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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근세관] 고려, 무신 정변 이후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는 무신정변으로 인해서 내부적으로 상당기간의 혼란기를 보내다 최충헌이 혼란을 종식시키고,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무신 정권기의 혼란을 종식한 최씨정권은 이전에 비해서 유학자들을 발굴하여 행정능력을 갖춘 문신들도 과거를 통해서 등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불교 개혁 운동인 불교 결사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어 지눌을 중심으로 수선결사 운동과 무신집권층의 후원하에 백련결사 운동이 일어났으며 선종의 성격이 수선결사 운동은 오늘날 불교의 주도세력인 조계종의 성립으로 나아갔다.

<무신 정권 때의 문신 양택춘의 묘지명, 고려 1254년,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발견>

고려 중기의 문신 관료 양택춘의 삶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양택춘은 60세가 다 되어서야 온수군(충남 아산시 온양) 감무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아들 5명 중 3명이 승려가 되었는데, 큰아들 안기가 송광사의 16국사 중 5번째인 원오국사 천영이다. 무신집권자 최우가 선원사를 창건할 때 천영이 큰 역할을 한 덕분에 양택춘은 관직이 더 올라갔고, 최우에 이어 최항이 집권하자 조청대부 예빈경을 지내고 은퇴하였다. 무신 집권자와의 관계 속에서 관직생활을 이어갔던 무신정권기 문신 관료의 삶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최충헌이 승인한 과거 합격증, 장양수급제첩, 고려 1206년, 종이에 묵서, 국보, 복제품>

최충헌의 권세가 한창이던 1205년에 장양수가 발급받은 과거 시험의 합격증이다. 합격을 확인한 권원 이름 중 세 번째 “문하시랑 중서문화평장사 이부상서 상주국 상장군 판병부어대사 최”가 바로 최충헌이다. 문서 형식은 북송 때 황제가 하사하던 첩(帖)의 양식을 참고 했고, 흘려 쓴 본문(행초서)과 납작하게 쓴 독특한 관직명 글씨체는 남송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연호는 남송과 대치하던 금이 ‘태화(1201~1208)’를 썼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려시대 과가 합격증은 총 6건인데, 이 중에 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매우 희귀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청자 국화무늬 항아리,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발견, 고려, 2 청자 국화무늬 매병,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발견, 고려, 3 청자 잔,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발견, 고려>

무신 정변과 강화 천도
12세기 귀족 문화를 꽃피우던 고려 사회는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나는 등 여러 부작용을 드러내었다. 문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던 무신의 불만은 의종의 사치스런 생활과 실정으로 촉발되어 마침내 1170년(의종 24) 무신 정변이 일어났다. 정중부가 주도하던 무신 정권은 경대승.이의민으로 이어졌고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최우(최이로 개명).최항.최의의 4대에 이르는 최씨 정권이 성립하였다. 1231년(고종 18)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이듬해 최이는 항쟁을 결의하며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진도 용장산성 출토품,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 출토, 고려 13세기
1 수막새 4 청자 상감 국화문 잔 5 흙으로 만든 말>
<2 “四道”를 새긴 기와, 3 “대장혜大匠惠”를 새긴 기와>

진도 용장산성, 삼별초의 대몽항쟁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삼별초는 진도로 들어가 기존의 사찰 건물을 개조하여 궁궐로 삼고, 그 주위에 산성을 쌓아 항쟁의 근거지로 이용하였다. 용장산성을 발굴한 결과 20여 채 이상의 건물이 치밀하게 배치된 것이 드러났는데, 이를 두고 삼별초가 진도로 옮기기 전에 이미 궁궐 조성과 산성 축조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별초는 여기에 1270년 8월부터 약 9개월 남짓 주둔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제주 향파두리성 출토품, 제주시 애월읍 향파두리성 출토, 고려 13세기
7 청자 작은 병 8 청자 투각 돈 조각>
<9 “고내촌”을 새긴 기와 10 “卍”을 새긴 기와>
<11 송나라 동전 12 청동 숟가락>

