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부여 능산리 사지'(사적)이다. 백제의 대표적인 고분군인 능산리고분군과 백제 수도 사비성을 둘러싸고 있던 부여나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세워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대체로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원찰로 보고 있다. 목탑터 심초석에서 출토된 사리감에는 창왕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했다는 내용의 글씨가 적혀 있다. 창왕은 백제 27대 위덕왕을 일컫는 명칭이며, 그의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이 사찰을 창건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제사를 올리던 사당과 강당건물이 먼저 들어섰고, 뒤에 목탑 등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찰의 규모는 익산 미륵사지에 비해 작지만 왕릉을 지키는 원찰의 의미를 갖는 사찰이었다.
1990년대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가 확인되었다. 절터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축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전형적이니 백제의 1탑1금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절터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함(국보)를 비롯하여 중국으로 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청자류, 문서에 해당하는 많은 목간들, 건축자재인 수막새와 암막새, 벼루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능산리 절은 어떤 구조로 생겼을까?
능산리 절은 중문-탑-금당-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주위에 회랑을 두른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가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회랑 북쪽에 강당과 연결된 건물이 세워진 점인데 불구를 제작하던 공방으로 밝혀졌다. 절의 둘레에는 경내로 물이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한 ‘∩’자형의 배수로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능산리 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배수로 서쪽에는 기와를 구워 공급하던 가마가 확인되었고, 북쪽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이나 기타 부속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군과 부여나성 사이의 골짜기를 메워서 사찰을 조성했다. 원래 계단식 논이 있던 곳이었는데 모형관 공사중 유물의 일부 출토되어 1992년부터 2008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원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건물터를 기준으로 복원해 놓았다. 중문.목탑.금당.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 백제의 1탑1금당식 사찰의 모습을 실제 볼 수 있는 곳이다.
능산리 절은 언제 세워졌을까?
능산리 절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사비천도라는 도성 전체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538년 이전이 이미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으나, 5~7차 발굴과정에서 그 실마리를 제공할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능산리 절의 대지조성을 확인하기 위한 트렌치 조사나 중문지 남쪽의 초기 자연배수로 등지에서 인물무늬 청자편, 흑갈유 벼루 다리편, 청자 잔편과 같은 6세기 중엽대의 중국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 밖에도 최하층에서 출토된 삼족토기, 개배 등을 통해 6세기 중엽에 능산리 절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절터 서쪽에는 물이 흐르는 배수로가 있으며 중문으로 연결되는 길에 나무로 만든 목교, 석재로 만든 서석교가 있었다.
서석교
이곳은 돌다리가 있던 곳이다. 서쪽 배수로의 끝 부분에 해당하며, 북쪽의 나무다리에서 7.1m 정도 떨어져 있다. 길이는 남북 2.6m, 동서 1.45m이다. 나무다리와 마찬가지로 물길을 건너 사찰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조성한 다리로 추정된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목교
이 다리는 백제시대 나무다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사찰로 들어갈 때 사용한 다리로 추정된다. 북쪽에서 내려온 폭 1.8m의 배수로가 3m로 넓어지는 곳에 다리를 놓았다. 다리의 길이는 3.3 ~ 3.66m, 폭은 약 6m이다. 다리 양쪽에 석재를 쌓고, 배수로 바닥에 1.95m 간격으로 기둥을 세운 뒤 상판을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중문은 앞면 3칸 건물이 있었던 추정된다. 중문 양쪽으로 남회랑지가 연결되어 있다.
중문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사찰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역사가 출입문 양쪽에 세워져 있다. 이후의 사찰들과는 달리 금강역사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개방된 형태를 하고 있다.
