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세거지로 태조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전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조선왕실의 본향을 여겨졌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과 같아고 하여 전주감영 객사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조경묘肇慶廟는 전주이씨 시조를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 왕실의 본향으로서 갖는 역사적 의미와 정신적 상징성이 매우 크다. 전주와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뿌리를 상징하고 있다.

황산대첩荒山大捷은 태조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왜구를 크게 물리친 전투로, 전북 남원 근처에서 벌어졌다. 이성계가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 결정적 사건이며, 훗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군사적·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크게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왜구 세력이 큰 피해를 입고 한반도에 힘을 잃게 된 계기가 되었다.

황산대첩은 고려말인 1380년, 이성계가 전라도 남원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 아지발도를 크게 물리친 전투이다.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1577년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에 의해 훼손되었으나 1958년에 비석을 복원하여 훼손된 비석과 함께 두었다.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의 창업을 송축한 서사시이다. 조선 왕실의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 태종에 이르는 6대의 행적을 중국 고사에 비유하며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왕이 되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덕을 쌓아서 하늘의 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후대 임금은 선조의 공덕을 헛되이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홍만종이 1705년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간단히 엮은 책으로 <삼국유사>,<고려사> 등을 참고하여 단군에서부터 조선 현종대까지의 사적을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동국역대총목>에는 이성계가 풍패의 옛 땅인 전주를 부府로 승격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대한제국기인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황제의 명령으로 우리나라의 상고로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분류하여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예고에는 조경묘의 건립 유래와 봉안의식에 대하여 서술되어 있다. 조경묘는 경기전의 북쪽에 세워졌으며, 경기전의 예에 따라 봉안의식이 진행되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1771년 영조가 전주에 조경묘를 건립하고 경위와 감회를 적은 글이다. 중국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이 처음 덕을 쌓아 하늘의 명을 받았듯이, 조선왕조는 선을 행하고 덕을 쌓은 시조가 있었기에 오늘의 조선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조경묘 또한 시조로부터 천여 년이 지나 전주에 세운 것은 주나라에서 후직을 제사했던 것과 같은 뜻이라 하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1840년 11월에 묘관이 이정근을 조경묘 시위유사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차첩이다. 조경묘는 전주이씨의 시조 사공 이한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이화 개국공신녹권(국보)’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공신들에게 내린 것으로 개국공신록권에 해당한다. 이 문서는 태조의 이복동생 이화에게 내린 것이다. 약 33.3cm 닥나무종이 9장을 붙여 만들었는데 연결한 곳, 첫머리와 끝머리에 옥새가 날인되어 있다. 내용은 녹권을 받은 사람의 성명, 공적 내용, 공신과 가족 등에 대한 표상과 특전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에서 처음 발급된 녹권으로 역사적, 문서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이화는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제로,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1392년에 개국공신에 오르고 의안백에 봉해졌다. 이 녹권은 총 8매의 종이를 이어 붙여 만들었는데 연결한 곳마다 옥새를 날인하였다. 첫머리와 끝에도 옥쇄가 날인되어 있다. 녹권에는 태조 이성계의 개국동기, 훈공에 관한 등급결정, 포상에 관한 절차, 포상내용, 공신에 대한 처우, 공신의 부모와 처자에 대한 봉작, 추증, 음직, 노비 수여 사항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공신의 논공과 포상을 전담한 공신도감 이외 여러 부서명이 명시되어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조선 제8대 국왕 예종의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이다. 이 태항아리와 태지석을 묻은 태실은 원래 완주군 구이면 태실마을에 있었다. 태지에 따르면 예종은 1450년에 태어났고 1462년에 태를 묻었다. 태실의 이름과 장소를 새긴 태실비는 1578년에 세워졌다. 예종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1928년 서울로 옮겼다가 서삼릉 경내에 다시 봉안되었다. 이때 파괴된 태실과 비는 1970년 경기전 경내로 옮겨왔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태실