제주 향파두리성 – 삼별초의 최후 거점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걸쳐 있는 삼별초의 유적지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항파두리성에서는 발굴 결과 뚜렷한 토성의 흔적과 대궐터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를 비롯해 17개소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지금도 존재하는 지명인 “고내촌”을 새긴 기와, 철제 갑옷편, 고급 청자류, 막새기와, 숟가락, 중국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성격이 강화 및 진도에서 나온 삼별초의 것과 비슷하여, 삼별초의 이동과 더불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별초는 제주에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약 3년간 주둔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삼별초三別抄
‘별초’란 특별히 가려 뽑았다는 의미의 단어로, 고려시대에는 정예한 병사들을 선발한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필요에 따라 임시로 조직했던 부대를 별초로 불렀던 반면, 1230년(고종 17) 무렵 당시 무신 집권자인 최우가 개경에 출몰하던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부대 야별초는 상비군이었다. 이 야별초가 몽골의 침입과 강화 천도 등을 거치며 좌.우별초로 조직이 커지고, 거기에 몽골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신의군을 합해 ‘삼별초’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는 공병이었지만, 무신 정권의 변동에 따라 차츰 집권자의 사병처럼 쓰이게 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삼별초와 대몽 항쟁
몽골군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나 고려 정부는 몽골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회피하였으며, 결국 1258년에는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정변이 일어났다. 다음해 몽골과의 강화가 이루어졌고,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무신 정권의 군사적 뒷받침이 되었던 삼별초으는 이에 반발하며 항몽 정권을 수립하고, 진도의 용장산성, 제주도의 항파두리서을 거점으로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273년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 의해 최우를 맞게 되어 40여년에 걸친 대몽 항쟁이 막을 내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몽골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이 붕괴된 이후 고려는 80여년간의 원나라 간섭기를 보낸다. 몽골과의 투쟁, 일본 원정 등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고려시대 원의 간섭기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유물로는 금속활자와 단군신화를 기록한 삼국 유사를 들 수 있고, 고려말 이후 우리나라의 정신 세계를 이끌어 온 성리학 또한 이 시기에 도입되었다. 

<1 원나라의 관료가 쓰던 인장, 1285년>

이 인장의 바닥면은 정사각형이고, 윗면에 장방형의 꼭지가 붙어 있다. 인장의 찍히는 면에 새겨진 글씨는 판독하기 어려우나, 윗면의 오른쪽에는 “정동선위사 도원수부경력사”, 왼쪽에는 “중서예부 지원 22년 12월 일”라는 글귀가 각각 새겨져 있다. 이로 보아 이 인장은 원이 일본 원정을 위해 만들었던 정동행성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2 권문세족 출신 인물이 발원한 암막새,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출토, 고려 14세기>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으로 충선왕의 장인이었던 조인규의 후예들이 발원해 만든 막새이다. “조삼장”은 조인규의 넷째 아들인 승려 의선으로, ‘삼장’은 원의 황제가 하사한 별호이다. “만호 조총”은 조의선의 조카이자 조인규의 손자인 조충신, “조천”은 역시 조인규의 손자인 조천사나 조천우로 추정된다. 의선이 주지로 있던 임실 진구사 터에서 출토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금으로 꾸민 청자 국화무늬 잔, 고려 13세기><2 청자 연꽃무늬 완, 개성 출토, 원>

상감 기법으로 국화무늬를 넣은 청자 잔이다. 국화꽃 테두리를 따라 금을 바른 흔적이 보인다. <고려사>에 고려 후기의 관료 조인규가 원나라 황실에 ‘금으로 무늬를 그린 도자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잔과 같은 모습의 그릇이었을 것이다. .귀한 청자에 금칠까지 더한 이러한 그릇은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흔하게 사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원 황실에 선물로 보내거나, 고려 왕실 또는 원나라와 관련 있는 일부 세력가들이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하였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귀가 두 개 달린 청백자 병, 전남 신안군 중도면 망축리 도적도 해저 출수, 원 1323년 이전><4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구름 용무늬를 넣은 병, 개성 출토, 원>
<딸을 공녀로 보낸 왕족 부인의 묘지명, 1335년>