중문지
중문지는 이 절터에서 발견된 건물지 중 가장 남쪽에 있다. 중문지 좌우로 남회랑지가 이어진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석축으로 미루어 기단의 규모는 동서 11.90m, 남북 7.62m이다. 기둥이 놓였던 적심토 흔적을 감안할 때 원래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문지 앞쪽 중앙에서는 계단으로 보이는 판석 2매가 확인되었고, 중문지와 목탑지 사이에서는 암키와를 둥글게 세워 디딤돌로 삼았던 흔적 12곳이 남아 있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회랑지
이곳은 탑고 금당을 에워싼 회랑이 있었던 자리이다. 회랑지는 사찰의 동쪽과 서쪽, 남쪽에서 확인되었다. 남회랑은 중문지 좌우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30m 정도 이어지다가 양측면 배수로를 만나 끝나며, 폭은 2.6m이다. 동.서 회랑지의 중심 간격은 약 53m이고, 중문지에서 강당지까지의 남북 길이는 약 72.5m로 정림사지와 비슷한 규모이다. 회랑의 폭은 2.6m이고 동.서 회랑지는 각각 11칸, 남회랑은 각각 10칸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중문을 들어서면 5층목탑이 보이는데, 앞면 3칸으로 멀리서는 보는 목탑의 웅장함보다는 건물이 작다는 느낌을 준다. 삼국시대에는 오늘날 불교와는 달리 신앙의 중심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목탑이 중심이었는데, 이 곳 능사도 목탑이 사찰의 중심이라는 느낌을 준다. 목탑은 사람이 들어가서 활동하는 건물이라기 보다는 사리를 모시는 탑의 성격이 강한 건물이다.
건물터의 규모나 정림사지 오층석탑 등을 고려하여 5층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재현해 놓았다. 황룡사지 구층목탑에 비해 그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삼국시대 이후 세워진 전형적인 목탑의 형태나 규모일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도 비슷한 목탑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목탑지
이곳은 목탑이 있던 자리로 금당과는 7.87m 떨어져 있다. 기단은 정사각으로 한 변이 하층 11.73m, 상층 10.30m이다. 상층기단은 북쪽과 서쪽 일부만 남아 있는데 1.1~1.3m 크기의 장대석을 사용했고 하층기단 안쪽에 약 70cm 정도 들여 쌓았다. 목탑 중심부의 지표아래 1.2m 깊이에서 사각형의 심초석이 드러났다. 그 위에서는 지름 40~50cm의 느티나무 심주 일부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등 다양한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감에는 백제 위덕왕 13년(567)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남아 있어 이 절의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목탑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사리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공양구로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게 적혀 있다. 부근에서 장신구를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내부에는 용무늬를 그려놓은 굵은 기둥인 심주를 볼 수 있다. 심주의 초석인 심초석 아래에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한 사리함을 묻어둔다.
석조사리감(국보)은 사비기 백제 왕릉이 있는 능산리 절터 목탑터에서 출토되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치로 높이 74 cm, 가로 50 cm의 불상을 모시는 감실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감실 양쪽에 예서체 글자 10자씩 새겨져 있다. 글자의 내용은 창왕(위덕왕) 때인 567년에 조성되었으며,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장치 중 하나이자 금석문 자료로서 능산리사지 창건 내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백제 창왕명석조 사리감
목탑지 심초석 위에서 발견된 사리감은 아래가 편평하고 위가 둥근 아치형으로 무덤의 입구를 연상시킨다. 앞면에는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년)에 누이인 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고 한자로 적혀 있다. 창왕 즉 위덕왕은 성왕의 아들로 백제의 왕릉이 있는 능산리에 절을 세워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불교를 통해 성왕이 이루지 못한 백제 중흥의 꿈을 실현코자 하였다. 이 사리감은 위덕왕의 이러한 간절한 염원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불상, 금공예품, 유리구슬 등 다양한 유물들이 같이 출토되었다. 당시 인두, 중국 등에서 확인되는 초기의 사리공양 모습과 유사하며, 우리나라 사리공양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백제에서 처음 바쳐진 사리공양
목탑지 심초석 주변에서는 사리감과 함께 불상, 금공품, 유리구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 중에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신구로 목탑 가운데에 세우는 기둥과 받침돌을 놓을 때 함께 바쳐진 사리공양구이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 중국 등지에서 확인되는 초기 사리 공양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치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과 더불어 한국 사리장엄의 역사가 백제 위덕왕이 567년에 세운 능산리 절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목탑 뒷편에 있는 금당지는 2층 기단 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정면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금당지
이곳은 불상을 모시는 곳으로 사찰의 중심 건물이 있던 곳이다. 기단은 상층과 하층 2단으로 되어 있다. 하층 기단의 규모는 정면 21.62m, 측면 16.16m이며, 상층기단은 정면 11.94m, 측면 14.48m이다. 정면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하층기단에는 화강석 부재가 남아 있었고, 상층기단 동쪽 측면에는 약 5m의 장대석이 남아 있다. 중문지와 마찬가지로 초석을 놓을 자리를 판축하여 다시 조성한 흔적이 드러났다. 금당의 남북 양쪽에서는 금당 출입용 계단시설이 확인되었고, 탑과 강당 사이에는 한 변이 약 39cm인 사각형 디딤돌이 남아 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뒷편에는 큰 규모의 강당 건물을 중심으로 공방지를 비롯하여 다양한 용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다.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승려들이 수행하거나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요사채 건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공방처럼 출퇴근하면서 일상업무를 보는 공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당은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앞면 8칸, 옆면 3칸 규모이다. 가운데 통로를 두고 양쪽에 방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 기단 밖에 굴뚝이 있었으며 일 온돌시설 흔적이 남아 있다.
