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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공화춘, 화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짜장면박물관

짜장면박물관은 인천시 중구 선린동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옛 공화춘 건물에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중국요리점인 공화춘(共和春)이 있던 곳이다. 박물관에는 임오군란때 청나라 군대와 함께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정착했던 화교들의 역사와 오늘날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는 짜장면의 역사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전시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1층에는 1960년 공화춘 주방을 재현하고 있다.

공화춘건물은 중국 호텔인 주점(酒店)으로 1908년에 지어졌다. 건물은 중정을 갖춘 지상의 2층의 건물로 구운벽돌로 외장을 마감하고 있다. 공화춘은 1912년 산동성 출신 화교인 우희광이 개업하여 1883녀까지 운영되었다. 공화춘(共和春)이라는 이름은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공화국의 봄’이라는 의로 지어졌다. 공화춘은 1970년대까지 인천지역에서 유명한 중국요리점이었다. 짜장면을 이곳에서 처음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급 요리점이었던 곳이다. 2012년 옛 건물을 복원하여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지금은 짜장면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중국요리점인 공화춘 건물.

1908년 중국호텔인 주점(酒店)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구한말 산동성 장인들이 참여하여 지은 중국풍의 근대식 건축물이다.

공화춘 현판
공화춘 현판은 짜장면박물관 건물이 중국 음식점 공화춘으로 사용되던 시절 건물 입구 외벽에 걸려 있던 유물이다. 제작 연대가 1950년대 이전으로 추정되는 현판에는 각가 ‘共和春(공화춘)’, ‘特等料理(특등요리)’, ‘包辦會席(포판회석, 연회석완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원래는 일반적인 현판처럼 비스듬히 걸려 있었으나 1960년대 말 건물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벽면에 직접 부착하였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되어 훼손이 심한 것을 수습하여 보존 처리하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공화춘 현판.

짜장면 박물관 2층.

홍콩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중국요리점 2층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화춘 주식증서, 1914년, 1922년

공화춘 회계장부(1914~1949년), 공화춘 식대 계산서(1961년)

제1전시실, 짜장면의 탄생, 개항기 인천항의 풍경

한국 최초의 화교사회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통틀어 화교(華僑)라 일컫는데, 현지에서 태어나 현지 국적을 가진 2세, 3세는 화인(華人)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의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 때 광동서 수사제독 오장경(吳長慶)의 군대를 따라 온 상인 40여 명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교역을 한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이 해 중국과 수륙무역장정(水陸貿易章程) 체결 이후 이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청국은 1883년 말부터 영사업무를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인천에 많은 중국인들이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1884년에는 엣 세관 뒤편에 집을 짓고 식료품, 잡화류 등의 수입과 해산물류의 본국 수출에 종사하였고, 외국 선박이 입항하였을 때 식료품과 식수를 공급하였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인천 지역의 화교 사회는 가장 먼저 상업 이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어 갔으며 점차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1900년 전후 의화단사건으로 중국의 산동성 일대가 전라에 휩싸이자 중국인들이 대거 한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는데, 주로 인천을 거주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화교들의 본거지가 되어 서울과 함께 양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인천영사관에서 발행한 화교여권(1934년)

청국조계지
일본 전관조계에 이어 1884년 청국 전관조계가 설정되었는데, 현재의 선린동 일대 구릉지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약 5,000평이었다. 조계의 설정 이후 화교의 이주가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대한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이주자들이 급증하여 애초에 설정된 조계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1887년 한국인이 거주하는 삼리채(三里寨)에 새로운 거주지를 확장하였다. 지금의 내동에서 경동을 거쳐 싸리재로 뻗어 있던, 당시의 경인가도 양측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청국조계지는 급격히 위축되어 점차 잡거지가 되어갔고, 일제강점기에 조계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1914년 4월1일 지나정(支那町)이라는 이름으로 인천부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화교와 세자루의 칼
화교들이 외국에 정착을 시작할 때면 세 자루의 칼(三把刀)이 유일한 그들의 생계 수단이었다. 음식점과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칼인 육도(肉刀)와 채도(菜刀),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가위인 전도(剪刀),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면도칼인 체도(剃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화교들이 음식점, 양복점, 이발소에 주로 종사하였음을 말해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화교의 이발도구 삭도(削刀), 1920년대

