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과 금강이 흐르는 충북에서는 채집생활을 했던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동굴유적들이 여럿 발견되었다. 제천 점말동굴, 단양 금굴, 청원 두루봉 동굴 등이 구석기인이 살았던 대표적인 동굴유적이다. 동굴유적은 구석기인들이 추위를 막기위해 석회암이나 화산암지대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굴에 머물렀던 곳이다. 사람뼈.석기.뼈연모.동물화석 등 당시의 생활상과 환경 자료들이 출토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이동생활을 하였으나 때로 막집과 동굴에 살고, 식량채집과 사냥을 위해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주먹도끼는 끝이 뾰족하고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이룬다. 손에 쥐고 동물을 사냥하고 도살하거나 가죽과 나무의 가공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석기는 돌.나무.뿔 망치로 직접 떼거나 모룻돌에 대고 망치로 때려 내어 만들었으며, 넘차 누름도구로 눌러 때는 방법도 이용되었다.

단양 애곡리에 있는 수양개 유적지는 남한강 중류에 위치한 대표적인 선사유적지이다. 청원군 노산리는 금강 중류 대청댐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교통의 요지이자, 금강을 생활근거지로 살았던 지역이다. 청원군 만수리는 청주 북쪽편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부근에 위치한 곳으로 금강에서 채집생활을 했던 구석기인이 살았던 지역으로 보인다.

구석기인들은 동물사냥에 주먹찌르개.여러면석기.슴베찌르개 등을 이용하였고 동물 해체와 가공에는 자르개.긁개.밀개 등을 이용하였다.



구석기인이 정보를 기록했던 것으로 유추하는 눈금이 새겨진 돌이다. 실제 그렇게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눈금이 새겨진 돌
긴 자갈돌에 0.4cm 간격으로 23개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눈금은 수나 단위 등을 기호화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 돌은 사냥한 동물의 숫자나 종족의 인원수, 날짜 등을 세는 원시적인 측정 도구였을 가능성도 있다. 기하학적인 선을 새긴 유물은 동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기호는 인간의 머리 속에 있던 정보를 바깥으로 표현한 것 으로 ‘기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긁개는 동물가죽 손질 등 다양한 쓰임새를 지닌 도구로 구석기시대 석기중 가장 많이 출토된다. 톱니날석기는 석기의 날 부분이 톱니로 되어 있다. 긁개와 비슷하나 긁개에 비해 날이 길다. 홈날석기는 긁개의 날 부분을 오목하게 만든 것으로 나무나 뿔을 다듬거나 뼈에 붙은 고기를 떼어내는데 사용되었다.





도구의 등장과 발전-기술
인간은 도구를 이용하면서 신체의 기능이 향상되었고 이를 토대로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도구를 만들려면 재료가 중요합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했는데, 자주 이동하며 생활했으며 의사소통 체계가 광범위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좋은 도구를 위해 재료의 물리적 속성을 먼저 파악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효율성과 표준화, 아름다움 등에 중점을 두고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제작된 도구는 인류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발전합니다. 개인에게 맞춰 제작한 도구들이 나오고 개선된 도구는 모방과 재생산을 거듭합니다. 최종 지향점은 인간의 신체 기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구가 발전함으로써 일의 효율성이 높아져 경제적 이익이 늘어나고 건강이 개선됩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주먹도끼, 찌르게 같은 도구와 무기 등이 만듭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사냥이 아닌 사람 간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좋은 무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가장 발전된 기술로 무기를 만듭니다. 또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간돌검이나 청동검과 같은 칼이 등장합니다.



간돌검은 선사시대 특히 청동기 시대에 사용된 무기로, 이름 그대로 돌을 간 듯이 매끈하게 다듬은 칼을 말한다. 철제무기 도입 이전에 청동기와 함께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권력의 상징물로 여겨진다. 한반도에서 많이 출토되지만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흔한 유물은 아니다.

청동꺽창은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청동기 무기이다. 실제 전투에서 전차를 상대로 사용되었던 무기이다.

요령식 동검은 청동기 시대 한반도와 만주 지역 등지에서 사용되었던 청동제 무기로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청동기 문화의 북방 전래를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다. 이후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세형동검 문화로 변화한다.

쇠투겁창은 고대 무기 중 하나로, 던지는 창을 의미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전쟁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보편적인 무기 형태이다.


도구의 등장과 발전-무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누를 만큼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변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인간을 먹잇감으로 노리는 큰 육식동물도 종종 마주쳤습니다. 이탈리아의 과타리 동굴에서는 하이에나가 사냥한 네안데르탈인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위험한 환경에서 인간은 생존 전략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그 전략에 맞추어 슴베찌르개나 화살촉과 같은 다양한 사냥도구, 무기 등이 만들어집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사람과 짐승이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좋은 무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가장 발전된 기술로 무기를 만듭니다. 또한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를 병사들과 구별하기 위해 간돌검이나 청동검과 같은 칼이 등장합니다. 칼의 등장은 군사력의 상징이었지만 점차 실용적인 무기로 변해갑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신석기문화의 특징은 정착생활, 토기와 간석기 사용, 가축기르기, 농경의 발생 등이다. 농경구로는 땅을 파는 돌보습, 이삭을 자르는 반달돌칼, 곡식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를 내는 갈판과 갈돌 등이 있다. 돌보습은 돌을 떼어 내어 형태를 만들고 일부분을 잘 갈아 완성하였으며 나무자루에 끼워 사용하였다.

