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임청각(보물)과 함께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영남산 동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대저택인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종택이다. 숙종대인 처음 짓기 시작하여 영조대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집앞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칠층전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옛 절터에 지어진 집으로 보인다. 실제로 법흥사는 조선중기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안동지역에 있는 권문세가들이 살던 고택들 중에서 건물의 크기나 구성,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위치 등을 고려해 볼 때 임청각과 함께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은 고택이다. 지금은 그 앞으로 중앙선 철로때문에 위치상의 장점이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마당이 넓고, 정원을 자연스럽게 잘 꾸며놓고 있는 아름다운 대저택이다.
건물은 살림집인 안채와 사랑채, 별당 건물인 영모당(永慕堂), 그 뒷편에 작은 정자인 북정(北亭),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과 부엌들을 배치하였다. 안채를 들어가는 중문 왼쪽편 끝에는 마루방과 온돌방이 있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왼쪽편에는 큰 연못과 별당인 영모당이 있다. 영모당 뒷편에 작은 정자인 북정을 따로 두고 있다.
<안동 고성이씨 탑동파종택>
임청각과 함께 안동지역을 대표하는 대저택인 고성이씨 탑동파종택.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사찰인 법흥사가 있던 절터였다. 지금도 저택 앞에는 법흥사지칠층전탑(국보16호)이 남아 있다. 중앙선철도가 집앞을 지나가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기는 했지만,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랜드마크가 되었을 것이다.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문간채>
별당과 정원이 있는 저택 남쪽편 모퉁이에 대문이 위치하고 있다.
<안채를 출입하는 문>
<안채>
안채는 숙종대에 지어졌는데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고 건물을 지었다. 앞면 8칸 규모로 안마당이 있는 ‘ㅁ’자형 을 이루고 있는데, 중문채와 대청마루가 있는 본채를 2칸씩 바깥으로 돌출시켰다.
<안채 안마당>
4칸 규모의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과 부엌을 배치하고 있다.
<앞면 2칸 규모의 사랑채>
별당인 영모당이 손님을 접견하는 사랑채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사랑채는 일반 가옥의 작은사랑채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루방에 ‘정우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고 한다.
<옆에서 본 안채와 사랑채>
<별당 건물인 영모당>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연못과 정원을 내려다 보고 있다. 별당에서 정원과 바깥쪽 낙동강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옆에서 본 모습>
이 집은 다른 고택에 비해서 별당과 정원을 크고 웅장하게 꾸며놓고 있다. 마당에 넓은 연못이 있고, 앞쪽에는 별당인 영모당이, 뒷편에는 작은 정자인 북정이 있다. 정원에는 다양한 수목들이 심어져 있다.
<별당 뒷편에 있는 작은 정자인 북정>
높은 곳에 위치하여 낙동강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에 좋다.
<안채 뒷편에 있는 불천위조상을 모시는 사당>
숙종대 관리를 지낸 이후영을 불천위 조상으로 모신다고 한다. (?)
<2009년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안동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法興洞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 안동시 법흥동
이 집의 본채는 조선 숙종 30년(1704)에 좌승지 이후식이 지었고, 북정(北亭)은 영조51년(1775)에 진사 이종주가 지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채, 사랑채, 안채, 정자와 연못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중에 방앗간채, 사랑채, 외양간채가 더 지어졌다. 사랑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안채의 동쪽에는 3칸 크기의 사당이 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6칸으로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세워졌다. 이 집은 숲이 우거진 야산과 계곡에 흐르는 물을 건물과 잘 조화시킨 사대부 저택으로서 전통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3. 두산백과,
4.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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