짜장면을 먹는 노동자, 쿨리(Coolie)
1890년대를 전후하여 인천의 부둣가는 외국과의 무역이 한창이었다. 배에서 내리고 싣는 물건을 나르기 위해 고용된 수많은 짐꾼과 인력거꾼이 필요하였는데, 대부분 산동지방 출신의 노동자인 쿨리였다. 이들은 별다른 재료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의 메뉴인 짜장면을 먹었는데, 이들을 상대로 손수레 노점상이 하나 둘 생기면서 ‘짜장면’의 보급이 시작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짜장면의 먹는 인천항의 중국인 노동자.

짜장면이 실제로 널리 보급된 것은 춘장이 상품화되고 혼분식장려운동이 있었던 해방 이후이다.

제2전시실, 1930년대 공화춘과 짜장면

공화춘의 옛 모습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청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중국 음식점들이 생겨 났으며 이때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짜장면이 탄생하였다. 공화춘은 신해혁명 후 ‘공화국천년의 봄’을 맞는다는 의미로 1912년에 문을 연 중국음식점으로 짜장면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원래 공화춘은 현재 건물의 동쪽부분(동원)만을 사용하였으나,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1968년경 서쪽 건물(서원)을 매입.개보수하여 1983년 폐업때까지 사용하였다. <출처: 짜장면박물관>

문화재로 지정된 공화춘 건물 모형.

가운데 마당을 두고 있는 2층 건물로 벽돌로 지었다. 대표적인 중국풍 근대건축물이다.

1968년경 공화춘 2층 접객실의 옛모습.

상당히 고급스러운 중국요리점이다.

젓가락 이야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젓가락은 필수적인 식사도구이다. 중국에서는 은나라때부터 사용하였고 하며, 재료는 참대나무로부터 뼈, 옥, 은 등 다양하였다. 중국 북방에서는 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많이 쓰고, 남방에서는 참대젓가락을 많이 사용한다. 나무젓가락은 보기가 좋으면서 값이 싸고, 쉽게 부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밖에 상류층과 고급 음식점에서는 상아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전의 중국 통치자들은 금, 은 젓가락도 사용하였고, 특히 황제들은 독살을 염려해 은 젓가락을 많이 사용하였다. 젓가락의 모양과 크기, 색깔도 용도에 따라 다양한데, 음식을 굽거나 삶을 때는 긴 젓가락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여러가지 색깔의 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남자용과 여자용을 구별하기 위해 크기를 달리하고, 날것과 익힌 것을 따로 집는 젓가락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결혼식 등 좋은 날에는 붉은색 젓가락을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금속재질이며 중국과 일본의 중간크기이다. 김치와 채소 같은 음식을 집기 편하도록 납작하게 생겼다.

중국의 재질은 나무이며, 큰상의 중앙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긴형태이다. 또한 기름진음식을 집기 편하게 가장자리가 뭉뚝하게 생겼다.

일본의 재질은 주로 나무이며 작은 독상에 놓인 음식을 집기 용이한 짧은 형태이다. 국수와 해산물을 집기 편한 끝이 뽀족하게 생겼다. <출처:짜장면박물관>

공화춘 젓가락, 1960년대

화교의 고향
인천 화교들은 산동성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무역과 노동을 위한 경제적 이유, 자국 내의 정치적 혼란 등을 피해 안전한 곳에 정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국과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산동성 출신 화교 가운데는 영성현(榮成縣), 모평현(牟平縣), 문등현(文登縣)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특히 영성현과 문등현 출신들은 동향회를 결성하여 친목을 다지고 있기도 하다. 산동성 영성현, 모평현, 문등현 등은 위해시(威海市)와 연태시(烟台市) 소속으로 산동성 가운데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교동지구에 위치한 지역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제3전시실, 짜장면의 전성기 1970년대