아기의 태를 담은 항아리를 태항아리 혹은 태호라고 한다. 태는 생명의 근원이 된다고 여겼고 특히 왕실에서는 국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여 출산 후에도 소중히 다루었다. 태를 씻는 세태의식을 마친 태는 동전 한 닢을 넣은 작은 내항아리에 넣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입구를 덮은 다음 빨깐 끈으로 묶어 밀봉하였다. 이 항아리를 큰 외항아리에 넣고 빈 공간은 솜으로 채운 후 길한 방향에 모셔두었다. 이후 미리 정한 태봉으로 옮겨, 아기가 출생한 때와 태를 매장한 시기를 기록한 태지석과 함께 묻었다. 그리고 태실의 이름과 장소 등을 새긴 태실비를 세움으로써 태실의 조성이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실은 주인공이 국왕이 되면 다시 확장해서 설치하는 가봉 의식을 거쳤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있던 1점만 남아 있다. 이 그림은 익선관과 푸른색 곤룡포를 입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며 용상에 앉아 있는데 명나라 태조의 초상화와 유사한 자세이다. 현재의 그림은 구한말 고종 때(1872년) 원래 있던 초상화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이다. 1408년 태조가 세상을 떠난 뒤 전주부의 요청으로 경주 집경전의 어진을 본떠 그려 1410년 전주부에 봉안하였다. 조선 역대 왕들의 초상 가운데 전신상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이 어진이 유일하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오목대는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이성계가 전주 이씨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베푼 곳이다. 비의 앞면은 고종황제가 ‘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고 직접 썼다. 비의 뒷면에는 오목대와 이목대의 내력을 기록하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이목대는 태조의 고조인 목조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기 전에 살았던 곳이다. 비의 앞면은 고종 황제가 목조가 예전에 거주했던 곳이라고 하여 ‘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친필로 썼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조경묘와 조경단
조선 왕실에서는 조선의 중흥을 위하여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는 다양한 사업을 펼쳤습니다. 그중 하나는 1771년 조선 시조의 사당인 조경묘를 전주에 건립하고 시조 이한과 부인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신 것입니다. 영조는 조경묘를 건립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기원을 시조 이한에게까지 연결하여 그 권위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친 것입니다. 이로써 시조가 살았던 전주는 왕실의 고향으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고종 역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른 후 ‘황제국’의 지위에 밎게 선조들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1899년 고종은 시조 이한의 묘역이 있었던 건지산에 조경단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1900년에는 태조의 고조부 목조가 살았던 이목대와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이성계의 축하 잔치가 열렸던 오목대를 정비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고종은 자신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 세계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황제국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1854년 10월 19일에 전라도관찰사가 순창에 보낸 감결이다. 호남지역에 대한 여러 가지 처분을 비롯하여 정부에서 일어난 각종 정사를 알리는 내용이다. 조경묘와 경기전 내외를 모두 수리한 것과 여기에 노고를 한 신하들의 시상문제를 임금께 올려 윤허 받았다는 것과 완도를 독진으로 설정하여 줄 것을 상주하여 윤허를 받았다는 내용 등이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조경단 구역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표지석이다. 조경단 내에는 일반인이 거주하거나 농사를 짓는 일이 있어, 출입을 금지하는 명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 금표는 고종황제가 조경단을 정비한 후 세운 표지석으로, ‘창덕궁’이라고 새겨져 있다. 고종황제가 1911년까지 창덕궁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조경단 역시 고종황제 및 황실의 소유지라는 의미로서 창덕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1899년 고종은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역인 조경단을 정비하고 이한의 묏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에 제사를 모시는 단을 쌓고 비를 세웠다. 비의 앞면은 고종황제가 ‘대한조경단’이라고 직접 썼다. 또 비의 뒷면에는 전주부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 건지산이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소라고 밝혔다. 또한 태조로부터 영조를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경단의 내력을 새겨 전주가 왕실의 본향임을 강조하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전라도의 중심, 전주
