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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근세관] 고려, 불교문화

고려시대는 불교에 대한 국가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행사하던 사원은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대지주로 행세하였고, 숙박시설인 원을 경영하거나 팔관보나 광학보를 통해 일종의 대부업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학식과 덕망이 높은 고승을 왕사나 국사로 임명하여 국가적 통합을 도모하는 상징적 존재로 삼았다.

의천(義天: 1055~1101년)은 고려시대 왕족 출신의 승려로 시호인 대각국사로 잘 알려져 있다. 송나라에 유학하였으며 중국 불교계에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불법을 진작시키는데 불교 전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많은 책을 수집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고려 천태종의 창시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화엄종의 영도자 대각국사 의천, 대각국사진영, 조선후기 1805년, 순천 천암사 소장, 보물, 복제품>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0은 고려 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제11대 왕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개경 영통사에서 출가하였고, 2년 만에 교종 승려 최고의 승계인 승통에 올랐다. 1084년에는 송나라에 유학하여 고승 정원(1011~1083)과 깊이 교류하며 중국 불교계와 황실에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 무렵 의천은 불법을 진작시키는데 있어서 전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책을 수집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경전을 구해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집한 전적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후 총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하였고, 1091녀부터 흥왕사에서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그동한 수집한 수천 권의 책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문종에 이어 친형인 숙종이 즉위하자 의천은 왕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 1097년(숙종 2)에는 천태종을 개창하여 이론과 실천을 두루 중시하는 새로운 수행의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화엄종 사찰 영통사에서 사용한 공양물, 청동빈도로존자상, 고려>
<화엄종 사찰 영통사에서 사용한 공양물, 청동동잔, 고려>

오른쪽 청동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긴 불자를 든 모습의 나한상이다. 대좌에 ‘제1 빈도로존자 영통사에서 …상 2구를 …조성했다.’라고 새겼다. 이 나한이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 16명 중 첫 번째인 비노달발라타사이며, 영통사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 청동등잔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얹어 불상 앞에서 불을 밝히는데에 사용한 공양구이다. 뒷면 테두리에 ‘영통사 금당 주존불 앞에서 축원함…’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이 청동등잔 역시 영통사에서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통사는 1027년 고려의 수도 개경에 창건되었다. 화엄종 중심 사찰로 대각국사 의천이 주석하였던 곳이다. 의천의 생애와 업적을 새긴 <대각국사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0

무신정권 하의 불교계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 지방민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지눌의 수선사로 대표되는 결사 운동이 그것이다. 결사 운동을 선도한 지눌은 모든 승려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두루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여러 주장은 선종을 바탕으로 교종을 통합하는 조계종의 성립으로 나아갔다. 수선사는 제2조 혜심 때에 이르러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 및 유학자 관료들과도 연결되면서 크게 발전하였고, 참회수행을 강조한 요세의 백련결사와 더불어 고려 후기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려 불교계의 지형을 바꾼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 권수정혜결사문, 고려 1190년 지음, 조선 1608년 간행, 종이에 먹, 목판본>

1170년(의종 24) 무선정변을 계기로 고려 불교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 교단이 크게 위축되고 승려와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신앙결사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대표 사례가 보조국사 지줄이 결성한 정혜결사이다. 선종 승려인 지눌은 당시 불교계가 세속적 이익에 빠져 본질을 잃어 버렸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자고 주장혀며 1190년 정혜결사를 맺고,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의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었다. 이후 정혜결사(수선사)는 승려들은 물론 왕족과 관료, 하층민에까지 널리 호응을 얻어 불교계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고, 지눌은 고려 선종의 대표 조사로서 존숭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나옹선사(1320∼1376년)는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로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나옹(懶翁)은 그의 호이며, 시호는 선각(禪閣)이며 공민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중국 원나라 법원에서 인도의 승려 지공의 지도를 받았으며,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머물면서 불법을 전했다고 한다. 회암사 주지를 지냈으며, 고려말에서 조선초 불교를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승려로 전국의 많은 사찰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승탑은 양주 회암사를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원주 영전사에 세워졌으며, 여주 신륵사에는 그를 모신 조사당이 있다.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선각왕사 혜근, 나옹화상진영, 20세기, 비단에 채색>

