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궐내각사 있었던 영역인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왕실의 제도와 역대국왕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왕실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박물관이다. 박물관은 2층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하는데 첫번째 전시실은 국왕이 조선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왕은 국왕을 상징하는 존재로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요한 존재였으며, 그들의 업적은 후손들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전시유물로는 조선국왕을 상징하는 궁궐의 어좌, 왕을 상징하는 인장인 어보,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 왕비 등을 책봉할 때 수여하는 교명을 비롯하여, 왕이 공식행사나 일상생활에 입었던 복식과 함께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선원전과 관련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당가와 임금의자(당가.어좌, 근정전 어좌 1/3축소모형)
궁궐의 정전에는 중앙에 당가(닫집)을 설치하여 어좌나 용상 등의 임금의자를 놓고 왕이 앉아 신하드의 하례를 받고 조례를 행하였다. 당가는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 위하여 어좌가 놓이는 공간을 화려하게 장식한 건축물이다. 머리 위쪽은 보개를 두어 포작으로 닫집을 짜고 낙양을 늘어뜨려 화려하게 꾸몄고 그 안 천장에 한 쌍의 용이나 봉황을 조각해 넣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 장자를 설치하여 신성과 위엄을 갖추었으며 장자에 설치된 문을 통해서 뒤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임금이 앉는 의자, 어좌(조선),
어좌는 왕이 앉는 좌석으로 옥좌 또는 보좌라고 한다. 태조 어진에 그려진 어좌의 형태와 문양이 이것과 거의 동일하여 이러한 형태의 어좌가 조선초기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놓아 신성과 위엄을 갖추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일월오봉도(조선),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 등 궁궐의 정전에는 왕의 자리 뒤에 일월오봉도가 세워져 있다. 궁중행사를 그린 그림에서도 왕의 자리 뒤에 일월오봉도 병풍이 세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어진을 봉안하는 곳에도 일월오봉도 병풍을 설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일월오봉도는 일월오악도라고도 부르며, 곧 왕의 상징이었다. 일월오봉도에는 다섯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일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유학의 고전인 『시경』의 ‘천보’라는 시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시는 왕의 덕을 칭송하고 왕에 대한 하늘과 조상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월오봉도는 8폭.6폭.4폭 등의 일반적인 병풍형태와 별도로 받침대에 끼워 세우는 가리개 형태의 삽병이 있었다. 진전에 어진을 모실 때에는 여러 폭으로 된 일월오봉도 병풍을 중앙에 세우고 그 양옆에 한폭으로 된 병풍을 세우기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근정전 내 국왕의 어좌가 있는 닫집
어보.어책.교명
어보(御寶) 국왕의 문서에 외교적.행정적으로 사용했던 국새(國璽)와는 달리 의례용으로 만들어진 인장으로 는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등 존호를 올릴때 제작되어 사용하던 도장을 말한다. 어보는 도장, 도장을 담는 함인 보통, 보통을 담는 보록, 이를 싸는 보자기와 끈 등으로 구성된다. 도장은 원래 거북모양으로 장식했었는데,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에서는 용으로 바뀌었다. 어보는 종묘에서 보관했기때문에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국새와는 달리 일부를 제외하고는 총 366점 중 323점이 남아 있다. 어책은 왕세자 등의 직위를 하사하거나 존호를 올릴때 만드는 일종의 교서로 왕세자 이하는 대나무에 세긴 죽책을, 존호를 올릴때는 옥책을 만들었다. 구한말 대한제국에서는 금책이 만들어졌다.
태조금보, 태조의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금보(조선, 1872년 고종9),
1872년(고종9)에 태조(1335~1408년)에게 ‘응천조통광훈영명’이란 존호를 추가로 올리면서 만든 어보이다. 정종의 금보함(조선, 1419년 세종1), 1419년에 정종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금보의 함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숙종금보, 헌종옥보,
숙종금보, 숙종의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금보(조선, 1890년 고종27),1890년에 숙종의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금보이다. 헌종옥보, 헌종을 황제로 추존하면서 만든 옥보( 대한제국, 1908년), 1908년(융희2)에 헌종을 ‘성황제’로 추존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순종은 진종.헌종.철종 등 3위 왕과 왕비를 황제와 황후로 추존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경종 왕세자 책봉 기념 죽책(경종죽책, 조선, 1690년),
1690년(숙종16)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죽책이다.
