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왕경인 경주는 원래 신라6부가 자리하던 곳으로, 대경(大京)이라고 불리었다. 오늘날 경주 도심의 지형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남쪽에는 남천(南川), 북쪽에는 북천(北川, 알천), 서쪽에는 형산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토함산을 중심을 산맥이 가로막혀 있는 방어에 용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신라 왕경은 6세기 초반 바둑판 형태의 도로망 구축을 통한 도시계획을 시작하여, 8세기 경에는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경에는 금성(金城), 월성(月城)과 같은 성(城)과 궁궐, 관청, 사찰, 귀족들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인구는 18만여 호(戶)에 이르렀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발굴.조사결과 등을 반영하여 재구성한 신라 왕성 경주 모형(경주박물관).
남쪽의 남천과 북쪽의 북천 서쪽이 형산강이 천연 해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안쪽에 궁궐, 사찰, 귀족들의 대저택, 민가 등이 들어서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 경주의 인구는 약18만호에 이르는 대도시였다.
신라 왕경에는 금성(金城), 월성(月城) 등의 성(城)과, 대궁(大宮), 양궁(梁宮), 동궁(東宮), 북궁 등의 궁(宮)이 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전성기의 왕경은 인구가 178,936호였고, 1,360방(坊)과 55리(理)로 구성되었으며, 부유한 대저택인 금입택(金入宅)이 35개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경주 시내의 대형 능묘 발굴이 일단락된 뒤, 신라 왕경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성격의 유적을 체계적으로 조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1970년대 중반부터 장기간에 걸쳐 월지, 황룡사터, 월성해자(月城垓字), 명활성 등 대형 유적을 발굴함에 따라 그 실체가 하나씩 드러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생활유적도 발굴되어 왕경의 구조와 특징 등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경주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2012년 국립경주박물관의 남쪽 부지에서는 도로와 함께 방(坊)의 흔적이 확인되었고, ‘辛審東宮洗宅(신심동궁세택)’과 ‘東宮衙(동궁아)’란 글씨가 새겨진 그릇도 출토되어 왕경의 연구에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오래부터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의 발굴을 시작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금관이 발견되 금관총을 조사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 김부식,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 6년(880) 9월9일 –
<경주 월성(사적)>
신라 왕경은 70년대 이후 월지(안압지), 황룡사지, 월성해자, 명활성 등의 유적지 발굴.조사를 통해 그 규모와 특징 등이 확인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도심 쪽샘지구를 비롯하여 여러 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월지에서는 연못에 묻혀 있던 기와를 비롯한 건축부재와 다양한 생활용품 등이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농지로 사용되고 있던 황룡사지 부근 유적에서는 가옥.담장.우물.배수구.도로 등이 확인되었다.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모형.>
월지는 도교사상을 반영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연못으로 1970년대 발굴.조사 결과 많은 생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월지에 있던 궁궐은 국왕이 거처했던 월성내 궁궐과는 달리 태자가 거처했다고 하며, 동궁으로 부른다. 경복궁 경회루처럼 사신을 비롯하여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용얼굴무늬 기와(7~8세기),
용얼굴무늬 기와(7~8세기).
당시에 성행했던 도교적인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
월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용얼굴무늬 기와는 용의 얼굴을 정면에서 묘사한 것입니다. 이마에 ‘王’자를 새긴 것도 있습니다. 테두리에는 구슬무늬 등을 반복적으로 돌리고, 옆면에 덩굴무늬를 새긴 것도 있습니다. 뒷면에 세로형 손잡이를 달기도 합니다. 녹유를 발라 구운 특별한 것도 있습니다. 용얼굴무늬 기와는 용도에 따라 팔작지붕의 마루 끝에 붙이는 마루, 귀마루 끝에 잇대는 사래로 구분됩니다. 마루용은 기왓등에 얹도록 아래쪽 중심부를 반원형으로 파내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연꽃무늬수막새(7~8세기).