강당지
이곳은 강당이 있던 자리로 완만한 경사지에 세워졌기 때문에 난쪽과 북쪽의 기단 높이가 다르다. 기단은 정면 37.4m, 측면 18m이다. 금당과는 달리 기단을 잡석과 기와로 만들었는데 정면 8칸, 측면 3칸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물 중앙에 통로 공간을 두고 동.서 양쪽에 방을 설치한 구조이다. 서쪽 방에는 동벽과 북벽 가까이에 ㄱ자형 구들이 놓였으며 북쪽 기단 밖으로 굴뚝이 나 있다. 방 안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외줄고래만 놓은 초기 온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능산리절 강당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난 것일까?
보통 절의 강당은 강론이나 설법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전체가 트여 있는 긴 통칸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능산리 절은 강당지를 중심으로 공방 1,2, 불명건물지 1,2의 초기 건물지군이 ‘∩’자형으로 독특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지 내부는 퇴칸을 갖추고 2실로 분리되어 있다. 서실은 중앙에 신좌로 추정되는 큰 받침돌이 있으며, 동실은 내부에 초석이 없는 통칸으로 트여 있다. 이 건물들은 성왕릉의 축조나 성왕을 추복하기 위해 제사를 담당하던 ‘사당’으로 추정되며, 567년 목탑이 건립됨에 따라 불교 사찰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지만 일정기간 기존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박물관, 2012년)
강당 앞 서쪽에는 공방이 있었던 건물(공방지1)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공방지1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를 비롯하여 금.은.동.철제품 등 많은 유물들이 확인되어 공방을 운영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형건물지
이곳은 서회랑 서쪽 바깥에 작은 건물이 있던 자리이다. 기단의 크기는 동서 약 8.5m, 남북 약 4m이다. 초석은 남쪽에 4개, 북쪽에 4개가 남아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의 평면형은 동서로 긴 사각형이고 기능이나 용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북향이다. 건물 중앙에 타원형 재구덩이가 발견되어 불씨를 저장하던 곳으로 짐작된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공방지1
이곳은 공방이 있던 자리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남북 18.12m, 동서 11.18m이다. 초석을 사용하지 않고 잡석을 늘어 놓은 줄기초 구조이다. 중앙칸 연도 시설 옆 수조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가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채 출토되었다. 그 주변에서 금동광배편을 비롯한 각종 금.은.동.철제품,유리,토제품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전체 건물지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수습된 곳이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공방지로 추정된다. 이처럼 사찰 내부에 공방을 두고 운영한 사례는 흔하지 않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향로는 구성은 용모양을 하고 있는 받침, 연꽃잎을 형상화한 몸통과 신선이 사는 박산을 표현한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실 의례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금동대향로,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는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향로이다. 1993년 12월 국립부여박무관이 능산리 절터를 조사하던 중 공예품을 만들들던 공방 터 나무수조 안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뚜껑과 몸통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각종 자기조각과 금속조각 등을 메워서 채운 듯한 모습이었고, 나무수조 바닥에 기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건물의 사용이 중단된 시기에 향로를 의도적으로 묻은 것으로 보인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 마리 용이 향로를 받치고 있으며, 향로 꼭대기에는 봉황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는데, 높이만 61.8cm로 규모 면에서 대작으로 평가된다. 향로의 뚜껑에는 여러 겹으로 둘러싼 산의 모습과 함꼐 악기를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인물상과 상상 속의 봉황과 용, 그리고 호랑이, 사슴 등 현실 세계의 동물도 표현되어 있다. 이 외에도 식물과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도 찾아볼 수 있다. 뚜껑의 꼭대기에는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은 채로 날개를 펴고 있는데, 길게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의 미를 보여준다. 봉황의 앞 가슴과 뚜껑의 곳곳에는 모두 12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향 연기가 산을 감싼 채 봉황 앞에서 솟아오르게 만들어졌다. 향로의 몸체는 할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하나하나의 연잎마다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두루미 등이 표현되어 있다. 향로의 받침은 한 마리의 용이 몸체의 연꽃을 입으로 물고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행로의 영향을 받았으나 중국과 달리 산이 입제적으로 표현되어씅며 동물과 인물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서편건물지(공방지2)
