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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향교, 교동도호부 중등교육기관

옛 교동도호부 읍치가 있던  강화 교동도 읍내리에 있는 교동향교(喬桐鄕校)이다. 고려시대 안향(安享)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이다. 원래 한강이 보이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조선 영조때 읍치와 가까운 이곳으로 옮겼다. 강학공간을 앞에, 제향공간을 뒤에 둔 후묘전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동.서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강화 교동향교>

<홍살문>


<하마비>

<교동향교 전경>

<외삼문 앞 연못>

강학공간은 강당 건물인 명륜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를 두고 있다. 명륜당은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교동도 겨울 날씨가 추운 까닭에 대청마루에 문을 달아 놓고 있으며,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온돌방 앞쪽에는 출입문 대신 작은 창문을 달아놓고 있다. 동,서재는 모두 온돌방과 부엌이 있는 ‘ㄱ’자형 건물을 하고 있다. 강학공간에는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명륜당>

<동재>

<서재>


<명륜당 뒷편 은행나무>

<담장 안쪽 고목들>


<마당 한쪽편에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노룡암>

노룡암은 원래 교동현 동헌 북쪽뜰 층계 아래에 있었는데, 위에는 울창한 숲속에 늙은 소나무가 있고 아래에는 숙단이 있었다. 1717년(숙종43)에 충민공 이봉상이 노룡암이라고 3자를 지었는데 1773년(영조 49)에 그의 손자 달해가 글지은 것을 새기었다. 1820년(순조 20)에 가서 통어서 이규서가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이 하였다’는 7자 글자를 새기었다. 1987년에 교동향교로 옮겼다. <출처:강화군청>.

교동향교 제향공간은 공자와 선현들을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를 두고 있다. 대성전은  크고 웅장하게 짓지는 않았지만, 교동도호부 위상에 걸맞게 앞면 5칸 규모를 하고 있다. 교동향교에는 고려 충렬왕때 안향이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다가 모셨다고 한다. ,서무는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대성전을 출입하는 내삼문>

<대성전>

<동무>

<서무>

<대성전 아래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한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교동도는 섬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지금은 강화군에 속한 작은 고장이지만 삼국시대때부터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강화와는 별개로 고목근현이라 불렀으며 신라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다. 한강하구를 지키는 지리적중요성 때문에 병자호란 이후 경기수영이 경기도 남양에서 이 곳으로 옮겨지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1633년에는 삼도통어사가 설치되어 경기도.황해도.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하였다. 교동도에는 향교와 읍성을 쌓았던 성곽 일부를 제외하고는 옛 교동도호부 관아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교동향교 앞으로 옮겨 놓은 교동도호부 관리를 지낸 인물들의 공덕비 등>

교동향교(喬桐鄕校),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향교는 유교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지방교육기관이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처음 세워졌다. 조선시대 들어와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이 향교에 처음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으며,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