외식문화 대표주자 짜장면
짜장면이 외식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계기는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전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이다.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산동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하여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인 캐러멜을 혼합하였다. 여기에 6.25전쟁 후 가장 많이 지원된 것이 밀이었는데, 때마침 쏟아져 나온 값싼 밀가루와 이 소스의 만남으로 ‘짜장면’은 더욱 대중화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선린반점’

 70년대 전형적인 중국집을 재현해 놓고 있다. 중국요리점인 ‘공화춘’과는 달리 일반인들이 많이 찾던 소박한 음식점이다.

짜장면을 먹는 가족들.

입학식과 졸업식 등 중요한 행사때 가족이 찾았던 중국음식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족처럼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은 중국집에는 짜장면만 있는 줄 알고 살았다.

짜장면 가격
짜장면이 서민들의 대표적인 외식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물가 변동에 따라 가격이 변하게 된다. 1960년대 초 쌀값이 3,010원(80kg한가마니) 할때 15원하던 짜장면 값은 1970년대 중반 140원, 1980년대 350원이었다가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거치면서 급등하게 된다. 1990년대 초기 1,300원이었던 짜장면 가격은 2000년대 경제위기를 전후해 짜장면은 3,000원(쌀한가마니 20만원)까지 치솟게 된다. 현재 짜장면 한그릇은 4,000~4,500원으로 50년동안 450배가 올랐다. 이제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 변화가 서민들의 외식 문화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중적인 음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인천 중화요업조합 협정가격표(1964년경), 공화춘 음식 요금표(1970년대).

짜장면은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60년대 이후 물가관리차원에서 가격인상에 심한 통제를 받았다. 지금과는 달리 협정가격표를 지켜야만 했다.

수성고랑주와 진로 고랑주, 고랑주잔, 청테물컵과 재떨이, 양념통.

70~80년대 중국집에서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식기들이다.

철가방
광복 후 짜장면, 짬뽕으로 대변되는 중국음식은 신속배달이라는 구호 아래 급속히 대중화되었는데, 이에 따라 음식 배달을 위한 ‘철가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나무로 된 가방을 만들었지만 너무 무거운데다가 넘친 음식물들이 나무에 스며들어 생기는 위생문제 때문에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다. 그 뒤 플라스틱 철가방도 만들었으나 금형 비용이 비싸 일반화되지 못하다가, 알루미늄판과 함석판 같은 싼 재료가 등장함에 따라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초기에 사용된 나무로 만든 배달 가방.

명품 디자인 철가방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지난 반세기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속 디자인 가운데 하나로 중국음식점의 ‘철가방’을 선정했다. 모나미 153볼펜, 신라면, 칠성사이다, 포니자동차, 시발택시 등과 함께 큰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이다. ‘철가방’이 명품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알루미늄의 색상이 밝고 깨끗한데다가 단순하지만 구조적인 기능이 뛰어난 데 있다. 더불어 쉽게 열리지 않는 뚜껑, 음식물을 쉽게 닦아낼 수 있는 편의성, 약간 찌그러져도 원상 복구가 쉬운 친근한 가변성도 돋보인다. 이같은 장점들로 ‘철가방’은 후세에 물려줄 우리 시대의 생활문화유산이 된것이다. 비록 개발자나 디자이너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음식배달용 도구인 ‘철가방’의 명성은 내내 빛을 잃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지금은 중국집뿐 아니라 대부분 음식점에서 배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철가방.

철가방을 배달하던 자전거

지금은 오토바이를 이용하고 있다.