고려의 왕족인 예성부원대군 왕은의 아내 김씨의 묘지명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였던 최해가 지었다.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자 무신 정권기의 고위 무신이었던 김경손의 손녀다. 29세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 3남 1녀를 키웠는데, 원에서 왕실의 여자를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와 그녀의 딸이 뽑혀 가게 되었다. 그녀는 딸을 보내고 슬퍼한 나머지 1335년에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 간섭기 고려의 공녀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원의 간섭과 몽골풍의 유행
1259년 몽골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후 1356년 (공민왕 5)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성공할 때까지 원의 간섭이 지속되었다. 고려 왕은 원의 부바(사위)가 됨에 따라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관직 등을 원에 비해 낮추어 사용하였고, 충자가 포함된 묘호를 원으로부터 받았다. 고려는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일본 원정을 위해 막대한 양의 군량과 선박, 군사를 조달해야 했고, 원으로 보내는 공물과 공녀의 차출은 백성의 생활을 고달프게 했다. 한편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머리 모양과 복장 등에서 원의 생활 방식인 몽골풍이 유행하였고, 몽골어를 사용하였다. 원에서도 고려양이라 하여 고려식의 풍습이 퍼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말 공민왕은 대표적인 개혁 군주로 원나라가 쇠퇴해자 친원파를 숙청하는 한편 영흥 일대를 회복하는 등 반원 정책을 추진하고 여러 제도적인 면을 개혁하였다. 물론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후대 사람들이 높이 사서, 그의 신당이 조선 종묘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조선의 건국이 후손이 없었던 공민왕을 승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원나라 노국공주와의 깊은 부부애로 인해서 그 초상화는 노국공주와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공민왕의 지원을 받은 목은 이색을 중심으로 한 성균관 학자들의 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후에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 공민왕비의 무덤 이름이 새겨진 청자 파편,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출토>

고려의 31대 임금인 공민왕의 비였던 노국대장공주의 능호 “정릉”이 새겨진 청자 대덥 파편이다. 이 청자들은 정릉에 껴묻거리로 넣거나 공민왕의 능행 때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실용 청자임에도 유약의 색이나 상감의 수법이 거칠어,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어지러웠던 고려 말 사회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2 공민왕의 충신 염제신의 초상화, 고려 14세기, 복제>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공민왕의 장인인 염제신의 초상화이다. 염제신은 공민왕의 친원파 숙청을 원나라에 납득시키고, 1370년에는 원나라의 변경 지역을 공격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웠다. 이에 공민왕은 염제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그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 초상화가 공민왕이 그려준 바로 그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본래 염제신의 명복을 비는 사찰에 모시던 것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공민왕의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회화작품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드물 뿐마나 아니라 온화한 분위기에 섬세한 필치까지 더해져 고려시대 초상화의 품격을 잘 보여주는 귀한 작품으로 꼽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공민왕의 개혁 정치
고려 31대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몽골식 변발을 풀고 원나라의 옷을 벗어 자주적 의식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먼저 원과 결탁하여 큰 세력을 떨치고 있던 기철을 비롯하여 노책과 권겸 등 부원세력을 숙청하였다. 동시에 원의 내정 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성이무소를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여 원에 빼앗겼던 영흥 지역을 회복하였다.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과감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불법적인 토지와 노비를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켰으며, 국학인 성균관을 중건하여 신진 사림의 성장을 이끄는 발판을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최초의 인쇄 대장경, 초조대장경, 초조본현양성교본, 고려 11세기, 종이에 먹, 목판본, 국보>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에 포함된 <현양성교론> 권12이다. 초조대장경은 북송과 요나라의 대장경 등을 수정.보완하여 목판에 새겨 만든 것으로 고려 현종초부터 1087년까지 총 6,000여 권으로 완성하였다. 목판은 1232년 고려를 침공한 몽고군에 의해 불타버렸고, 지금은 인쇄한 경전만 수백여 권 남아있다. 초조대장경은 대체로 목판 1면에 14자씩 22행을 새긴다. 종이에 찍은 뒤에는 순서대로 길게 이어붙여 두루마리 형태로 말고 첫번째 종이의 바깥면에 감색 종이를 덧대 표지로 삼는다. 표지에는 경전 제목과 경전 보관 상자의 천자문 순번을 적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장경판전 내부에 모셔진 팔만대장경 목판>