서역에서 전해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꽃무늬수막새
보상화무늬 전(7~8세기).
불교와 함께 전해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보상화가 표현된 전돌이다. 보상화는 연꽃을 모티브로 재창조된 상상의 꽃으로 페르시아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보상화무늬 전돌
사슴을 표현한 전돌
전돌 옆면에는 사슴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보상화무늬 전돌.
보상화무늬 전돌
보상화무늬 전돌
보상화무늬 전돌
건물 바닥에 깔았던 전(塼)입니다. 윗면에는 중앙의 연꽃을 모티프로 구성한 상상의 꽃인 화려한 보상화무늬를, 옆면 한쪽에는 덩굴무늬 속에 두 마리의 사슴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윗면의 네 모서리에 1/4씩 새겨진 무늬는 다른 전들과 맞물려서 하나의 완전한 무늬를 이룹니다. 신라 통일기의 보상화무늬 전은 비슷한 시기 중국의 것보다 의장이 더 화려하고 정치하여 완벽한 구성미를 자랑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수막새(7~8세기).
수막새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다양한 상징을 갖은 문양을 표현하고 있다.
상상의 동물이 표현된 수막새
수막새 가운데에는 연꽃무늬 외에 새를 비롯한 상상의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동.식물이 표현된 수막새
꽃무늬가 표현된 수막새
수막새
누각무늬 전, 8세기, 울산 농소동.
통일신라시대 목조건축물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옆면에 정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 2채가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한 환상적인 장면을 새겼습니다. 건물 좌우에 몇 겹의 얇은 구름을 표현하여 화면에 공간감과 깊이감을 더하였습니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신라 건물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봉황무늬 전, 7~8세기, 전 인용사터
월성 서남쪽의 인용사터로 알려져 있는 절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화면 중앙에 봉황으로 추정되는 긴 꼬리를 지닌 새가 날개를 펴고 있고, 그 주변에는 식물무늬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보상화무늬가 주종을 이루는 신라 통일기 전의 무늬로는 이례적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청동 광명대, 7~8세기, 전 인용사터
광명대는 기름 등잔과 초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등촉기구입니다. 인용사로 알려진 절터의 서쪽 연못 바닥에서 신라 통일기 수막새와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세 개의 짧은 다리에 원반형 받침을 올려놓고 그 위로 대나무 모양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출토 지점이 명확한 국내 최초의 광명대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 연봉오리모양장식, 7~8세기, 월지
월지와 월성 해자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크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릅니다. 받침 둘레의 구멍에 못으로 고정시키는 것과, 긴 철촉을 꽂는 2가지 형식이 있습니다. 목제 난간의 장식에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문고리, 8~9세기, 월지
용 또는 사자의 얼굴을 같은 틀로 주조하여 도금한 것으로서 여러 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입에는 둥근 고리를 걸어서 잡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보상화무늬로 만든 문고리도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동 연봉오리 모양 장식, 7~8세기, 월성
동궁과 월지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안압지)는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에 완성하였습니다. 헌덕왕(재위 809~826년) 때 태자를 월지궁에 거처케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월지궁은 곧 동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75년부터 1976년에 걸쳐 일부 발굴된 동궁과 월지에서는 ‘儀鳳四年(679년)’, ‘朝露二年(680년)’이 새겨진 기와와 전(塼)이 발견되어 문무왕 때에 조성된 시기를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토품 가운데에는 목간, 목제 주령구, 목선, 목조건물 부재 등의 유기질 유물들이 다량 포함되어 주목을 끌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동궁아’가 새겨진 단지, 7~10세기
‘신심동궁세택’이 새겨진 청동접시, 7~10세기, 경주박물관 남쪽 부지
나무자, 8~10세기, 국립경주박물관 남쪽 부지
길이를 재는 자입니다. 한쪽은 눈금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먹으로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짧은 눈금을 9새 긋고 10번째는 길게 그었습니다. 먹글씨는 ‘一房介□□□□’로 확인되나, 완전한 판독은 어렵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이형토제품, 7~10세기, 국립경주박물관 남쪽부지,
일부만 남아 있어 정확한 용도를 알 수는 없으나, 꽃잎을 솟아오른 형태로 만든 것으로 보아 불탑의 상륜부에 올라가는 앙화(仰花)의 일부로 추정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얼굴무늬 수키와, 679년경, 국립경주박물관 남쪽 부지.