조선의 개국으로 어향이 된 전주는 완산유수부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1403년 전주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 개국 직후 전라도를 총괄하는 감영이 설치되었다. 조선초기부터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는 제주도까지 포괄했던 전라도의 중심지였다. 전라감영은 전주부를 총괄하는 전주부영과 함께 전주부성 안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성이었던 전주부성은 객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앞쪽으로 서쪽에 전라감영, 동쪽에 전주부영이 자리했다. 그러나 전주는 전라도의 정치, 행정 기능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라도의 바다, 평야, 산에서 나는 풍부한 물산이 모이고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풍요로운 도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풍요를 바탕으로 전주는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궁궐에까지 올릴 정도이 수준높은 공예품이 만들어졌다. 또한 완판본이라는 이름으로 한양과 함께 출판 문화를 주도하였고 우리 전통 소리의 본 고장이 되었으며 개성 있는 서화를 발전시키는 구심점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전주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1897년 대한제국 탄생 후 고종의 지위도 국왕에서 황제로 격상되어 호칭, 복식, 의장 등에서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다. 특히 관직과 각종 문서의 변화에 따라 이에 사용하는 어보가 새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제고는 황제의 명령을 뜻하며, 제고지보는 정1품에서 종1품의 최고위 관료인 칙임관을 임명할 때 사용하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대한제국을 연 고종황제의 인장이다. 이 인장에는 1873년, 1888년, 1890년, 1892년, 1900년에 고종황제가 받은 존호들이 새겨져 있다. 존호는 왕실의 기념일이나 경사가 있을 때 왕과 왕비의 덕망과 업적을 찬양하며 세자 및 신하들이 올렸던 존귀함을 담은 호칭이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조선왕실의 족보는 단순한 가계도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왕실의 정통성과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공식자료이다. 정식명칭은 <선원록璿源錄>으로 조선 왕실의 선조부터 당대 왕족까지의 가계를 기록하고 있다. 왕조 500년 동안 왕권의 계승 질서, 제사 체계, 혼인 관계 등 왕실 운영의 핵심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은 왕실 계보를 요약한 책이며, <선원속보璿源續譜>는 후대 왕실 계보의 연속 편찬판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이다. 1681년부터 1931년에 이르기까지 각 왕대에 부정기적으로 수정, 보완하여 종신, 조신들에게 반포한 것을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왕실의 여러 경조사로 인해 새롭게 기록할 내용이나 변경할 내용이 생기면 수정하여 새로 간행하였다. 선원선계의 첫 부분에는 전주 이씨가 전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삼국시대부터 전주부의 연혁을 기록하였다. 또한 태조 원년 이래 전주가 어향으로서 완산유수부로 승격되었다고 기록하여 조선 왕실의 본향으로서 전주의 상징적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전주이씨 희안대군의 족보이다. 의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이방간이다. 이 족보는 조선 왕실의 근본이 전주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시조 이하의 계보와 희안대군파의 계보를 수록하였다. 특히 선원보략 부분에서는 태조와 관련하여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친 사실이 기록되어 조선 왕실에서 황산대첩을 태조 이성계의 중요한 업적으로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고종 연간에 간행된 조선 왕실의 종합적인 족보이다. 기존의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 이어 작성했다는 의미에서 선원속보라 이름 붙여졌다. 선원속보는 1860년에 작성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존하는 대부분은 1900년과 1902년 종정원에서 출간된 본이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전주부에서 1822년에 작성한 조선 왕실 후손의 명단이다. 왕실의 족보를 담당했던 종부시에서는 선원록에 올린 종실의 세계와 자손들에 대한 단자를 수합하였다. 이 문서는 전주부 내의 희안대군, 양녕대군, 의안대군 등의 후손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예조판서였던 이계맹이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며 올린 글이다. 이계맹은 1517년 명나라에 갔을 때 <대명회전>에 이인임과 그 아들 단이 4명의 왕을 살해했다고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귀국하여 보고하였으며, 이 공로로 광국원종공신에 올랐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조선 왕실의 족보