이곳은 강당지 서쪽의 공방이 있던 자리이다. 접석을 쌓아 만든 석축기단은 정면 15.28m, 측면 11.59m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강당의 뒷면 옆에 붙어 배치했고, 기단 뒷면은 배수로를 겸한다. 두 개의 방을 꾸미고 그 가운데에 남북으로 복도를 두었다. 복도와 맞닿은 두 방안의 동.서벽에는 각각 외줄고래가 설치됐는데 북쪽 기단 부근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각방 전면 중앙에 있는 디딤돌로 볼 때 출입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철제모루와 숫돌 등이 출토되어 공방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공방지 건물에서 청동제품을 제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이다
공방지의 기능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공방지 1, 2는 원래 초기 건물지군으로 성왕릉의 축조나 성왕을 추복하기 위한 ‘사당’으로서 각종 제사 기능을 수행하던 시설이었다. 공방지 2는 강당지와 같은 구조로 제사기능이 수행된 공간이었고, 공방지1은 강당 부속건물의 성격으로 공식적인 접견이나 의례준비를 위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기능은 무왕 재위기간 중 익산 천도와 연계되어 상당히 위축되면서 공방지로 전환되게 되었다. 내부구조도 기존의 벽체 하부시설을 훼손하고 굴뚝을 설치하는 등 인위적으로 변형하여 동광석을 제련하고 청동제품 등을 제조하는 공방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부여박물관, 2012년)
공방지 맞은 편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터가 있다. 앞면 3칸 규모로 다른 부속건물에 비해서 건물의 규모가 큰 편이다. 일반사찰의 강당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편건물지
북편건물지의 기단부는 퇴간 초석과 줄기초 초석으로 이루어졌다. 부속시설로는 쪽구들과 아궁이, 굴뚝시설, 건물 안팎으로 연결된 배수로, 그리고 건물의 앞(남쪽)과 뒤(북쪽)에 나있는 배수로가 있다. 이 건물지는 모두 온돌시설을 갖추었기 때문에 당시 승려들의 생활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건물의 평면 형태는 직사각형이며, 초석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정면 8.4m, 측면 7.9m 규모이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집수장과 우물지
이곳은 집수장 시설이 있던 자리이다. 집수장 위쪽에서는 두 개의 우물이 확인되며 아래쪽은 중앙 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집수정의 네 벽은 돌을 쌓아 올렸는데 길이 10.1 ~ 10.6cm 너비 5.4 ~ 5.8cm 크기였다. 집수시설의 바닥은 암반을 그대로 활용했으며, 석축은 서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능산리사지가 건립된 6세기 전반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사 만들어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절이 여러시기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제사를 담당하던 강당주변부터 시작하여, 목탑과 금당이 세워지고 주변건물이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꽃무늬 수막새, 외곽사역 능산리절은 어떻게 완성되어 갔을까?
고대 불교 가람의 일반적인 건립과정은 목탑이나 금당이 먼저 만들어지고 중문과 회랑이 축조되며 마지막에 강당이 세워진다. 이에 반해 능산리 절은 초기에 만들어진 건물지의 특수성으로 인해 일반 가람의 건립순서와는 차이를 보인다. 1단계는 강당지와 공방지 1,2, 불명건물지 1,2가 건립되는 시기로 6세기 중반부터 567년 목탑 건립 이전까지이다. 2단계는 목탑의 심초석 매립을 기준으로 목탑, 금당, 중문, 회랑이 차례로 건립되어 본격적인 불교사원으로 기능하는 시기이다. 3단계는 가람 중심부의 주요 건물 보수가 이루어지고, 강당지 북쪽과 서회랑지 서쪽 일대에 승려의 생활공간이나 기타 부속시설이 건립된 6세기 후반에서 백제 멸망기까지이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목간이 들려주는 능산리 절 이야기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목간은 주로 중문지 남서쪽과 동남쪽의 초기 자연배수로에서 출토되었다. 이 목간의 대부분은 554년 관산성 전투 무렵부터 목탑이 건립된 567년 전후의 시기에 사용되다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목간 1점이 8차조사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가 폐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능산리사지에 남겨둔 목간들은 내용에 따라서 불교의례.제의.주술, 물품의 이동, 문서행위 등을 기록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여박물관, 2012년)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용도로 사용했던 남근형 목간이다.