천년을 지켜온 팔만대장경
목판 인쇄는 11세기에 새겨 낸 초조대장경과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 그리고 13세기 전반에 판각한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 대표적이다.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어 현재 인쇄본만이 전한다. 재조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판각하였고, 전해지는 한역대장경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금속으로 만든 고려의 활자, ‘復’자 금속활자, 전 개성 출토, 고려>

낱낱의 글자들을 만들어 조합해 책을 찍는 활자인쇄는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전달할 수 있게 하여 지식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중 구리나 납 같은 재료로 만든 금속활자는 활자의 주조뿐 아니라 인쇄용 먹물 제조, 종이 제작처럼 인쇄에 다양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고려는 기록상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했는데, 이는 고려의 기술력을 증명한다. 이 활자는 개성 지역의 고려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활자와는 달리 활자의 생김새가 고르지 않고 뒷면이 타원형으로 들어가 있는데, 이는 조판할 때 밀랍을 사용해 활자를 고정시키기 편하도록 한 의도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 <직지>
고려에서 금속 활자를 사용한 것은 1239년 목판으로 펴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기록을 통해 호가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원래 금속 활자본인데 목판으로 다시 인쇄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세기 전반에 이미 고려에서 금속 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1377년 청주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다는 기록이 있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의 인쇄 문화
고려시대 인쇄 기술은 불교의 융성과 함께 크게 발전하여 사원의 출판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고승과 그들을 따르는 문도들은 사원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문적 경험과 인력을 동원하여 활발한 출판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사원의 출판 활동은 종이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켜 제지술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성리학은 원나라에서 왕을 모시면서 오랜 기간 머물렀던 관료이자 학자인 안향.백이정 등이 관련 서적을 국내에 소개하였고,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에 간 이제현이 중국의 성리학자들과 학문적이 교류를 하면서 많은 학문적인 깊이를 더했다고 한다. 당시 초강대국 원나라를 중심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기때문에 원나라 간섭하의 고려정권이었지만, 큰 영향을 미친 많은 학문적.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주희의 사상이 집약된 성리학 기본서 <주자대전>, 주희 지음, 135권 60책, 조선, 1771년, 종이에 먹, 목판본>

유학을 집대성하여 성학으로 완성시킨 남송의 학자 주희의 글을 모은 문집이다. 주희가 자신의 사상을 상세히 설명한 여러 편의 글과 학자.문인.관료들과 묻고 답한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성리학의 핵심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1290년 유학자이자 관료였던 안향이 원나라에서 들여옴으로써 전래되었고, 이후 고려사회에 성리학이 정착함에 따라 널리 읽혔다. 특히 좃너시대에는 이황이 <주자서절요>를 편찬하고, 송시열이 <주자대전차의>를 짓는 등 조 선 성리학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 최초의 성리학자 안향의 초상화, 조선후기, 비단에 채색>