왕실은 하나의 가문의 성격을 넘어 국가로서의 성격을 지닙니다. 그렇기에 조선 왕실의 족보는 공적인 성격을 가진 국가의 족보였으며, 족보의 작성은 실록과 같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국왕을 중심으로 한 왕조체계를 유지한 조선왕실에서는 새로 출생하거나 사망한 왕의 친인척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종부시라는 관청을 설립하여 3년과 10년 단위로 왕실족보인 선원록을 수정, 작성하였습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경기전慶基殿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조선 왕실의 본향인 전주에 위치한 대표적인 왕실 유적이다. 1410년 전주부에 태조 어진을 모시기 위해 처음 세워졌으며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여러 부속건물들이 철거되었가 2004년 복원되어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기전은 1410년 창건된 이래로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강희이십오년’명 암막새는 1686년의 것인데, 이때의 중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기록된 것 외에도 여러 차례 수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경기전이 규모와 발자취, 여러 관원의 임무와 각종 제사 절차, 여기에 사용되는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만들어진 것을 1906년에 필사한 것이다. 앞부분에는 경기전과 부속 건물의 도식을 그려 넣어 경기전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경기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태조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진전을 세웠습니다. 진전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 태조 출생지인 함경도 영흥과 경주, 평양, 개성의 태조 옛 집터 그리고 전주 등 모두 여섯 곳에 세워졌습니다. 경기전은 1410년 전주에 세운 진전으로, 1409년에 전주부에서 태조어진을 모시기를 청한 것이 계기가 되어 건립되었습니다. 이듬해 경기전이 완공된 후 이곳에 경주 집경전의 어진을 본 떠 그린 태조어진을 모셨습니다. 1473년 경기전 내에 사고를 건립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기전의 태조어진과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화를 피해 무사히 현재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1442년부터 경기전은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으나,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일본에 의해 경기전 서쪽 부속채가 철거되었으며 1937년에는 별전이 철거되었습니다. 2004년 경기전 복원 사업이 완료되면서 철거되었던 부대시설들이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조선 왕실의 본향, 전주
전주는 조선 왕실의 선조들이 뿌리내리고 살던 지역입니다. 통일신라 문성왕 때 사공을 역임한 시조 이한에서부터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조상들이 전주에 살았기에, 왕실의 본향이 된 것입니다. <태조실록>,<용비어천가>,<선원계보기략>에는 전주가 왕실의 본향으로 공식적으로 기록되었고, 이로써 전주는 조선왕실의 본향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전주를 역사적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셔 놓은 경기전을 세웠으며 조선 왕실의 시조 이한의 위패를 세워 조경묘를 만들고, 묘역을 정비하여 조경단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주가 왕실의 본향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데에는 왕실의 존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전주의 백성들 역시 조선 왕실 본향으로서 전주의 위상을 인식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모시기로 요청한 것도, 전란에서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온전히 지켜낸 것도, 백성들이었습니다. 왕실 유적을 정비할 때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 역시 그들이었습니다. 전주는 왕실과 백성들이 모두 소중히 아끼고 지킨 역사적 공간이었습니다. 역사적 공간 전주를 조선 왕실과 지역민들로 연결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조선 왕실의 본향이었던 전주는 1392년 완산유수부로 승격되었으나, 1403년 전주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이 설치되어 호남지역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병풍은 전주성과 그 주변을 그린 지도다. 첫번째 폭과 마지막 폭에는 전주부의 변천 과정과 전주성 내외 주요 장송의 위치, 간단한 연혁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객사와 풍남문, 패서문 그리고 경기전과 조경묘 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실록을 보관한 상자이다. 상자 앞면에는 보관하는 실록의 명칭과 권수가 기록된 종이가 부착되는데 이 실록상자는 선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상자이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임진왜란과 조선왕조실록 수호