진종죽책함, 영조옥책함,
진종죽책함, 진종 왕세자 책봉 죽책함( 조선, 1725년), 1725년(영조1)에 영조의 맏아들인 진종(효장세자, 1719~1728년)이 세자로 책봉될 당시 제작된 죽책의 함이다. 영조옥책함, 영조의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옥책함(조선, 1784년), 1784년(정조8)에 영조에게 ‘배명수동 경력홍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어책을 담은 함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태종옥책, 태종의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옥책(조선, 1683년),
1683년(숙종9)에 태종에게 ‘예철성렬’이라는 존호를 추가로 올리면서 만든 옥책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성황후 금책함, 진종교명.함,
명성황후 금책함(대한제국, 1897년), 1897년(광무1)에 명성황후에게 금책을 올리면서 함께 제작한 금책함이다. 진종교명.함, 진종 왕세자 책봉 교명과 교명함(1725년) 1725년(영조1) 영조의 맏아들인 진종(효장세자, 1719~1728년)을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내린 교명이다. 교명은 왕이 왕비.왕세자.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수여하는 문서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완친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금책(대한제국, 1907년),
1907년(융희1)에 순종이 형님인 완친왕의 요절을 애도하며 만든 금책이다. 대한제국 이후 황제국으로서의 격식에 맞추어 금책으로 제작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장조비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는 교명(1744년),
홍봉한의 딸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자 혜빈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76년(정조 즉위)에 혜경궁이 되었다. 그 후 1899년(광무3)에 헌경의황후로 추존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왕의 상징물, 어보.어책.교명
어보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일반적으로 왕의 인장을 뜻하나 왕비, 왕세자 등의 의례용 인장까지도 통칭한다. 왕.왕비.세자.세자빈 각각의 덕을 기리는 뜻이 담긴 특별한 이름인 존호를 올리는 의식에 사용했으며 돌아가신 후 종묘에 보관했다. 존호를 올리는 일은 국가의 큰 경사 때에 행했던 중요한 의례 중 하나로, 왕이나 왕비의 생시와 사후에 그 덕을 기리고 찬양하기 위한 행사였다. 어보에는 왕지.세자.세자빈의 책봉명, 왕과 왕비의 존호, 묘호.휘호 등을 새겼다. 어책은 책봉 시 또는 존호를 올릴 때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으로서 보통 주인공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겼다. 주인공의 지위에 따라 재료가 달랐는데 왕과 왕비에게는 옥으로 만든 옥책을, 세자와 세자빈에게는 대나무로 만든 죽책을 올렸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황제와 황후의 어책을 금으로 만들어 올렸다. 교명은 왕이 왕비.왕세자.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수여하는 문서로 당부의 말이 담겨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왕의 초상-어진을 모신 창덕궁 선원전
어진은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말로,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도 갖고 있다. 어진은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만들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조대부터 마지막 순종대까지 만들어졌으며 진전이라는 건물에 봉안하였다. 어진은 살아있을 때 직접 그리는 경우도 있으며, 죽은 후에 기억으로 그리거나 이미 있는 어진을 보고 그리는 방법 등이 있다. 어진은 진전이라는 건물에 모셨는데, 진전은 궁궐 정전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전전이 창덕궁 선원전이다.