고려의 유학자 관료 안향의 초상화이다. 화면 상단 여백에 적은 아들 아우기의 글에 따르면 1318년 왕명으로 안양의 초상화를 그려 문묘에 봉안하였는데, 이때 안향의 고향마을 수령이 향교에 모시기 위해 한 부를 더 모사하였다고 한다. 지금 보는 초상화는 향교에 모신 초상화를 따라 조선후기에 다시 그린 것이다. 안향은 고려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인물이다. 1289년 원나라에 갔다가 주희의 문집 <주자서(주자대전)>을 보고 직접 베껴서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고려에서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안향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책, 회헌선생실기, 조선 후기, 5권 3책, 종이에 먹, 목판본>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유학자 관료 안향과 관련된 글을 모은 책이다. 전체 5권으로 구성되었는데, 권1에는 안향이 직접 쓴 시와 문장을 실었고, 권2부터는 여러 기록에서 안향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거나, 후대 인물들이 안향에 대해 쓴 글, 안향을 배향한 소수서원 관련 기록을 모은 것이다. 내용 중 특히 <유국자제생문>이라는 글이 주목된다. 성균관 학생들에게 보이기 위해 쓴 것인데, 여기에 안향은 불교를 비판하며 성리학에 힘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불교계의 폐단을 지적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성리학을 수용.연구하였던 고려 말 유학자들의 사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의 초상화,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목은 이색의초상화이다. 이제현의 문인이며, 고려 말의 ‘삼은 (옥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중 한 사람이다. 이색은 공민왕의 개혁 정택에 따라 1367년 성균관을 다시 지었고, 정몽주.이승인.박상충 등 쟁쟁한 신진 유학자들을 교관으로 임용하여 성균관의 성리학풍 진작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후에는 정도전 등의 급진개혁파 신진사대부들과 대립하며 이성계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여 고초를 겪었다. 화면 좌우의 여백에 권근이 쓴 글이 있다. “타고난 인품은 순수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났으며, 성인의 학문은 그 정밀함을 다하였다. 실천은 매우 독실하였고, 문장은 그 표현이 기묘하도다,”하고 하여 이색의 인품과 학문, 문장을 크게 칭송하고 있다. 이색은 권근 외에 김종직, 변계량 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여 조선 초기의 정치와 학문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정몽주와 김경조를 기리는 비, 녹사비명탑본첩, 조선, 1824년>

개성 선죽교는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곳이다. 주변에는 여러 개의 비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정몽주와 김경조를 함께 기리며 1824년 건립한 이 비이다. 김경조는 관청에서 기록을 담당하던 하급 관원인 녹사였다. 정몽주가 피살되던 밤, 말 고삐를 잡고 수행하였다고 알려졌다. 야사에 따르면, 갑자기 괴한들이 튀어 나오자 김경조가 곧장 정몽주를 감싸 안았고, 그대로 몽둥이와 철퇴에 맞아 함께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충신의 절의를 대표한다면, 김경조는 주군을 위해 목숨도 내던지는 충정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돌에 새긴 정몽주의 절의, 유묵석각, 조선>

우리 역사에서 명필로 손꼽히는 신라의 김생과 최치원,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안평대군 이용과 상수침.황기로의 글씨를 모아 돌에 새겼다. 정몽주의 글씨는 1362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곽추를 전송하며 정몽주가 직접 쓴 시의 일부 구절을 따온 것이다. 과거시험 동기인 곽추가 국정의 잘잘못을 비판하다가 낙향하자,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보다 차라리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내용의 시를 쓴 것이다. 신념 깊은 성리학자이자 문인 관료로서의 절의가 잘 드러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새로운 사상, 성리학의 도입
몽골의 침략과 원 간섭기를 겪으면서 고려 농민들의 항쟁과 유망은 지배 질서를 위태롭게 하였고, 고려인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었던 불교는 여러 모순과 폐단 속에서 빠지게 되었다. 고려 사회는 이런 혼란한 현실을 타개하고 희망적인 사회를 모색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였고, 원을 왕래하던 안향과 그의 제자 백이정 등에 의해 성리학이 도입되었다. 공민왕의 개혁으로 성균관이 중흥되고 성리학풍이 일어나면서, 점차 과거 시험에도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권부가 주자의 <사서집주>를 간행하며 성리학의 보급에 힘쓴 이후, 이제현.이색.길재 등의 유학자들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이들은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는 공민왕 사후에 극단적인 반동정치가 있었다. 반동세력은 신흥강국인 명을 적대시하고 원을 가까이하는 시대착오적인 정치를 하였으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극복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이성계, 최영 등의 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형국이 되었다. 고려말 유력가문 출신의 최영은 온건개혁파의 지지를 받았으며, 함경도 영흥 토호 출신인 이성계는 한미한 출신의 급진개혁파의 지지를 받아 경쟁관계를 이루었다. 새로이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이들과 힘을 합쳐, 토지제도 개혁 등을 통해 권문세가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고 조선 건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성계와 조상들의 업적을 노래한 <용비어천가>, 조선전기, 종이에 먹, 목판본>

