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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헝가리왕실의 보물"] 종속과 투쟁,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의 귀족사회

2013년 겨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합스부르크왕가와 헝가리 귀족사회>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스만투르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지만, 외세에 대한 저항과 협력을 통해 오늘날까지 정체성을 유지해온 헝가리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고 있다. 11세기 이후 헝가리왕국의 정체을 나타내는 ‘신성한 왕관’의 의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시절 헝가리에서 치러진 대관식, 헝가리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내용들과 헝가리 귀족들이 살았던 모습 등을 보여주고 있다.

<헝가리 왕실의 보물 –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사회>

2013년 겨울 고궁박물관에서 열렸던 <헝가리 왕실의 보물 –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사회> 특별전시회, 합스부르크왕조로 일원이었던 헝가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전시회였다.

헝가리는 우랄산맥 근처에서 거주하던 유목민이 도나우강 유역의 중부유럽으로 진출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외부세력에 대한 유럽의 방패 역할을 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했으나, 16세기 근동지방의 강자로 등장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오스트리아 빈까지 공격해왔던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으며, 17세기 오스만투르크 세력이 약화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헝가리 귀족세력은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차례 독립투쟁을 벌렸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8세기 오스트리아 마리아테레지이지 여왕이 프로이센과 왕위계승 전쟁에 휩쓸렸을 때 여왕을 귀족세력은 여왕을 지지하면서 세력을 인정받았고, 오스트리아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오랫동안 계속된 독립운동으로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 통치기간에 헝가리는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사회 전반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헝가리 왕성이었던 부다와 경제적 중심지였던 페스트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면서 ‘부다페스트’라는 헝가리 수도가 탄생하였다. 이후 1차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오스트리아와 분리되면서 독립국가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다페스트 전경 사진.

부다페스트(Budapest) 헝가리의 수도이자 정치.문화.산업 등 국가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180만 정도의 대도시이다. 1873년 도나우강 서편 부더(Buda)와 오부더(Obuda), 동편 페슈트(Pest)가 합쳐지면서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되었다. 세계문화유신으로 등재된 부다페스트에는 부다성, 마차슈성당 등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 화려했던 합스부르크왕조 시절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헝가리의 역사
헝가리 민족(머저르족)은 우랄 산맥 근처에서 거주하던 유목민족으로, 기원전 500년경 무렵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1세(Istvan I, 재위 1000~1038)는 헝가리를 주변국과 동화시키고자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이교도의 침입을 막아내어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마챠시 1세(Matyas I, 재위 1458~1490년)의 통치시기에는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과 학문 또한 발전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오스만제국의 침입으로 수도 부더(Buda)가 함락되었고, 이후 약 100년 간 오스만제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를 각각 분할하여 점령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헝가리에서 물러난 뒤 약 300년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 시기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독립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 여왕의 통치시기에 접어들면서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던 헝가리의 경제는 점차 회복되었으며, 서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미술과 음악, 문학 분야도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후 지식인드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지속되자 1867년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헝가리는 지금의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를 아우르는 영토를 가지게 되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패전국이 된 헝가리는 1920년 연합국 츠과 트리아농(Trianon) 조약을 맺으며 국토의 70%를 잃었으며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서도 패전국이 되면서 공산화 되었다. 1956년에는 스탈린 독재에 저항하는 민중 혁명으로 많은 시민들을 잃기도 하였으나 1989년 대립 세력 사이의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민주화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어부의 요새’>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인 ‘어부의 요새’이다. 19세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고 있을 때 어부들이 이 요새를 방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헝가리 역사의 주요 사건들>