자장면? 짜장면!
‘자장면’이 맞나? ‘짜장면’이 맞나?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여겨봤던 철자이다. 국어사전은 이를 ‘자장면(炸醬麵)’으로 표기해 왔는데, 중국식 발음은 ‘짜지앙미옌(zhajiangmian)’이다. ‘짜지앙미옌’은 ‘짜장미옌’에서 ‘짜장면’으로 발음하기 좋게 자연스레 변천했을 터이나, 언어 순화 차원에서 된소리 사용을 자제한다며 현실음과 다른 ‘자장면’을 표준말로 정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짜장면’을 즐겨 써 왔고, 그 발음이 중국 현지의 발음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맛이 다소 ‘짜다’는 이미지까지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최근 국립국어연구원이 표기법상 ‘자장면’도 맞고, ‘짜장면’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미 수 십년 전부터 ‘짜장면’이란 낱말을 통해 ‘짜장면’의 맛과 추억을 간직해 왔던 것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블랙데이,
매월14일은 대한민국 신세대들이 만들어 낸 비공식적 기념일로 알려져 있다. 2월14일은 “발렌타인데이”, 3월14일은 “화이트데이”라며 의미를 부여해 즐긴다. 다음달인 4월14일은 “블랙데이”라고 한다. 아직 연인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거나 짜장면, 블랙커피 같은 검은색 계통의 음식을 먹고, 마시며 이날을 즐긴다고 한다.

다양한 종류의 짜장면.

짜장면의 종류와 조리법, 한국의 짜장면 맛이 달다면 중국의 짜장면은 짠맛이 강하고, 한국의 짜장면은 춘장을 볶다 물을 넣어 짠맛을 연하게 풀어주며, 양파와 양배추 등 야채를 듬뿍 넣어 전체적으로 단맛이 나게끔 만든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추억의 짜장면 그릇
짜장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이 두툼하게 붙은 수더분한 사기그릇에 담아야 제 맛이 난사. 그 모양새와 어울리게 듬뿍 담아낸 국수와 짜장에서 만든 이의 넉넉한 마음씨를 읽기도 한다. 양파와 단무지, 또는 춘장을 내놓는 종지도 요란하지 않아 좋다. 식초와 간장병도 잊지 못할 추억의 식기이다.생김새나 장식은 다양하지만, 다른 그릇들과 우아한 하모니를 이루며 신맛과 짠맛을 자아낸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중흥루 면기, 청화 새우그림 면기, 꽃그림 면기, 요리용 대접(1950년대), 중화반점, 민생원, 신생반접 접시(1960~1970년대)

혼.분식 장려운동
혼.분식 운동은 국민 식생활 개선을 위한 게몽운동으로 주곡인 쌀을 자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 곡물이 쌓여가자 정부에서 내려진 조치이다. 보리, 콩, 조 등 잡곡을 섞은 밥이 혼식이고 밀가루 음식이 분식이다. 1964년부터 1977년까지 10여년 동안 진행된 혼분식 장려 운동은 대대로 이어온 쌀 중심의 식습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65년 13.8kg에 불과하던 1인당 연간 밀소비량이 불과 4년 뒤인 1969년엔느 28.7kg으로 2배이상 증가했다는 통계도 있다. 혼.분식 장려 정책이 완화된 후에도 보리의 소비량이 급감한 것과는 달리 밀의 소비는 그대로 유지되어 쌀 다음으로 중요한 곡물이 되었다. 밀을 활용한 제과업, 제빵업, 제면업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혼분식장려운동 포스터.

대한제분 곰표 밀가루의 역사
1950년대 한국 전쟁은 인명.재산 등 한반도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와 전쟁에 대한 공포 등 전쟁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배고픔은 가장 참기 힘든 고난으로 국가 차원에서 큰 고민거리였다. 이때 식량난 해결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띠고 대한제분이 창립된다. 대한제분은 국내 최대의 제분 시설과 생산량을 통해 국내 식량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며, 1960년대 말부터 국내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한다. 특히 혼.분식 장려운동기 시절 국내 밀가루의 쓰임이 커지자 많은 양의 밀가루를 분식업계에 제공하면서 밀가루 하면 ‘곰표밀가루’라는 용어가 탄생될 만큼 절대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고, 최근까지 국내 밀가루 음식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밀가루를 원조해었으며, 밀가루를 가공하는 제분공장들이 세워졌다.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대한제분의 밀가루 제품들.