나옹으로 더 잘 알려진 혜근은 고려말의 이름난 선종 승려로서 중국에서 새로운 수행법을 도입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인물이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에 유학하며 인도 승려 지공으로부터 배우고, 십여 년 만에 귀국하여 공민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1371년(공민왕 20)에 왕사가 되어 선종과 교종을 총괄하는 지위에서 불교계를 이끌었고, 왕실에서 발원하거나 국가행사로 개최하는 각종 법회를 주관하였다. 1374년에는 양주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법회를 열었더니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절 마당이 들썩였다고 한다. 이 일로 불교에 비판적이던 유학자 관료들의 탄핵을 받아 밀양 영원사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병에 걸려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왕사로서 한양을 수도로 정하는데에 관여하였던 무학대사가 그의 제자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왕명을 받들어 국가사업으로 만든 사경, 감지은니 불공견삭신변진언경, 고려 1275년, 감색 종이에 은니, 국보>

고려는 2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왕자 출신의 대각국사 의천은 동아시아 승려들의 해설설서(교장)를 모아 간행하였다. 이처럼 불교 전적 간행 사업을 이어간 결과 이제 고려는 대장경-교장 세트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충렬왕은 대장경 사경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경전의 보존과 유포가 주요 목적인 목판인쇄와 달리 금.은 글자로 대장경을 베낌으로써 국가 차원에서 공덕을 쌓고 복을 기원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충렬왕 즉위 이듬해에 만든 이 경전이다. 경전 끝에 짧은 글귀를 적어 이 사경이 국왕의 명을 받들어 만든 것임을 밝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죽은 가족들의 평안을 기원하며 만든 사경, 감지금니화엄경행원품신중합부, 고려 1350년, 감색 종이에 금니>

불교경전에서 갖가지 보배를 공양하는 것보다 경전 한 구절을 베껴 쓰는 공덕이 훨씬 크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널리 퍼지는 데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손으로 직접 경전을 베끼는 신앙 활동으로 사경이 유행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점점 더 세밀하고 화려하게 발달하여 고려후기에 황금기를 맞았다. 보통 어두운 남색이나 황토색으로 염색한 종이에 금박 또는 은박을 개어서 글자를 쓰고, 마지막에는 사경으로 얻을 공덕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한 발원문을 덧붙였다. 이 사경에는 1350년에 연안군부인 이씨가 죽은 남편과 친정 부모를 위해 발원하였다고 적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화려하게 장엄한 사경이 표지,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고려 1330년, 감색 종이에 은니, 국보>

부채처럼 접어서 만든 절첩본 사경은 가장 바깥쪽 면이 표지가 된다. 여기에 여러 장의 종이를 두텁게 붙이고, 금니와 은니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먼저 4개의 보상화문을 그리고 주위에 당초문을 두른다. 앞표지 중앙에 장방형을 구획해서 경전제목을 쓰는데, 이때 아래에는 연화대좌를 받치고, 위에는 보개를 덮어서 부처님의 고귀한 말씀임을 강조한다. ‘묘법연화경 권제7’이라고 쓴 제목 앞에 따옴표 같은 기호가 보인다. 학이 서있고 뱀은 기어가는 모습 같다고 해서 ‘학립사형’이라고 하며, 경전을 펼치기에 앞서서 먼저 마음을 청정하게 만드는 주문인 <개법장진언>을 상징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요약한 사경변상도,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권47, 고려 14세기 후반, 감색 종이에 금니,>