몽골군의 원정, 오스만 제국의 침략 등 주로 동방과 서방의 경계의 위치한 헝가리의 지리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중부 유럽의 보석, 헝가리
헝가리는 유럽의 중앙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슬로바키아, 북동쪽으로 우크라이나, 동쪽으로 루마니아, 남쪽으로 유고슬라비아.크로아티아, 서쪽으로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등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헝가리의 전체 면적은 93,030㎢이며 국토의 2/3가 온천개발이 가능한 온천국가로 전국에 1000여 개의 온천이 있다. 행정구역은 19개주(Megye), 22개 카운티(Megyei Varos), 1개시(부다페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의 대부분이 머저르족(96.6%)이며, 독일인,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다. 종교는 국민의 67.5%가 가톨릭교이고 개신교 20%, 그리스정교 2.6%이다. 헝가리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하고 있는데 부다페스트의 도나우강 연안과 부더(Buda)왕궁 지구, 언드라시(Andrassy) 대로, 홀로쾨(Holloko) 전통마을, 어그텔레키(Aggteleki)와 슬로바키아 카르스트 동굴군, 퍼논허르마(Pannonhalma)의 베네딕트회 수도원과 자연환경, 호르토바지(Hortobagy)국립공원, 페치(Pecs)의 초기 기독교 묘지, 토커이(Tokai) 와인 지역 역사 문화 경관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문화적 인프라로 국민들의 문화적 소양이 높으며, 헝가리가 배출한 위대한 천재 예술가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문카치 미하이(Munkacsy Mihaly) 등 세계적인 미술가를 배출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가 리스트(Liszt Ference), 음악교수법으로 널리 알려진 코다이 졸탄(Codaly Zoltan) 등을 배출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 “종속과 투쟁,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의 귀족 사회”>

첫번째 전시 주제는 “종속과 투쟁,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의 귀족 사회”라는 제목으로 헝가리 왕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와 관계를 중심으로 주요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신성한 왕관, 헝가리 왕국의 상징
‘신성한 왕관(Szent Korona)’은 ‘성 이슈트반 왕관’이라고도 하는데 홀, 보주, 망토, 검과 함께 헝가리 국왕 대관식 상징물 중 하나이다. 이 왕관은 교황 실베스테르 2세(Pope Sylvester II, 재위 999~1003)가 1000년에 헝가리에 기독교를 처음으로 수용한 이슈트반 1세(Istvan I, 재위 1000~1038)에게 보낸 왕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에 보내온 왕관은 남아 있지 않고 현존하는 왕관은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헝가리 왕들은 12세기부터 대관식에서 이 왕관을 착용했고, 왕관은 1256년부터 ‘신성한 왕관’이라 일컬어졌다. 이 왕관은 헝가리 민족주권의 상징으로서 오직 대관식에서만 착용되었다. 대관식에서 이 왕관을 착용하지 못한 왕들은 정당한 왕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일례로 카로이 1세(Karoy I, 재위 1307~1342)는 대관식을 3번이나 행하였으나, 1310년에 신성한 왕관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헝가리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받았다. 신성한 왕관은 여러 차례 옮겨졌으며 도난 당하기도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왕관 보관 책임자들이 왕관을 소련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군에 위탁했다. 왕관은 미국 연방 금괴 저장소가 위치한 포트녹스(Fort knox)에 보관되었다가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헝가리로 반환되었다. 이후 헝가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00년에 헝가리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졌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의 신성한 왕관(복제). 

11세기에 만들어진 헝가리를 상징하는 왕관으로 대관식에 이 왕관을 착용했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 때 미군에 위탁했다가 1978년 헝가리에 반환되어 지금은 헝가리 국회의사당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반대쪽에서 본 왕관

다른 방향에서 본 왕관

이슈트반 1세(Istvan I, 재위 1000~1038)가 1000년 즉위식 때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왕관이다. 이슈트반 1세의 왕관은 왕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민족주권의 상징물로 여겨져 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왕관 중 하나로 실물은 헝가리 국회의사당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실의 상징(아우구스트 마이어, 1790년),

헝가리인들은 왕관과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을 묘사한 그림들을 많이 남겨 놓고 있다.

1790년에 왕관이 헝가리로 다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판화이다. 1780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요제프2세(Joseph II, 재위 1780~1790)가 헝가리 왕위를 물려받을 때 헝가리 왕관 대관식 의장들을 빈으로 가져갔고, 이후 왕관과 의장물들은 1790년이 되어서야 헝가리로 다시 반환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홀과 보주를 그린 그림(1881년 이후),

홀(오른쪽)은 왕권을 상징하는 손에 잡는 작은 지팡이를 말하며 보주는 신성한 물을 담는 물병이다.

헝가리 왕실의 홀과 보주를 그린 다색 석판화이다. 보주 상부에는 이중으로 된 십자가가 있고, 아르파드(Arpad) 왕가의 문장과 사자 문양이 있는 앙주(Anjou) 왕가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여기에 그려진 보주는 카로이 1세(Karoly I, 재위 1310~1342년)의 재위 기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 상징(18세기말). 왕을 상징하는 주요 의장물들을 그린 판화이다.