부산에서 만들어진 금성제분과 제일제당 밀가루

봉지면

밀가루를 이용하여 라면을 비롯하여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다양한 봉지면이 만들어졌다. 농심 ‘짜파게피’를 비롯하여 짜장면도 봉지면으로  만들어졌다.

레토르트 및 인스턴트 식품

공화춘 주방

공화춘 주방은 1층에 자리잡고 있다. 주방은 196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주방은 면을 만드는 수타주방, 양파, 고기 등 다양한 재료를 손질하는 칼판주방, 화덕에 춘장과 볶는 모습을 등을 볼 수 있다.

수타주방
수타면은 모든 면 음식의 기본이다. 전국 어느 중국 음식점을 가도 면음식을 주문하면 “쿵 쿵” 소리부터 냈다. 우리나라 수타면의 역사는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들이 짜장면을 만들어 먹었던 19세기말부터였다. 밀대로 민다음 칼로 썰어 면을 뽑던 한국식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그 후 한국인들이 이 기술을 배우고, 중국 음식점을 개업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산됐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수타주방에서 수타면을 뽑는 장면을 재현해 놓고 있다.

칼판주방은 양파, 고기 등 다양한 재료를 손질하는 곳이다.

주방용 뜰채와 깔때기, 1960년대

화덕주방, 음식을 프라이팬으로 볶고 있다.

프라이팬 다루는 방법
중국 프라이팬은 밑이 둥글고 아주 두꺼워서 불이 골고루 닿아 열을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팬을 흔들면서 재료를 높이 띄웠다가 받았다가 하는데, 이게 바로 식혔다가 익혔다가함녀서 겉과 속을 골고루 익히는 기술이다. 센불로 요리해도 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짜장면 조리법

짬뽕 조리법

공화춘 수습 접시편, 1960년대

“공화춘(共和春)” 상호가 새겨진 접시편, 공화춘 수습 면기, 1960년대

음식운반대. 중국음식점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철가방이 음식운반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왕신(灶王神),
조왕신은 부뚜막 신이고,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년 동안의 일을 옥황상제에게 보고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섣달 23일 저녁에 조왕신 그림 앞에 고기, 엿, 떡 등의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 후 조왕신 그림을 불에 태우는데, 이것은 조왕신을 하늘나라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설에는 다시 조왕신 그림을 부엌 벽면에 붙이는데 이것은 조왕신을 다시 맞이 한다는 뜻이다. 제물 가운데 엿과 떡은 조왕신의 입을 붙게 하여 옥황상제를 찾은 조왕신이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술을 아궁이 주변에 바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조왕신이 술에 취해 제대로 옥황상제를 찾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집안의 나쁜 일을 옥황상제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조왕신을 그린 그림. 중국에서는 부뚜막을 지키는 신으로 여겨진다.

차이나타운의 역사
인천 차이나타운은 현재의 인천 중구 선린동(善隣洞)과 북성동 일대에 정착한 화교들이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초기에는 청나라 거상들의 점포와 음식점 및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고,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이라 하였다. 상거래가 활기를 띠면서 동순태, 동순동 등 거상들이 자리를 잡았고 중화루, 공화춘과 같은 유명한 중국 요릿집들이 개점하는 등 매우 번창하였다. 광복후 선린동으로 동명을 개정하여 옛날과 같은 친선교류를 유지코자 하였으나, 우리 정부가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화교사회는 위축되었다. 1990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이곳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는데,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뿐만 아니라 중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품격있는 차이나타운으로 탈바꿈하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