1592년 임진왜란이 일ㄹ어나면서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전 국토가 황폐해졌습니다. 조선은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왜적이 전주를 침범하자 관원과 백성들은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성왕조실록과 경기전에 모신 태조어진을 정읍현 내장산으로 이안시키고 이를 수호하였습니다. 유례없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과 결ㅇ기전의 태조어진이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모두 백성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호남지역의 지리지로 건치연혁, 관원 등 일반사항과 과거에 합격한 사람과 충의.효자.열녀 등을 나눠서 묶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과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고 지키는 데 공을 세운 전라도 태인의 선비 안의, 손흥록과 경기전 참봉 오희길의 사적도 포함되어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인좌의 난 등 국난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운 전라도 출신의 충신, 열사, 의사들의 공을 기록한 책이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정조가 왕세손 시절 대리청정을 반대한 세력의 반역을 진압하고, 왕세손을 도운 홍국영, 정민시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간기의 ‘완영’이라는 기록을 통해 전라감영에서 출판한 책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책가도는 책을 비롯하여 당시 귀중했던 여러 가지 물건들을 그린 그림을 말하며, 책거리도라고도 한다. 총 10폭의 병풍으로 붉은색 바탕의 책가도는 하단에 문갑이 설치되어 있는 듯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중간 중간에 수납장을 그려 넣었다. 책가 안에 문방사우와 괴석이나 수선화, 중국 고동기, 과일, 꽃 등 조선 사람들이 소장하고 싶은 귀한 물건들을 그려 넣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정조가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이휘지에게 직접 짓고 써서 내려준 시. 내용에는 예전부터 이휘지의 집안이 중요한 신하를 배출했던 사실을 말하고, 평안도에 가서도 지역의 이름처럼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정조 즉위 초의 독특한 글씨를 엿볼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영조가 기로사당상을 불러 만난 뒤 “기로의 신하에게는 부장하는 예가 있으니, 기로의 신하가 들어올때에는 그 자제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라”고 전교했다. 그리고 네자씩 다섯구절로 된 시를 써서 내려주었다. 이 때 내린 영조의 어필을 간행한 첩으로 뒷 부분에는 첩의 내력 등을 적은 이정보의 발문이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영조가 한남군 이어의 제단을 세우고 직접 짓고 써서 내려준 추모의 글이다. 한남군은 세종의 서자로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역모의 죄를 받고 유배지 함양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영조 떄에 와서 누명을 벗게 되었고 1742년 정도라는 시호를 받았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영조가 몸소 황단에서 절을 올리는 예를 행한 후 ‘황조일월해동대명’의 여덟자를 써 내리면서 이를 인쇄하여 참석한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한 내용을 적은 어필이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왕의 글씨, 어필
어필은 국왕 혹은 왕비, 왕세자, 왕자 또는 공주 등 왕실의 인물들의 글씨이며, 이들이 지은 시문은 어제라고도 합니다. 이 가운데 국왕의 글씨는 더욱 큰 가치를 지닙니다. 조선시대에 국왕은 나라의 모든 체제의 중심에 있으며, 그를 중심으로 나라가 움직였습니다. 그렇기에 왕의 생각과 뜻을 담아낸 어필은 국와으이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수단이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귀중하게 보관되었습니다. 또한 어필은 국왕의 의사소통 수단이었습니다. 왕은 어필을 통해 신하들고 소통하고 백성들에게는 전교의 형태를 이용하여 국가의 여러 정책을 알렸습니다. 더불어 어필은 조선시대 서예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이러한 어필은 주로 권이나 첩형태로 만들거나 병풍의 형식으로 장황되어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사찬첩>은 1760년 10월 7일 경희궁 경현당에서 행해진 선찬과 1월 20일의 선찬을 함께 화첩으로 구성한 것이다. 좌목, 하교, 어제시, 사찬 행사 글미 등 총 다섯 면으로 되어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전주읍치를 중심으로 그 주변의 지형, 지물, 경관을 재현한 군현지도이다. 그림 가득 백식과 홍색의 꽃이 피어 있다. 궁중회화에서 궁궐을 그릴 때에는 봄꽃을 배경으로 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번성과 태평의 의미를 담고자 하는 전통적 방식의 회화 표현이다. 전주지도에는 이러한 전통방식을 반영하여 전주와 조선왕실의 번창에 대한 기원을 남아냈다. 또한 화면 하단 성곽 안쪽에는 ‘진전’이라고 적혀 있는 경기전이 묘사되었다. 나무가 유난히 푸르고 무성한데, 이곳을 중심으로 학들이 무리지어 나라들고 있다. 이는 진전의 상서로운 기운을 표현한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전주지도