이 목간에 보이는 길가에 세운다는 뜻의 ‘도연립’은 도성 바깥에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이본의 도향제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근숭배사상은 생산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서 남근의 왕성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관산성 전투에서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한 성왕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취약했던 위덕왕 정권에 대한 백제의 중흥을 기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절터에서는 다양한 목제품들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들에서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능산리사지 목제품 이야기
목간이 출토된 곳에서 다양한 목제품이 함께 발굴되었다. 접시, 빗, 구유통, 나막신, 자, 칼, 새모양 목제품, 숟가락, 젓가락, 지게발채, 수레바퀴편 등이 함께 나왔다. 다양한 생활용품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색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칠기편이다. 남아 있는 칠기편의 형태로 보아 대접의 형태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옻칠한 무늬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 칠기편은 고대 칠기 제작방법이나 백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진흙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금속공예품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금속공예품을 통해 백제의 금속 주조 및 세공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금동과 은 판불은 백제 금속공예품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타출기법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금동 판불에는 삼존불이 표현되어 있다. 누금구슬과 원추형 누금장식은 금알갱이들을 접합하고, 부분적으로 구멍을 뚫어 가는 금실로 테두리를 장식하여 매우 세련된 금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모자방울 또한 백제의 독특한 금속공예품으로 방울 몸통에 작은 방울을 사방에 매달았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도자기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중국 남북조시대에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절을 통해 본 백제의 국제성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국제적 성격의 유물은 사비시기의 대외교류 양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물로는 수당대의 흑갈유 벼루 다리편.흑갈유 자기편.개원통보가 있고 남조시기의 호자나 북위 양식인 소조상과 토제장식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모방품으로는 녹유자기나 칠토기를 들 수 있다.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풍경판, 연통형 토기, 표면을 단단한 도구로 눌러 시문한 암문토기가 해당된다. 이밖에도 갈색의 나뭇결 무늬가 있는 유리와 파란색 유리편은 서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절터에서는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기종별로 항아리, 사발, 등잔, 자배기, 전달린토기, 벼루, 연통형토기, 접시, 뚜껑, 병, 삼족토기, 기대, 시루 등이 있다. 항아리는 짧은목항아리가 대부분이며, 사발은 표면에 흑색칠을 입힌 것이 많다. 벼루는 다리형태가 받침모양인 것과 다리모양인 것이 모두 확인된다. 뚜껑은 형태가 몹시 다양하다. 등잔은 대부분 심지받침이 없으며, 사슴기름을 많이 사용하였다. 토기 표면에 글씨나 부호를 새긴 것도 관찰된다.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567년 하한인 사비 전기의 최하층 출토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로 편년된다.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부여 왕릉원’(사적) 백제의 도성인 부여 나성(사적) 바깥쪽 나즈막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사비기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들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6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1971년 1기의 무덤이 다시 발견되어 총 7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터 서쪽에 있는 부여 나성(사적)은 사비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km의 성이다. 부서산성을 중심으로 부여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부여 능산리사지, 사적
능산리사지는 567년 백제 위덕왕이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백제 왕실의 기원 사찰이다. 1992녀 ~ 2011년까지 1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을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한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시대 가람 형식에 해당함이 밝혀졌다. 이외에 사지 내에서 확인된 목교와 석교 등을 통해 백제의 우수한 건축기술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93년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어 백제인의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술과 예술 역량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은 절이 세워진 연대와 공양자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안내문, 부여군, 2024년)
<출처>
- 안내문, 부여군, 2012년/2024년
- 안내문, 부여박물관, 2012년
- 안내문, 백제문화단지, 2012년
- ‘사적 부여 능산리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