한글로 간행한 최초의 문헌으로 이성계의 4대 조상과 태조 이성계, 태종의 업적을 노래한 125건의 가사를 실었다. 이 중 9번~14번이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한양천도 과정을 읊은 것이다. 9번 가사 설명 중에 이성계가 제시한 ‘사불가론’의 내용이 보인다. 1388년 명나라가 북쪽 변경지역을 요구하며 압박하자 우왕과 최영은 역으로 명나라 요동지역을 치기로 했다. 이때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는 결국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 등을 제가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위화도가 잘 표현된 의주지역 지도, 동여도, 김정호 제작, 조선 1850년대, 종이에 채색>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보다 먼저 만든 지도이다. 전국을 22첩으로 나누어 손으로 그린 후 채색하였다. 전반적으로 <대동여지도>와 비슷하지만 더 많은 지명과 정보를 표시하여 가장 상세한 전통 지도로 손꼽힌다. 제8첩 마지막에 의주 일대와 중국 요동 지역을 통과하는 도로망 지도를 실었는데, 압록강 가운데 그린 여러 섬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위화도이다. 북쪽 해안선을 따라서 산등성이를 그려 대략적인 지형을 표현하고, 섬 이름 ‘위화’를 적었다 그 아래에는 ‘둘레 40리’라고 써서 섬의 크기도 밝혔다. 작은 섬인 위화도의 주요 특징을 잘 표현한 지도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위화도가 크게 표현된 군사지도, 청구관해방총도, 조선 18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보물>
<위화도 부근>

국경지역의 방어시설을 망라한 대형 군사지도이다. 만주지역과 일본까지 포함하여 국제적 관점에서 육상 및 해상 방어시설을 한눈에 살피도록 제작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군사시설을 자세히 묘사하고,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를 붉은 선으로 표시하여 당시의 군사작전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압록강 하구에 그린 타원형의 섬이 위화도이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지역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서 고려시대부터 국방의 요지였다. 길이 9km 남짓한 작은 섬이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실제보다 크게 그렸다. 1388년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가 도중에 군대를 돌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이성계의 외교 조력자 조반, 조반 초상, 조선후기 이모본, 비단에 채색, 복제품>

조반(1341~1401년)은 12세부터 원에 살면서 몽고어를 배웠고, 이후 원 조정의 통역관이 되었다. 원이 멸망하자 고려로 돌아와 사신으로 명을 오가며 외교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듬해인 1389년 공양왕이 새로 즉위했음을 알리기 위해 다시 명에 갔다. 이때 고려의 관료 윤이와 이초가 황제에게 이성계 일파가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장차 명을 공격할 것이라고 고발하였는데, 조반이 잘 설명하여 무마시켰다. 얼마 후 귀국한 조반은 이 사건을 보고하였고, 그 결과 이성계 세력에 반대하던 많은 이들이 고문을 받고 옥에 갇혔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조반은 개국공신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새 왕조의 여명,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성계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에서 대대로 천호직을 세습해 온 변방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공민왕이 이 지역을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고려의 벼슬을 받았고, 동북권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고 점차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한편 명이 원을 몰아내고 중국을 차지하게 되자 공민왕이 수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고 하였다. 당시 국내외적 정치 상황에 불안을 느낀 우왕은 최영과 함께 정치적 난국을 타개할 방책으로 요동 정벌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진행하며 새로운 왕조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2.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