왕실 의장인 왕관, 홀, 보주, 망토, 검 등이 그려진 판화이다. 대관식 의장물과 함께 대관식에서 왕의 바로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전령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90년 레오폴트2세(Leopold II, 재위 1790~1792)와 1792년 프란츠 2세(Franz II, 재위 1792~1830)무렵의 대관식에 관련된 그림으로 보인다.<출처:고궁박물관>

망토를 그린 그림(1881년 이후),

라우셔 러요시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색 석판화이다. 여기에 묘사된 망토는 이슈트반1세(Istvan I, 재위 1000~1038)와 왕비 기셀라(Gisela)가 1001년에세케슈페헤르바르(Szekesfervar)에 있는 성마리아 교회에 기부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성한 왕관’을 그린 그림(라우셔 러요시, 1881년),

신성한 왕관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을 복제한 석판화이다.

1880년 ‘신성한 왕관’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을 때, 요제프예술원(Jozsef Art Academy)의 드로잉과 판화교사였던 라우셔러요시(Raouscher Lajos, 1845~1914)가 그린 대관식 의장의 자세한 드로잉을 파리에 있는 피르맹 디도 인쇄소에서 대규모의 다색 석판화로 복제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 상징(에두마르트 구르크, 1830년),

오스트리아의 궁정 화가인 에두아르트 구르크(Eduard Gurk, 1801~1841)의 석판화로 대관식의 왕실 의장인 왕관, 홀, 보주, 검 등이 그려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고난과 영광, 17~19세기의 헝가리 왕조
헝가리를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합스부르크 왕조는 1686년 마침내 수도 부더(Buda)를 탈환했다. 헝가리 왕국의 왕위를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계승하도록 하고 헝가리의 귀족계층은 지방 각 주의 자치권만을 갖기로 하여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에 저항하여 1703년 라코치 페렌츠2세(Rakoczi Ferenc II, 1676~1735)가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18세기부터는 안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명민한 통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왕의 통치시기(재위 1740~1780)에는 헝가리 귀족들이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등 합스부르크에 우호적인 성향을 띠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합스부르크 왕조에서는 헝가리를 견제하고자 다양한 차별정책을 시행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헝가리에서는 세체니이슈트반(Szechenyi Istvan, 1791~1860),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 1802~1894) 등이 합스부르크와 보수 헝가리 왕국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갔다. 1848년에는 헝가리의 위대힌 민족시인 페퇴피 샨도로(Petofi Sandor, 1823~1849)를 중심으로 헝가리 독립 혁명이 일어났으며 혁명이 실패한 이후에도 헝가리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1867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결국 정치.외교.군사 등 모든 면에서 헝가리르 동등한 동반자로 인정하는 ‘대타협(Ausgleich)’을 선언하여 헝가리와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대타협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는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헝가리는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헝가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 또한 높아졌다. 헝가리의 왕도였던 부더와경제적 중심지였던 페슈트(Pest)를 잇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되어 ‘부다페스트’라는 헝가리의 수도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17~19세기 합스부르크-헝가리 왕계도

종속과 투쟁,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의 귀족 사회
헝가리의 귀족제도는 헝가리가 처음 건국된 896년부터 시작되어 100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1222년 언드라시 2세(Andras II, 재위 1205~1235)가 왕에 대한 귀족의 저항권을 보장하는 칙서인 ‘어러니 불러(Arany Bulla)’를 발표하면서 귀족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또한 헝가리 고위 귀족의회에는 전통적으로 헝가리 왕의 승계를 결정하는 권한이 있었으므로 헝가리의 왕실과 귀족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며 헝가리를 통치했다. 17세기 중반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를 전면적으로 통치하게 되자 헝가리 귀족사회는 자신들의 특권과 자치권을 지키고자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귀족들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펼치면서 점차 합스부르크 왕가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발발한 오스트리아 왕위 전쟁에서 헝가리 귀족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에게 충성맹세를 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한 지지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까지 펼쳐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헝가리 압제정책에 대항해 세체니 이슈트반(Szechenyi Istvan, 1791~1860)과 같은 헝가리 귀족들의 독립과 개혁을 위한 투쟁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17~19세기 합스부르크 지배 시기의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 빈의 문화와 예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중요한 국가 행사나 의식 등에서 헝가리의 전통의상 착용을 고수하는 등 헝가리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꾸준하게 노력하였으며, 특히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헝가리의 신성한 왕관’을 직접 수여 받는 대관식 전통은 헝가리 민족의 자존심을 위해 엄격히 지켜나갔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이여, 우리의 황제와 나라를 지켜주소서. 합스부르크의 왕관으로 제국이 통일될 것을 믿습니다. ” –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시대 국가 –