어진함, 흑장통
어진함, 어진 보관함(조선),어진을 봉안하는 함으로 의궤에는 흑장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진을 봉안할 때에는 이 흑장궤에 넣어 신여라는 가마로 모신다. 흑장통, 위급시 어진을 옮길 대 사용한 통(조선후기), 전쟁과 같은 위급한 때에 어진을 간편하게 옮길 수 있도록 어깨끈이 있는 외피를 갖춘 길고 둥근 통을 별도로 만들어 어진 및 어진함(흑장궤)과 함께 보관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조임금 초상(영조어진, 대한제국, 1900년, 복제),
1900년(광무4) 경운궁의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일곱 임금의 어진을 대대적으로 모사할 때 제작한 영조 어진이다. 당시 육상궁 냉천정에 모셨던 1744년(영조20)에 그린 영조 어진을 본 떠 그렸다. 주관화사는 채용신)1850~1941)과 조석진(1853~1920)이 맡았다. 익선관을 쓰고 가슴과 두 어깨에 오조룡을 금실로 수놓은 홍룡포를 착용한 반신상이다. 표제는 고종황제의 친필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왕의 초상, 어진
어진은 왕의 초상화이다. 어진은 선대 왕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보살핌을 받아 왕실이 번창하고 나라 전체가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태조대부터 순종대까지 꾸준히 어진을 제작하여 진전이라는 특별한 건물에 봉안하였다. 이러한 어진은 국왕이 살아계실 때 그 모습을 직접 대하고 그리거나, 국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뒤에 그리기도 했다. 또한 어진이 낡아 훼손되거나 새로 지어진 진전에 어진을 모시고자 할 때에는 이미 있던 원본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도 했다. 어진을 제작할 때에는 업무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였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들이 어진을 그렸는데, 국왕의 생생한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인품과 정신까지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완성된 어진은 임금을 모시듯 최고의 예를 갖추어 진전에 봉안하였으며, 배경에는 항상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두었다. 비록 현재까지 전해지는 어진은 몇점 되지 않지만 국왕의 당당한 모습을 격조 있는 색채와 정밀한 필치로 묘사한 어진은 군주의 권위와 위엄을 잘 보여준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선원전,
창덕궁 구선원전(보물).
선원전은 역대 왕들이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선원전은 원래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선원전으로 후원 깊속한 곳으로 옮겼다.
선원전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는 전각이다. 현재 창덕궁에는 선원전이 두 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인정전 서쪽에만 선원전이 있었으나 1921년 창덕궁 북서쪽 깊숙한 곳에 새로 선원전을 세우면서 본래의 선원전은 건물만 남은 채 그 기능을 잃고 ‘원선원전’ 등으로 칭해졌다. 지금은 새로 지어진 선원전을 ‘신선원전’, 본래의 선원전은 ‘구선원전’으로 부르고 있다. 본 전시는 신선원전의 제3실 원종실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박물관의 전시환경에 맞게 재현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어진을 보관하는 전각, 진전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진전이라는 특별한 전각에 모셔졌다. 종묘가 돌아가신 국왕의 신주를 모신 곳이라면, 진전은 국왕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조선왕조는 궁궐 안에, 한양 도성 안에, 그리고 국왕의 탄싱재 등 연고가 있는 지역에 진전을 건립하였다. 특히 태조의 어진은 함경도 영흥(탄생지)의 준원전, 경상도 경주의 집경전, 전라도 전주의 경기전 등에 봉안되어 특별한 추앙을 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진전은 궁궐 안의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동쪽에는 신주를 모시고 서쪽에는 영정을 모신다’는 『주례』에 입각하여 정전의 서쪽에 자리하였다. 조선 초 세종대에 경복궁에 선원전을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숙종대에 창덕궁에 선원전을 지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경운궁(현 덕수궁)에 선원전을 건립하고 외방의 진전을 고쳐 지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국가 제사가 축소되고 1921년 창덕궁의 현재 위치에 선원전이 건립되면서 다른 진전은 모두 통폐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종.순종의 초상화 제작을 기록한 의궤(대한제국, 1902년)>
1902년(광무6) 고종 황제의 51세와 즉위 40년을 경축하기 위해 고종황제의 어진과 황태자 순종의 예진을 그리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어람용 의궤로 황제국의 격식에 맞추어 표지에 황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임금 초상 모사 의궤(대한제국, 1901년),
1901년(광무5)에 태조를 비롯한 일곱 임금의 어진을 모사하고 경운궁(현 덕수궁)의 선원전을 건립하는 제반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어진에 대한 분향.참배 등의 의례를 행할 때 사용된 은기 등 각종 물품을 그림으로 그린 도설이 실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술 그릇, 은제 수저를 담는 그릇, 은제 도금 주전자, 은제 향합, 은제 잔과 팔각받침
왕의 대례복
면류관(복원),
구장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최고 격식의 모자이다. 앞뒤로 옥과 구슬이 늘어져 있어서 시야를 가리고, 좌우에는 두개의 옥구슬 귀막이가 늘어뜨려져 있다. 이는 ‘악은 보지말고 나쁜말은 듣지 말라’는 깊은 뜻이 있다.