사경을 더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엄하는 방법 중 하나가 경전 첫머리에 변상도라고 하는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이다. 보통 경전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여 한 장면으로 표현한다. 이 변상도는 <화엄경> ‘불부사의법품’을 그린 것이다. 화면 오른쪽은 비로자나불의 설법 장면이다. 여러 보살들에게 둘러싸인 비로자나불이 중앙에 앉고, 그 아래에 부처를 대신하여 가르침을 전하는 청련화보살이 무릎을 꿇고 있다. 화면 왼쪽에는 천만 가지 모습으로 변화하며 중생을 깨우치는 십일면관음보살을 그렸다. 자유자재하게 형상을 바꾸는 부처의 위대한 능력을 찬탄하는 의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시대의 불교 문화
태조는 자손에게 남긴 훈요십조를 통해서 불교 국가로서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개경에 법왕사 등 10대 사찰이 세워지고, 점차 전국에 걸쳐 사찰이 만들어졌다. 불교에 대한 국가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행사하던 사원은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대지주로 행세하였고, 숙박시설인 원을 경영하거나 팔관보나 광학보를 통해 일종의 대부업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광종대부터 승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학식과 덕망이 높은 고승을 왕사나 국사로 임명하여 국가적 통합을 도모하는 상징적 존재로 삼았다.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국가적 행사를 통해 공동체적 인식을 확대해 나갔다.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부터 내세에 서방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고려인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신분과 계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고려는 불교가 크게 흥성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와는 달리 불상, 석탑 등은 화려한 문화재를 남겨 놓고 있지는 않다. 통일신라말부터 불교의 중심이 된 선종의 영향을 받아서 신앙의 중심이 탑이나 불상 같은 상징물에서 불경 등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상보다는 불경의 내용을 표현한 탱화에 예술적으로 빼어난 유물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1 경기도 평택시 월곡동 발견, 고려>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2 고려>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3 고려>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탑을 청동이나 돌 등으로 작게 만들어 큰 석탑 안에 넣는 관습은 통일신라시대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이 관습은 고려시대에 들어 확산되었으며, 탑뿐만 아니라 궁궐이나 큰 사찰의 전각 안에도 모셔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탑들은 공양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곤 했다. 이것들은 주로 목탑을 모범으로 만들었으므로, 목탑의 건축부재를 그대로 표현하여 끼워맞추는 식으로 조립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

또한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호족들이나 향리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철불상을 제작하거나 사찰을 건립하는 등 많은 불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경주 중심의 통일신라와는 달리 지방적인 색채가 강한 투박하면서도 지역색이 강한 토속적인 불상들이 많이 제작되면서 고려적인 특징을 갖는 많은 불교 유물들을 남겨 놓고 있

<구리로 만든 비로자나불상, 청동비로자나불좌상, 경기도 성남시 판교 출토, 고려>

2008년 성남 판교 신도시를 만들면서 진행된 택지 개발 공사 도중 출토된 청동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비로자나불은 진리를 상징하는 부처로, 왼손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조된 솜씨는 빼어나나, 상의 어깨가 다소 움츠러 들어 있어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 조사상 2점과 같이 출토되었지만, 크기나 조각기법에 차이가 커서 애초 한 벌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구리로 만든 조사상, 청동조사좌상, 경기도 성남시 판교 출토, 고려>
<구리로 만든 조사상, 청동조사좌상, 경기도 성남시 판교 출토, 고려>

이 상들은 2008년 성남 판교 신도시를 만들면서 진행된 택지개발 공사 때 발견되었다. 승려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서 합장을 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대개 조사, 곧 학문이 뛰어난 고승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승가대사 또는 지장보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승가대사는 서역 출신 승려로 당대에 중국에서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죽은 뒤에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 전에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한 보살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청동 다층 소탑, 1 고려>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청동 다층 소탑, 2 고려>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청동 다층 소탑, 3 고려>
<청동으로 만든 작은 탑, 청동 다층 소탑, 4 고려>
<사리장엄구, 1 고려 11세기>
<사리장엄구, 1 고려 11세기>
<사리장엄구, 2 고려 14세기 3 고려>

