 제사의식을 합쳤다고 한다. 신해혁명 이끈 쑨원(孫文)의 장례식때 사직단 배전(排殿)에서 시신을 안치하였으며 이후 이곳을 중산공원이라 부른다. 사직단은 중국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 이어온 것으로 보이며, <논어>, <맹자>를 보롯한 고전에서부터 <후한서>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서에도 등장하며 제후와 국가를 상징한다. 사직에 대한 제사는 대체로 후한대에 현재와 같이 정형화된 것으로 보인다.
<패방>
홍살문 대신 하얀대리석으로 만든 패방을 신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 사직단, 사적, 조선시대, 1395년(태조4),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사직단은 조선시대에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조는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고려의 제도를 따라 1935년(태조4)에 경복궁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을 설치하였다. 사직단은 홍살문이 설치된 두겹의 담장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데, 동쪽에는 사단이, 서쪽에는 직단이 있다. 두 단의 모양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 사상에 따라 한 변이 7.65m인 정사각형이고 두 단의 높이는 약 1m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직단을 관리하기 위한 부서인 사직서와 제사를 지내기 위한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1911년 사직단의 제사가 폐지된 이후 두 단만 남기고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사직단은 서울 뿐 아니라 지방의 주요 도시에도 설치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서울에 있는 사직단의 규모가 가장 크다. 서울과 지방에서 왕과 수령이 사직단에 제사를 올렸는데, 이는 농업이 근본이었던 전통사회에서는 토지와 곡식의 신을 중요하게 섬겼기 때문이다.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시설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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