면복(복원),
국왕이 입는 최고의 예복이다. 국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나 국왕을 상징하는 문양을 그리거나 수놓았다. 구장복의 상의에는 용, 산, 불꽃, 꿩, 술찬 등을 그리고 하의에는 수, 쌀, 도끼, 불을 수 놓았다. <출처:고궁박물관>
용(龍), 상상의 동물, 최고의 통치자. 불꽃(火), 빛나는 덕에 대한 열의. 꿩(화충,華蟲), 화려한 문채. 산(오악,五嶽), 하늘과 맞닿아 신과 접하는 존재. 술잔(종이,宗彛), 종묘 제사용 술잔, 호랑이의 용맹과 원숭이의 효행을 본받으라는 의미. 수초(조,藻), 청결하고 옥같이 맑음. 쌀(분미,粉米),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제왕의 덕. 도끼(보), 선악을 분명히 가려내는 강한 결단력. 불, ‘弓’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형상, 악을 등지고 선을 향함을 상징 <출처:고궁박물관>
방심곡령(方心曲領 ), 옥대(玉帶),
규(圭), 버선
상(裳),
상은 붉은색의 무늬있는 비단으로 조, 분미, 보, 불의 4장이 수놓아진다. 폐슬(蔽膝), 폐슬은 무릎을 가리기 위해 허리 아래로 늘이는 천이다.
패옥(佩玉)·대대(大帶)·후수(後綬)·
왕의 평상복
영친왕곤룡포,
영친왕이 입었던 곤룡포(20세기초, 복제), 곤룡포는 왕이 집무를 볼 때 입는 옷이다. 곤룡포는 금실로 용무늬를 수놓은 옷이라는 뜻으로 가슴.등.양 어깨에 발톱이 다섯이 오조룡을 금실로 수놓은 보를 붙였다. 이 곤룡포는 영친왕이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입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친왕 목호, 영친왕이 신었던 목이 긴 신발(20세기초), 왕과 문무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목이 긴 신발이다. 이 목화는 영친왕이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착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친왕규, 영친왕 익선관
영친왕규. 영친왕이 들었던 규(圭), 원래 규는 흙토(土)자를 둘 겹친 글자로, 천자로부터 받은 땅을 재고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영친왕이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친왕 익선관, 영친왕이 썼던 익선관(20세기초). 익선관은 곤룡포를 입을 때 머리에 쓰는 모자로, 가죽에 옻칠을 하여 만든 후 군데군데 구멍을 뚫어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이 익선관은 영친왕이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친왕옥대, 영친왕이 찼던 옥대(20세기초, 복제),
옥대는 옥으로 만든 허리띠이다. 영친왕이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국왕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여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를 펼쳤다. 이러한 기조는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1910년 일본에 강점당하기 전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승계하면서 지속되었다. 안으로는 지배 계층인 양반을 중심으로 한 신분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밖으로는 주변국들과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왕은 강력한 지배 체제를 유지해 갈 수 있는 탁월한 인물이어야 하며 배우자인 왕비는 이에 걸맞게 덕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또한 왕과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실 자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이에 부응하는 교육을 받아 바른 인성을 갖추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들을 두로 살피고 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소양을 쌓았다. 왕은 많은 권한을 가졌으나 객관적이고 타당한 규율 위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 체계를 정비하였다. 작은 일부터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왕이 행한 모든 일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왕은 항상 냉철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명확하고 바른 정치를 펼쳐야 했다. 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지닌 왕은 마치 태양과 같은 존재였으며 왕권의 상실은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었다. 탁월한 왕의 존재는 국가의 발전을 의미하였으며 그들의 업적은 후손에게 길이 전달되어야 했다. 따라서 왕이 계신 자리에는 항상 왕의 상징물들을 놓아 그의 권위와 정통성을 나타내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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