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제기동에는 남아 있는 조선시대 주요 제사시설인 선농단(先農壇, 사적)이다. 이곳은 농사를 가르쳤다고 하는 고대 중국의 고대 중국의 제왕으로 농업의 신으로 통하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또한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을 하던 곳이다. 선농제가 끝내면 큰 잔치를 벌였는데 이때 소를 잡아 가마솥에 끓여서 농부들과 구경나온 노인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 설렁탕라고도 한다. 왕의 친경지였던 밭은 종암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선농단도 작은 제단과 향나무들만 남아 있다. 선농단은 조선시대 국가를 경영하는 기본 철학을 잘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선농단에 심어진 오래된 수령의 향나무는 중국 북경 문묘의 향나무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어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향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선농단(사적)>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 선농제는 법전에 해당하는 ‘국조오례의’에 반영되어 있는 중요한 제례였다. 하지만 제단의 규모는 단촐하고 검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중국에서 유래한 의식으로 중국풍 제단의 모습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선농단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제단으로 내부를 출입할 수 없다.
<제단 앞에 세워진 석상>
<선농단 입구에 있는 돌기둥>
패루나 홍살문 같은 형태의 출입문이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은 유교예법에 따라 농사를 관장했던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향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으며, 중국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
<선농단을 조성할 때 심어졌다고하는 향나무>
선농단 향나무,
서울 용두동 선농단의 향나무는 나이가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약 13.1m, 가슴높이의 둘레는 약 2.28m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농단(先農壇)을 만들어 중국의 예에 따라 농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을 모시고 왕이 직접 나와 풍년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선농단에서 제사가 끝나면, 사용된 막걸리를 나무에 뿌려주었고, 소를 잡아 큰 가마솥에 넣어 국을 끓이며,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어서 농부들과 구경나온 노인에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설렁탕이라는 이름은 선농단에서 끓인 국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 되었고 다시 설롱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향나무는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몇 개의 초석과 향나무만이 남아 있다. 서울 용두동 선농단의 향나무는 우리 조상들의 문화와 관련된 자료로서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5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츌처:문화재청>
우리나라의 선농제는 삼국시대 신라에서부터 행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예에 따라 선농제와 친경례가 행해졌는데 팔관회 같은 불교 행사에 비해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예법에 따라 선농제는 국가의 주요 의식이 되었다. 태조대에 국왕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지를 설치하고 경작을 시작했으며, 태종대에 선종를 위한 제단 설치 규정을 마련하였다. 세종대에는 법전에 해당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선농단과 경작에 대한 의식을 규정하였으며, 성종대에 친경대를 신축하고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선농제는 구한말 대한제국때까지 거행되가고 1909년 폐지되었고 이곳에는 공원이 조성되었다. 이후 선농제는 1997년 재개되었으며, 1992년부터 동대문구에서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친경지>
선농단 앞에 있는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시범을 보였던 친경지에는 종암초등학교와 주택들이 들이 들어서 있다.
<친경의궤(親耕儀軌), 1739년(영조15)>
왕이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친경은 지금의 동대문구에 위치한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왕이 직접 밭을 가는 의식으로 공식적일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영조가 거행한 친경 의식에 대한 의궤로, 친경이란 국왕이 풍년을 기원하고 농업을 권장하기 위해 선농단에 제사를 지내고 직접 밭을 가는 의식이다. 친경 의식에는 왕세자, 신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함께 참여했다. 친경행사장의 배치도인 관경대도에는 국왕을 비롯한 참가한 인원의 위치와 수, 각각 쟁기를 미는 횟수 등이 표시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동적전식례(東籍田植禮), 1824~1853년>
흥인문 밖 동적전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동적전은 농사의 신에게 제사하고 국왕이 농사 시범을 보이는 장소였다.
<이만승 차첩(差帖), 조선후기>
빙고 결검(氷庫 別檢) 이만승을 선농단 제사의 제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문서이다.
선농단(先農壇), 사적,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선농단은 백성들에게 농사의 소중함을 알리는 선농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는 곳이다. 임금이 선농제를 올리고 친히 경작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던 농경문화의 상징적 유적이다. 선농제는 중국 고대 전설에서 농사를 관장했던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지내는 제사로 이것은 신라떄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였으며, 1476년 성종대에는 관경대(觀耕臺)를 선농단 남쪽에 쌓고 친경의식(親耕儀禮)을 거행하였다. 먼저 왕이 선농단에서 제사를 올리고 나서 적전(籍田)으로 나아가 친히 밭을 갈았다. 그 다음 왕은 관경대에 올라 세자, 대신, 백성들이 순서대로 밭을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관람하였다. 친경 후에 왕은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선농제는 대한제국 말기까지 계속되었으나, 1908년에 선농단의 신위를 선잠단과 사직단에 모시면서 사라졌다. 현재 선농단 안에는 선농제를 올렸던 단(壇) 외에도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향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선농단이 세워질 떄 심어졌다고 한다. <출처: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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