대관식 의상을 입은 페르디난트 5세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신성한 왕관을 쓰고 의장을 갖춘 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왕관을 쓰고 대관식 망토를 두른 페르디난트 5세가 말을 타고 대관식 언덕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다색 판화 연작이다. 페르디난트 5세는 1830년 36세의 나이로 헝가리 국왕에 즉위했다. 과학, 식물학과 음악에 뛰어났으며 5개국 언어에 능통했다. <출처:고궁박물관>


대관식 의상을 입은 루드너이 샨도르,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을 주관했던 주교를 그린 그림이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을 주관했단 에스테르곰의 대주교 루드너이 샨도르를 그린 그림으로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다색 판화 연작 중 한 작품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의상을 입은 부호 에르되디 커예탄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에 참석했던 헝가리 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헝가리 북부 버러슈드(Varasd)의 지사이자 궁내 장관이었던 에르되디 컹예탄(Erdody kajetan, 1795~1856) 백작의 모습이다. 1830년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행사에 참여했던 고위 귀족들의 모습을 도해한 다색 판화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전통의상을 입은 헝가리 귀족 여성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에 참석했던 헝가리 귀족 여성을 그린 그림.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다색 판화 연작 중 한 장면으로 대관식 예복을 입고 있는 헝가리 귀족 여성들을 그린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프란츠 2세의 대관식 맹세 (제바스티안 만슈펠트, 1792년), 대관식 장면을 그린 그림.

1792년 6월 6일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진행된 프란츠 2세(Franz II, 재위 1792~1830)의 대관식 장면을 그렸다. 오스만제국의 헝가리 지배 시기 이후 1867년까지 요제프2세(Joseph II, 재위 1780~1790)를 제외한 헝가리 왕의 대관식은 모두 브라티슬라바(포조니 Pozony)에서 거행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에드아르트 구르크, 1830년)

페르디난트 5세에게 선물을 바치는 행렬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페르디난트 5세에게 대관식 예물을 바치기 위해 늘어선 행렬을 그린 것이다. 여러 도시와 자치주의 중요한 상업회사와 귀족들은 가장 좋은 상품을 왕에게 선물로 바쳤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다색 판화 연작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연회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다색 판화 연작 중 한 장면이다. 대관식의 마지막 의식인 연회 장면을 그렸다. 왕족, 외교관을 비롯하여 각 영지의 귀족들이 모두 참여하는데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앉게 되고 규칙에 따라 접대 순서가 정해졌다. <출처:고궁박물관>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연회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에 이어지는 연회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대관식의 연회 장면으로 긴 탁자가 마련된 연회장에서 황제 프란츠 2세와 그의 왕비가 뒤를 따르는 젋은 왕 페르디난트 5세를 위해 건배를 하고 있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다색판화 연작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대중연회 (프란츠 볼프, 1830년), 대관식 후 일반 민중들의 연회장면이다.

대관식 이후에 벌어지는 대중 연회 장면으로 왕의 대관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을 그렸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다색 판화 연작에 포함된 작품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관식 맹세 (빈젠츠 가츨러,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재위 1867~1916)의 대관식 석판화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헝가리를 동등한 협력자로 인정하고 1867년 ‘대타협(Ausgleich)’을 선언,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선포하였다. 이후 부다페스트 마챠시 성당에서 헝가리 왕으로 즉위, 절대군주로 군림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성한 왕관’의 귀환 모습이 그려진 부채(1790년),

왕관을 되돌려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흰색 실크로 만들어진 부채로 중앙에는 헝가리의 왕관이 놓여 있고, 왕관을 지키는 네명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다. 1790년 헝가리 왕관을 되돌려 받은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이 시기에 제작된 부채들에는 왕관의 반환과 관련된 그림이 그려진 경우가 많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성한 왕관’의 귀한 모습이 그려진 부채(1790년),