선으로 된 무늬 사이사이에 웃는 얼굴무늬를 배치하였습니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표정에서 신라인들의 심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의봉사년개토’가 새겨진 암키와(679년경, 경주박물관 남쪽부지), ‘□왕사우’가 새겨진 암키와(7~10세기, 경주박물관 남쪽 부지)
기와에 쓰여 있는 글자.
네모난 칸 안에 ‘儀鳳四年皆土(의봉사년개토)’가 쓰여 있습니다. 의봉은 당의 연호로 676~679년이며, 의봉사년은 679년입니다. 이 기와는 월지, 사천왕사터, 나정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어 7세기 후반 왕경에서 도시 정비가 이루어졌던 상황을 보여줍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기와에 쓰여 있는 글자.
위쪽에 ‘□王寺右’가 쓰여 있습니다. 왕실과 밀접한 사찰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 남쪽 부지 발굴조사
신라 왕궁인 월성의 남쪽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의 남쪽 확장부지가 2011년 11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발굴되면서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습니다. 먼저, 도로와 함께 신라왕경의 한 구획인 방(坊)이 드러나 방리제(坊里制)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방의 안쪽에는 건물지, 담장, 배수로, 우물 등의 생활유구가 조사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건물지 적심 주변에서 ‘신심동궁세택’이란 글씨가 바닥에 선각된 청동접시가 발견되어 주목됩니다. 아울러 우물 내부에서는 ‘東宮衙’가 새겨진 항아리가 출토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궁아는 752년(경덕왕11)에 설치된 관청이었습니다. 이 유적이 태자궁인 동궁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경주박물관 우물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우물이 제사와 관련된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나무손잡이
뼈장신구, 나무빗
청동 뒤꽂이
쇠손칼, 숫돌
두레박
연꽃무늬 수막새
접시
병, 호(壺)
도장무늬 굽다리 바리
‘용왕’이 새겨진 목간
우물 제사와 관련있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잠정적인 판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본래신에세 관리인 □□가 지금 아뢰기를 “용왕이 이 때 하신 시책을 베푼 까닭에, 밝게…”」
이와 관련하여 동궁관(東宮官) 용왕전(龍王典)에 대사(大舍)와 사(史) 각각 2명을 두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참고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우물, 또다른 세상과의 접점
고대 사회에서 우물은 단순한 식수 공급원뿐만 아니라 탄생과 성장을 가능케 하는 생명력의 근원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신라의 건국신화는 이러한 우물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시조 박혁거세(재위 기원전 57~ 기원후 4년) 나정(蘿井) 옆 숲속에 놓인 금궤 안에서 발견되었고, 그의 부인인 알영은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에서 태어났습니다. 신라인들은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용궁이나 저승과 같은 미지의 세계가 연결되는 통로를 상상하였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관내에서는 2개의 통일신라 우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월지관 앞쪽에 있던 우물에서는 토기, 기와, 목기, 동물뼈 등과 함께 10살 가량의 어린아이 뼈가 출토되었습니다. 신라미술관 근처의 우물에서는 토기, 기와, 금속제품, 나무두레박, 나무빗 등 수백 점의 물건이 수습되었습니다. 이 우물들은 경주 월성의 동남쪽에 위치한 점, ‘南宮之人’ 글자가 찍힌 기와편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중요한 장소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울러 ‘龍王’이 쓰인 목간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제사나 의례와 관련된 장소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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