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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부 관아, 화성행궁(사적) 봉수당과 장락당

화성행궁은 국왕이 국방을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던 행궁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이곳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참배할 때 머물던 곳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읍치였던 화산 주변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치에 읍치에 있던 관아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수원화성을 축성하게 된다. 화성행궁은 수원유수가 업무를 보는 관아건물이지만 그 규모가 562칸으로 궁궐의 절반 정도이다. 정조는 화성행궁을 크게 지은 것은 왕위를 순조에게 양위하고 이곳에서 노후를 보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는 상왕이 머무는 창덕궁과 같은 이궁(離宮)의 성격을 갖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행궁내에는 국왕이 머무는 공간이자 동헌이자 정전(正殿) 성격을 갖는 봉수당과 침전 성격을 갖는 장락당, 수원유수가 거처하는 내아에 해당하는 복내당과 유여택, 관아에서 연회가 열리는 공간인 낙남헌, 실무관헌들이 근무하는 공간인 외정리소, 집사청, 비장청, 서리청과 장용영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인 남.북군영 등이 있다.

<화성행궁의 중심인 정전에 해당하는 봉수당>

수원유수부 동헌으로 지어졌지만 일반적인 관아와는 달리 추녀마루 잡상, 박석을 깔아 놓은 삼도, 월대 등 궁궐 전각에서 볼 수 있는 국왕을 상징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수원 화성행궁 모형>

봉수당(奉壽堂), 화성행궁의 정전역할을 하는 공간이자 수원유수부 동헌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수원유수부 동헌건물로 원래의 이름은 정남헌이었다 한다. 정조는 화성행차시 이 곳에 머무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정조가 순조에 양위한 후 상왕으로 이곳에 머물 생각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 8칸의 대형 건물이지만, 월대는 궁궐건물 전각보다 낮고, 지붕 귀마루에 잡상을 올려놓음으로써 궁궐건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화성행궁은 관아건물로 지어졌고, 봉수당은 공식적으로는 수원유수가 근무하는 동헌이지만 실제로는 국왕을 상징하는 봉수당은 비워놓고 내아에 있는 유여택을 동헌 건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부터 있던 화성행궁 건물은 아니고 1997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봉수당에서 정조대왕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비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렸다고하며 이 곳에 그 모습들을 재현해 놓고 있다.  봉수당(奉壽堂)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원래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다.

<봉수당 출입문인 중양문(中陽門)>

가운데 정문과 좌.우에 협문을 두고 있는 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봉수당 마당>

중양문을 들어서면 국왕이 잠시 머무는 행궁 정전답게 박석을 깔아 놓은 삼도가 봉수당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는 다른 관아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이다.

<화성행궁 봉수당>

앞면 8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침전 건물로 지어진 장락당과는 건물 앞.뒤로 복도가 연결되어 있다. 이는 다른 관아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건물 가운데 2칸은 국왕이 머물거나 수원유수가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며,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수원유수부 동헌이지만 실제로는 국왕을 위한 공간이었다.

<대청마루>

봉수당 가운데 대청마루에는 국왕이 집무를 보는 편전 공간을 연출해 놓고 있다.

<봉수당 왼쪽편 방>

을묘원행시 진찬연이 열렸을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을묘원행시 이곳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정조는 ‘만년의 수를 받들어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면서부터 이 건물이 봉수당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봉수당 앞 월대>

<복도>

봉수당 앞쪽에 반칸 정도 복도를 마련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봉수당 마당 행각에 전시해 놓은 진찬 모형>

1795년 화성행궁에서 열렸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진찬 모형 설명
1795년(정조19) 윤 2월13일 화성행궁에서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성대하게 벌어졌다. 서울의 궁궐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려하고도 기품있는 궁중 연회가 이때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연행되었다. 현선도, 몽금척, 하황은, 포구락, 무고, 아박, 향발, 학무, 연화대, 수연장, 처용무, 첨수무, 검무, 선유락 등의 궁중 연회 종목들이 회갑잔치의 화려함을 장식하였다. 앞에 연출된 것은 이때 연행된 궁중연회 중에서 무고와 선유락 연행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선유락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채색을 꾸민 배를 가운데 놓고 여러 기녀들이 닻줄을 끌고, 배를 감으며 추는 춤이다. 봉수당 앞 오른쪽에 정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앞뜰엔 혜경궁의 친척들인 의빈과 척신들이 앉아 있다. 봉수당의 섬돌에 놓인 헌선도를 비롯해 앞뜰에 놓이 화려한 소품들이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움과 품격을 한껏 나타낸다. <출처:수원시청>

<관아 동헌 마당에 해당하는 봉수당 마당>

마당에는 실무 관헌들이 집무를 공간인 행각이 많지 않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전통 공연>

봉수당(奉壽堂)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으며 정조가 수원행차시 머물렀던 곳이다. 평상시에는 수원유수부(한양을 방위하는 거점도시의 역할을 하였으며, 현대의 광역시 규모)의 동헌으로써 유수(현대의 도지사급)가 집무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789년(정조13) 9월25일 완공되었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규모로 증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출처:수원시청>

장락당(長樂堂), 왕비의 침전으로 준비된 공간

화성행궁 장락당은 행궁의 침전으로 쓰였던 건물로, 봉수당 남쪽에 세워졌다. 정조가 화성을 행차할 때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정전이자 편전건물인 봉수당과 연결되어 있으며, 행궁으로써 많은 방을 두고 있지는 않다. 정조가 행차할때는 혜경궁 홍씨가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왕비가 머무는 공간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장락당은 수원유수의 처소로 마련한 내아 건물인 복락당과 인접해 있다. 복락당에 왕비를 수행했던 상궁,나인들이 머물면서 행사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룡관>

장락당을 출입하는 바깥문으로 2층누각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2층에는 누마루가 있고 그 아래로 출입하는데 지락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있다.

<장락당>

화성행궁 장락당은 앞면 5칸 규모의 크지 않은 건물로 봉수당과 연결되어 있다. 장락궁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장락궁이라는 이름을 짓고 직접 편액을 썼다고 한다.

<장락당 온돌방>

<침소에 들기 전 혜경궁 홍씨>

장락당이 지어진 다음해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 혜경궁 홍씨가 실제로 이곳에서 머물렀다. 침소가 차려진 혜경궁 홍씨 방을 연출한 공간이다.

<복도>

침전인 장락당과 편전이자 동헌인 봉수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편전과 침전이 직접연결되는 것은 화성행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장락당 앞 마당>

<봉수당 뒷마당>

화성행궁의 중심건물인 봉수당과 장락당 뒷편으로는 넓은 마당과 행각들이 준비되어 있다. 국왕 행차시 수행했던 내시를 비롯한 실무 수행원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행각 내부>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의 행각에 위치한 공간으로 환관이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장면과 환관이 서책을 보고 있는 장면을 재현해 놓고 있다.

<뒷마당에서 본 장락당>

<뒷마당에서 본 봉수당>

<봉수당 북쪽편 실무관헌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보이는 행각들>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과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에서 머물 때를 위해 1794년(정조18) 화성축성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장락당과 봉수당의 두 건물을 서로 통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다른 건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이며 1795년(정조19) 을묘원행 때에는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 머물렀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되었다. <출처:수원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