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사(大鳥寺)는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이라 불렸던 가림성(加林城)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던 6세기 초에 백제 성왕이 지시하여 세워진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노승이 수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새가 날아와 앉은 자리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고 하며, 대조사(大鳥寺)라는 이름은 창건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백제 멸망이후 통일신라시대 사찰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사찰 고려 원종때 중창하면서 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찰 경내에 고려시대에 조성한 삼층석탑이 있고, 뒷편에 고려초기 양식을 하고 있는 미륵보살입상이 남아 있다.
<임천 대조사>
사찰은 성흥산 중턱 양지바른 경사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들판과 산들이 내려다 보이는 고려시대 사찰인 부석사나 수덕사 같은 입지조건을 하고 있다. 사찰 창건 전설에 언급된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을 주불전으로 하고, 미륵보살을 모신 용화보전과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을 불전으로 두고 있다.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에 사찰 뒷편 높은 곳에 산신각이 있다. 사찰이 창건된 내력은 오래되었지만, 불전이나 요사채 건물들은 대부분 최근에 중수되었다.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석축산성인 가림성을 탐방할 때 잠깐 들러보면 좋다.
<원통보전>
가람배치는 주불전으로 원통보전을 두고 그 뒷편에 용화보전과 명부전을 불전으로 두고 있다. 마당에는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 있고, 옆쪽에 큰 요사채 건물이 있다. 불전이나 요사채는 대부분 최근에 크게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대조사 창건설화와 관련된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불전이다.
<대조사 석탑>
석불과 같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원래 지붕돌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부근에서 몸체를 발견하여 복원하였다. 이 지방에 있는 다른 탑과 통일신라 이후 유행한 3층 석탑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행태로 보아도 신라탑 양식을 하고 있다.
<명부전>
<명부전 뒷편 산신각>
<산신각 내부>
산산각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와 동녀가 그려진 전형적인 산신도가 모셔져 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고려초에 조성된 거대한 석불이다. 세부적인 묘사나 조각수법이 세련되지 못하고 신체의 비례 또한 어울지 않다. 인근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상과 함께 고려초를 대표하는 석불입상이다.
<용화보전>
<뒤에서 본 모습>
미륵보살입상 아래에는 미륵보살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다. 내부에는 불상을 두지 않고 불단과 예불을 올리는 공간만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 보이는 대조사 경내>
<불상 안쪽 숲속에 있는 작은 요사채>
<사찰 마당에 있는 요사채>
<불유정(佛乳井)>
이곳은 물이 귀한곳으로 큰 샘물이 없었으나 예산성당 장끄랭깡(Jean Crinqunad) 신부가 물줄기를 찾아주었다고 한다.
임천 대조사(大鳥寺)와 미륵석불
백제시대 대표적인 산성으로 서기 501년에 쌓은 성흥산성 아래에 황금새의 전설을 간직한 대조사와 미륵석불이 있는데 백제성왕 5년부터 5년간에 걸쳐 창건했다는 대조사는 신비스러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백제시대 성흥산 중턱의 노송이 양지바른 곳에서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참선삼배 도중에 그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한 마리의 커다란 새가 서쪽에서 날아와 신기하게도 황금빛을 발산하면서 현재의 대조사가 있는 곳에 앉아 큰 바위를 향해 계속 날개를 저었다. 그러자 햇빛에 반사된 한줄기 광명이 바위에 집중되더니 그곳에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이후에도 노승은 여러날 동안 같은 시각에 같은 꿈을 꾸게 되어 이를 가림성주에게 알렸고 성주는 곧바로 성왕에게 보고하였다. 성왕은 사비로 천도할 시기가 왔음을 알고 이곳에 대사찰을 짓도록 하였는데 10년이 걸릴 대규모 사업이었으나 사공을 주야로 투입하여 공사를 서둘렀다. 그때마다 신기하게 공사현장에 새가 날아와 울어 주위를 밝혔고 새소리에 사공들은 피곤을 잊고 공사에 매진하여 5년만에 대사찰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절 이름을 황급히 큰 새가 나타났다 하여 대조사(大鳥寺)라 지었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큰 바위에 석불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온다. (안내문, 대조사, 2015년)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