사리를 모시는 귀한 그릇, 사리장엄구
부처님이 열반한 뒤 화장하여 나온 물체인 사리는 곧 부처님과 같은 존재였다. 사리를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사람들은 사리를 넣는 용기를 정성들여 만들고 주위를 장식하여 탑에 봉안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부처의 사리인 진신사리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인 법사리, 승려를 화장해 나온 승사리도 존숭하게 되었고, 이를 극진히 모시고자 하였다. 이를 담는 용기인 사리기와 그 장식품, 사리에 바치는 공양품들을 통틀어 사리장엄구라고 한다. 불교도들은 금.은.도자.수정.돌 등 각기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여러 겹의 사리기를 만들었다. 이는 귀중한 것이 담겨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사리에 가까운 부분일수록 귀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사리기는 매우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탑을 모방하여 만들어지기도 하였고, 도자기 외함 안에 사리가 담긴 수정이나 유리, 금속제 병을 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고려 후기에는 원의 영향으로 라마탑의 모습을 한 다층사리기가 더러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승려의 지팡이 머리 장식, 금동 석장 두식, 고려>
<금강령과 금강저, 고려>
<금강령과 금강저, 고려>

승려들이 지니고 다니던 물건, 승려 지물
승려들이 지니는 지팡이를 석장 또는 육환장이라고 하는데, 윗부분에 금속 장식을 달고 여섯 개의 고리를 꿴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지팡이는 고려불화에도 등장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나무 부분은 삭아 없어졌지만 윗부분의 장식은 남아 고려시대 석장의 모습을 알려준다. 원 간섭기에 유행한 밀교 의식용 도구인 금강령과 금강저는 고대 인도의 무기를 본떠 만든 것으로, 마음 속에 번내를 없애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호신불>

개인의 믿음, 호신불에 담기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현실에서의 행복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작은 호신불.경상.불감 등을 만들어 지니고 다녔다. 여기에는 당시 유행했던 관음보살이나 비사문천, 마리지천 등이 새겨지곤 했다. 비사문천은 한 손에 보탑을, 다른 손에 창을 든 모습으로 재물과 복.부귀를 상징하며, 마리지천은 6개 혹은 8개의 팔에 보탑.금강저 같은 여러 가지 물건을 잡은 모습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이다. 이들이 새겨진 물건은 고려 사람들에게 예배의 대상이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내세의 복을 구하는 도구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부처님의 말씀을 담는 경함.경갑.경통, 1 개성 출토 고려 2 고려>
<부처님의 말씀을 담는 경함.경갑.경통, 1 개성 출토 고려 2 고려>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불경은 부처님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고려 사람들은 불상과 보살상, 사천왕상 등을 조그맣게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녔고, 불경 또한 작게 필사하거나 인쇄해서 금속으로 만든 경함.경갑.경봉에 넣어 다녔다. 지니고 다닐 수 없는 크기의 경전은 그에 맞는 크기의 경합에 보관하였는데, 이 때 겉만 보고 쉽게 알 수 있도록 경전의 이름을 새긴 경패를 붙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구리에 금을 입힌 경패, 금동 경패, 고려>

불경을 담는 경함에 부착했던 금동 경패이다. 앞면에는 위와 아래에 모두 연꽃 장식을 하였고, 합장한 자세의 신장상을 타출로 표현하였다. 뒷면에는 “대방광불화엄경권제오”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이 경패가 <화엄경>을 보관하던 경함에 딸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비사문천과 관음보살이 함께 새겨진 거울, 고려>
<비사문천과 관음보살이 함께 새겨진 거울, 고려>
<부처가 새겨진 거울, 고려>
<가사를 고정하는 띠고리, 가사 장식, 1 고려, 2 고려>
<승려의 머리카락을 미는 칼, 청동제 삭도, 고려>
<“청년 4년”이 새겨진 종,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풍리 발견, 1058년, 보물>

경기도 여주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종이다. ‘청녕’은 요 도종이 사용했던 연호로, 청녕 4년은 고려 문종 12년인 1058년이다. 고려의 종은 11세기 무렵부터 위패 모양의 명문틀이 나타나고, 종의 윗부분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꽃잎 모양의 대帶가 표현되며,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의 개수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종은 신라의 종에서 고려의 종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이 종은 당시 고려의 국왕인 문종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1 다리가 세 개인 향로, 청동제 삼각 향로, 고려>
<2 청동으로 만든 향환, 청동제 향완, 고려 11세기 후반>
<3 은으로 무늬를 넣은 향완, 청동 은입사 향완, 고려 13~14세기>