1790년 왕관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부채이다. 왕관을 수호하고 있는 그림과 함께 중앙에는 “WO SIE VON IEHER WAR(영원히 있었던 곳으로)”라는 글이 적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마리아 테레지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능한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6세(Karl VI, 재위 1711~1740)의 장녀이자 유일한 직계 자손이었다. 부왕인 카를6세의 생존 당시에 여성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내용의 ‘국사조칙(Pragmatische Sanktion)’이 제정되어 1740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바이에른, 프로이센과 같은 유럽 열강이 이 상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마리아 테리지아는 자신의 영토 가운데 가장 번창한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을 침략해온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후에 프리드리히 대왕)와의 협상을 거부하여 카를 6세의 상속권을 둘러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1741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의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린 아들을 안고 헝가리 귀족들 앞에서 연설을 하여 헝가리 귀족들의 충성맹세를 받았고, 왕위 계승 전쟁에 필요한 대대적인 군자금과 병력을 얻었다. 이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유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1세(Franz I, 재위 1745~1765)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인정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를 16명이나 두었는데 그 중 요제프2세(Josef II, 재위 1765~1790), 레오폴드2세(Leopold II, 재위 1790~171792)가 황제로 즉위하였고, 막내 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말을 탄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 (마르틴 판 마이텐스,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자로 헝가리 귀족을 지원을 받아 왕위계승 전쟁을 통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관식 장면을 그린 것이다. 헝가리의 군주는 국가를 상징하는 언덕을 말을 타고 넘은 후 서약을 하고, 칼로 언덕을 사방으로 가르는 의식을 치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임신한 몸으로 대관식이 있기 몇 주 전부터 승마연습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헝가리 대신들 (19세기 초),

1741년 9월 11일 브라다슬라바의 의회에서 헝가리 대신들이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지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브라다슬라바의 의회에서 헝가리 귀족들에게 연설을 하여 충성 맹세를 받은 후 군자금과 병력을 얻었다.<출처: 고궁박물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자녀들 (마르틴 판 마이텐스 화파, 1740년대 말),

헝가리식 복장을 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다섯자녀들의 모습이다. 화면 중앙에는 요제프2세가 있고, 그 좌측에는 마리아 안나, 뒤쪽에는 가를 요제프가 있다. 오른쪽에는 마리아 엘리자메트 요제프가 꽃을 들고 있고, 뒤에는 마리아 아멜리아가 있다.


요제프 2세의 황태자 시절 의상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인 요제프2세(Joseph II, 재외 1780~1790)의 헝가리식 연회 정장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자손들은 많은 회화와 조각작품에서 헝가리식 복장을 하고 있다. 헝가리 귀족들의 신임을 얻는 동시에 여왕의 자손이 헝가리의 왕위 계승자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언드라시 백작 (요한 요제프 라우흐, 1848년 이후),

헝가리의 정치가인 언드라시 줄러(Andrassy Gyula, 1823~1890)를 그린 석판화이다. 언드라시는 1848년 헝가리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파리로 망명하였고, 10년 후 고국에 돌아와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867년 헝가리의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장관도 역임했다. 엘리자베트ㅡ 왕비와 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대타협에 큰 공헌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엘리자베트 왕비, 헝가리 왕국의 뮤즈
‘시씨(Sissi)’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엘리자베트 왕비(Elisabeth von Wittelsbach, 1837~1898)는 17세의 나이에 합스부르크의 황제 프라츠 요제프1세(Franz Joseph I, 재위 1848~1916)와 결혼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왕비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왕가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Sophie of Bavaria)와 자녀 양육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헝가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857년 처음 헝가리를 방문한 왕비는 열렬한 환영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 헝가리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많은 시간을 헝가리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헝가리어 선생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이더 페렌치(Ida Ferenczy, 1839~1929)의 영향을 받은 왕비는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헝가리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도록 설득하였고,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67년 헝가리 마챠시 성당에서 거행된 프란츠 요제프1세와 엘리자베트의 대관식에서 왕비는 헝가리 전통 의상을 입고 참석하였고, 절세의 미모를 자랑하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에 헝가리인들은 더욱 열광하였다. 즉위 기념으로 선사 받은 괴될뢰(Godollo) 왕궁은 이후 왕비가 주로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1889년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한 이후 왕비는 검은 옷만 입고 생활하였으며, 노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부채나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등 우울한 일상을 보냈다. 이후 1898년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의상을 입은 왕실 가족 (1867년경),