19세기가 되면 독립된 형식의 군현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바로 병풍이나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진 대규모의 회화식 군현지도입니다. 이전까지는 책자 형태로 장황된 군현 단위 지도가 활용되었는데, 책자 형태로 인하여 규모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회화식 군현지도는 이러한 책자 형식의 군현지도의 단점을 보완하였고 동시에 행정과 통치를 위한 자료로써 군현의 상황을 상세하게 담아냈습니다. 이러한 회화식 군현지도는 한양, 평양, 진주, 전주 등 제한된 지역에서 많이 그려졌습니다. 특히, 전주를 그린 회화식 군현 지도에는 왕실의 본향으로서의 전주에 부여된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전주에서 출판된 사간본은 유교 경서나 역사서, 문집류가 주를 이룬다. 도한 간기에는 ‘완부’나 ‘풍패’ 표시가 있다. 이 책의 간기에는 ‘세재정묘풍패신간’이라 표시되어 완판 사간본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한자의 음과 뜻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만든 책이다. 한자 아래에 한글로 음을 표시하고 사성의 운을 달았다. 한자의 운을 불류하여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는 운서보다 상세한 뜻을 달았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칠서 중 하나인 <서경>에 한들로 토를 달고 원문을 번역한 책이다. 서경은 중국 초기 국가인 하, 은, 주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영조 어진은 영조가 51세 되던 해인 1744년의 초상을 1900년 8월에 다시 모사한 것이다. 당대 최고 화원 조석진, 채용신 등이 참여 하였다.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문물과 의례의 정비에 노력을 쏟았으며 1771년에는 전주에 조경묘를 세우고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등 전주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이 어진은 황제가 된 후 그려진 고종의 초상화로 근대기에 활동한 화가 채용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화면을 가득 채워서 상을 그리고 정면관을 취한 점,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자세,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사실적인 얼굴 묘사, 가슴 위로 높이 올려진 관대, 큰 호패와 술, 수직으로 깔린 돗자리 등은 채용신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고종 황제는 조경단, 이목대, 오목대 등 조선 왕실의 선조들과 관련된 전주의 유적을 정비하였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왕의 초상, 어진
어진은 왕의 초상화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태조진전을 경기전 등 전국 여러곳에 세웠으며, 역대 왕과 왕후의 초상을 한양의 선원전에 봉안하며 어진봉안의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시 기구인 도감을 설치하거나 담당 관리를 임명하여 어진 제각에 대한 전반적인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이 과정을 기록하여 도감의궤로 남겼습니다. 어진은 도사, 모사, 추사의 방식으로 제작됩니다. 도사는 살아 계신 국왕의 얼굴을 직접보고 그리는 방식을 말하며, 모사는 기존의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추가로 다른 진전에 봉안할 필요가 있을 때, 기존 어진을 바탕으로 또 한 본의 어진을 제작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추사는 도사, 모사와는 달리 본이 되는 어진이 없는 경우, 그 얼굴을 아는 이들의 기억에 의존해 그리는 것을 말합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채용신(1850~1941)은 구한말에 활동한 문신이자 화가로 초상화를 잘 그렸다. 고종황제 어진을 비롯하여 여러 왕들의 어진을 그렸으며, <전우 초상>, <황현 초상>, <최익현 초상> 등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조선 왕실의 문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이래 500여 년 동안 조선 왕실의 문화는 발전하고 번영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하늘의 변화를 해석하는 천문학이 발달하며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도식화한 천문도가 제작되었습니다. 조선 국왕의 어필은 지성을 갖춘 명필군왕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진의 제작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에는 태조 어진을 비롯하여 역대 왕들의 어진이 모사되었습니다. 찬란하게 발전한 왕실문화는 민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화가 채용신은 왕실 문화가 민간으로 퍼져 나가는 변화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는 1900년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칠조의 어진 모사와 1902년 고종어진 제작을 주관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습니다. 1906년 고향인 전북에 돌아와 초상화 제작의 상업화와 초상화의 확산에 기여하였습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조선 왕실의 본향 그리고 전주
전주는 조선 왕실과 백성들이 지켜온 역사적 공간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전주를 왕실의 본향으로 기억하고 그 역사와 문화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경기전, 조경묘, 오목대, 풍패지관 등 여러 문화유산이 과거의 모습과는 달라졌지만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조선 왕실의 본향으로서 전주의 모습은 세월이 지나도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게속될 것입니다. (안내문, 국립전주박물관, 2023년)
<출처>
- 안내문, 전주박물관, 2023년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