고려시대 향완의 시기별 유행
고려시대 초기에는 통일신라시대 다족 향로의 전통을 이어 세 발 받침에 뚜껑을 갖춘 형태가 많이 확인되지만, 점차 뚜껑과 다리가 사라지고 입술이 넓어지는 형태가 유행하게 된다. 12세기 중반 이후에는 은입사 기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무늬를 장식한 향완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3 뚜껑 달린 청동 항아리, 청동 유개호, 개성 운봉사 터 출토, 고려>
<1 청동 향로의 손잡이, 청동 향로용 사자진병, 개성 운봉사 터 출토, 고려>
<2 청동으로 만든 향로, 청동 향로, 개성 운봉사 터 출토, 고려>

개성 운봉사 터에서 출토된 유물, 운봉사지 출토품, 개성 운봉사 터 출토, 고려
개성의 고려시대 사찰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불교 의식구로, “운봉사”란 이름이 새겨져 있어 절의 옛 이름이 밝혀졌다. 현재 전시된 것은 그 중 병향의 손잡이와 청동향로, 청동항아리이다. 병향로의 손잡이에는 방울을 단 사자를 함께 주조하는 방식으로 붙였는데, 이는 고려 특유의 금속공예 기법이다. 청동 향로에는 원래 뚜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생김새에로 보아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항아리는 굽과 몸체,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달리 큰데, 이런 항아리는 사찰에서 쓰기 위해 특별히 주분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1 청동으로 만든 범종,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원당리 발견, 고려, 13세기>
<범종 2 고려>
<범종 3 고려>

깨우침을 허공에 울리다,
범종은 사찰에서 사람들을 모으거나 공양 등의 시간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였던 법구의 일종으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통일신라 이후의 것들이 주로 남아 있다. 고려의동종은 통일신라 동종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11세기부터 명문을 넣는 위패 모양의 공간이나 정면을 바라보는 용뉴, 몸통 위에 삐죽삐죽 솟은 거치문 장식 등 고려 종 특유의 모습이 나타나게 한다. 13세기 무렵부터는 음통 부분에 3~8개의 보주 모양 장식이 붙고, 용이 여의주를 잡는 등의 양식적 특징이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풍탁 1 고려>
<풍탁 2 고려>

바람을 담아 맑은 소리를,
풍탁은 사찰의 탑이나 건물 모서리에 달아 장식효과를 주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게 하고자 만든 장엄구의 일종으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다. 고려 전기에는 전시품 1처럼 통일신라 이래의 종 모양 풍탁이, 고려 후기에는 전시품 2와 같이 사다리틀 모양의 풍탁이 유행하였다. 종모양 풍탁은 작은 연꽃 모양 돌기나 당좌 같이 실제 범종과 비슷한 모습이고, 사다리꼴 풍탁은 불.보살상을 비롯해 범자와 하트 모양 구멍처럼 다양한 장식이 붙는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청동으로 만든 북, 청동제 금고, 함경남도 출토, 고려>
<청동으로 만든 북, 청동제 금고, 고려>

사찰에서 공양 시간을 알리거나 죽은 이의 극락 왕생을 기원하며 부처님께 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북 모양의 악기로, 반자나 금고라고도 부른다. 뒷면이 트인 것과 측면에 구멍이 뚤린 것으로 구분된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지름 40cm 안팎의 금고가 쓰였는데, 떄러서 울리는 부분인 고면에는 구름이나 연꽃 따위의 무늬가 장식되곤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신앙으로 피어난 불교 미술
불교 미술 가운데 불상과 보살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회화나 조각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특히 화려하면서도 우아함을 간직한 고려 불화는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불교 의식에 필요한 범음구와 의식구, 장엄구 및 호신불 등의 불교 공예품 역시 고려인의 세련된 미의식과 결합되어 고려 불교 미술을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켰다. 고려시대에 행해진 다양한 불사는 수도인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에서 행해졌으며, 이는 왕실과 관료, 군인, 향리 등 폭넓은 계층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2024년
  2. 위키백과,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