프란츠 요제프 1세 가족의 모습을 그린 석판화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함께 엘리자베트 왕비와 기젤라(Gisela), 루돌프(Rudolf)가 헝가리 의상을 입고 있으며, 가장 어린 마리아 발레리아(Maria Valeria)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헝가리 의상을 하고 헝가리를 배경으로 한 왕실 가족 그림은 헝가리에 대한 유화정책에서 비롯된 정치적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괴될뢰의 왕궁 (루트비히 로흐보크, 19세기 중엽),

괴돌뢰(Godollo) 성을 그린 강판화이다. 괴될뢰 성은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왕비에게 헝가리의 왕과 왕비 즉위 기념으로 헌상되었다. 특히 엘리자베트 왕비는 엄격한 빈의 궁정 생활에서 벗어나 이 성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출처:고궁박물관>

대관식 에복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 (아돌프 다우트하게, 19세기 후반), 헝가리 의상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 (프라츠 볼프, 19세기 후반),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트 왕비 (아돌프 다우트하게, 19세기 후반)

대관식 에복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 (아돌프 다우트하게, 19세기 후반), 헝가리 대관식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린 석판화이다. 작가는 오스트리아인인 아돌프 다우트하게(Adolf Daughage, 1825~1833)로 당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초상 석판화가였다. 헝가리 의상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 (프라츠 볼프, 19세기 후반), 세밀화 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요한 리하르트 슈바거(1822~1880)의 작품을 석판화가인 프란츠 볼프(1795~1859)가 모사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왕비는 대관식 드레스와 유사한 헝가리식 복장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트 왕비 (아돌프 다우트하게, 19세기 후반),1850년 경의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린 석판화이다. 전설적인 미모로 유명했던 왕비는 헝가리인들에게 열렬한 숭배를 받았으며, 화가들은 그녀를 고대 조각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이상화시켜 그렸다. <출처:고궁박물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초상 (리슬로 펠뢰프 엘레크, 1899년),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1830~1916)가 69세 되던 해인 1899년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1889년 외아들인 황태자 루돌프가 자살하자 큰 충격을 받았으며 1898년 9월10일 아내 엘리자베트마저 제네바에서 암살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헝가리 화가인 라슬로 퓔뢰프 엘레크(Laszlo Fulop Elek, 1869~1937)가 그린 이 초상화는 자연스러운 포즈와 대상의 심리적인 면을 잘 포착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황제는 거의 제복 차림을 지냈다. 훈장은 달지 있지 않으며 그의 팔에 보이는 검은 리본은 사랑했던 아내 엘리자베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나타낸다.


엘리자베트 왕비 초상 (코퍼이 요제프 아르파드, 19세기말),

헝가리 화가 코퍼이 요제프 아르파드(Koppay Jozsef Arpad, 1859~1927)가 그린 이 초상화는 엘리자베트 왕비의 사후, 남편인 요제프 1세가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엘리자베트으 시중을 들었던 마리아 페스테틱스(Maria Festetics)백작부인을 위한 선물로 마련된 것이다. 왕위 후계자였던 아들 루돌프가 죽고 난 후 왕비는 항상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 그림에서도 왕비는 애도를 뜻하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왕실의 보물: 합스부르크왕가와 헝가리 귀족 사회
헝가리는 유럽의 중앙부에 위치한 나라로, 헝가리 민족이 현재의 위치에 정착한 후 10세기경 왕조를 이루게 되었다. 지형적으로 서유럽의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어 아시아와 서유럽의 강대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으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발전을 지속하여 19세기에는 유럽의 가장 강성한 국가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헝가리 국립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합스부르크왕가가 헝가리를 통치하였던 17~19세기의 화려한 왕실의 보물들이 소개된다. 비록 헝가리인 스스로가 독자적으로 왕조를 세우지 못했지만 독특한 헝가리의 문화와 유럽대륙 최고의 대제국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한 문화가 조화된 이 시기의 유물들은 복잡한 중부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헝가리는 지정학적 특징으로 인해 주변국의 침략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 왔으며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굴곡진 근현대사를 겪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 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헝가리의 역사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