여러면석기는 구석기시대에 사용된 석기의 한 종류로, 표면에 여러 개의 면이 있는 도구이다. 다른 도구를 만들기 위한 원재료로 사영되었다. 날카로운 돌조각인 격지 생사느이 중심체이다.

갈돌과 갈판은 주로 신석기시대에 곡식이나 식물 등을 갈아서 가공할 때 사용된 도구이다.


가락바퀴는방적 도구로, 실을 잣는 데 사용된 작은 돌 또는 흙으로 만든 원반형 도구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직조 문화의 발달을 보여준다.


고무래는 밭갈이 이후 흙을 고르거나 흙덩이를 부수는 작업에 쓰이는 농기구이다. 현대 이전까지 널리 쓰였고,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고무래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도구가 출토된다.




반달돌칼은 청동기시대에 사용된 대표적인 수확용 농기구로, 이름처럼 반달 모양의 날을 가진 돌칼이다. 주로 곡식의 줄기를 베는 데 사용되었으며, 청동기 농경문화의 상징적인 유물로 평가된다.

청동기시대의 돌도끼는 농경, 벌목, 토목 작업 등에 사용된 실용적인 석기 도구이며, 때로는 의례적·상징적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청동기시대에도 청동기 사용과 병행되었지만, 여전히 널리 사용되었다.




도구의 등장과 발전- 공구 · 비실용적 도구
먹거리는 항상 인류의 숙제였습니다. 맛있고 좋은 먹거리를 얻기 위해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았습니다. 사냥을 잘하기 위해 더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고 채집에서 농경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면서 더욱 다양한 도구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다양한 재질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땅을 파는 괭이는 무디게 만들지만 나무를 베는 도끼는 더 날카롭게 제작합니다. 재료의 발전은 더 많은 수확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실용성이 중요한 공구나 농구는 청동기와 같은 귀한 재료로 만들기 쉽지 않아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분이나 재력을 나타내는 꾸미개 등은 귀한 옥이나 청동으로 만드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형태와 재질, 쓰임새로 도구가 가진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토기는 점토로 다양한 형태와 무늬를 쉽게 만들 수 있어, 초기에는 짚풀 그릇의 무늬를 모방했지만 점차 미적 요소나 기원을 담은 문양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풍요와 안전을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토기의 등장은 음식을 삶고 끓이는 조리가 가능해짐으로써 식생활의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 한국 선사문화의 상징적인 유물이다. 빗살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곡물과 열매 등을 담는 저장 용기로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한반도전역에서 출토된다.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농경생활의 발전과 정착생활을 잘 보여준다. 도기로 발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겹아가리토기는 아가리 부분이 이중으로 겹쳐 있는 구조를 가진 토기를 말한다. 이 구조는 실용적인 목적과 더불어 당시의 제작 기술과 미적 감각을 반영하고 이다. 주로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에서 많이 보인다. 입구 부분을 강화함으로써 깨짐을 방지하고 사용 수명을 늘렸으며, 뚜껑을 덮거나 끈으로 묶기 좋게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붉은간토기는 표면을 붉은색으로 칠하고 매끈하게 간 토기를 말한다.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토기이다. 도기로 발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검은간토기는 청동기 시대에 등장한 표면을 검게 칠하거나 흑갈색이 나도록 구운 뒤, 매끄럽게 문질러 광택을 낸 토기이다. 철·망간이 든 흑색 슬립을 얇게 입히고 저산소 소성으로 흑색을 발현한다, 식은 뒤 표면을 다시 갈아 광택을 낸다. 청동기시대 가마 운영 능력을 보여주며 고급 토기의 제작과 유통은 지배계층과 수공업층의 분화를 보여준다.



덧띠토기는 청동기 시대 토기의 유형으로 토기의 몸통이나 아가리 부분에 띠처럼 돌출되게 진흙을 덧붙인 토기이다. 덧띠는 구조적 기능과 장식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어, 토기 제작 기술과 미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도구의 등장과 발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새로운 생활방식도 나타납니다. 재료의 한계가 있는 석기와 달리 토기는 점토로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었고 무언가를 새기는 것도 쉬웠습니다. 토기에는 다양한 무늬를 넣었는데, 예를 들어 빗살무늬는 짚풀이나 대나무로 만든 그릇이 토기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 지속되어 짚풀 등이 엮인 무늬가 남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모방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여기에 사람들이 미적 요소를 더해 다양한 문양을 넣거나 생략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러한 문양은 단순히 아름다움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이 보장되고 수확이 늘어나게 해 달라는 기원을 나타냅니다. 그릇에 그려진 기하학 무늬는 그릇에 담긴 음식이 상하지 않고 오래 가거나, 그릇이 늘 가득 차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토기가 등장하는 것은 먹거리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토기는 단순히 불에 굽는 것이 아니라 수육처럼 끓여서 연한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생으로 먹지 못하는 나물도 삶아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기의 등장으로 음식물을 불로 끓일 수 있게 되어 사람들의 식생활은 개선되었습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금속이 출현하기까지
아프리카를 떠난 인류는 유라시아를 건너 한반도 중심의 충청북도에 도착합니다. 위험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도구를 만들고 서로 힘을 모아 살아 갑니다. 인류는 주먹도끼로 가죽을 벗기거나 고기를 자르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구를 더 쉽게 잘 만들기 위해 돌날 기술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돌날은 점점 더 작아져 휴대할 수 있게 뼈나 나무 사이에 끼워 넣을 수 있는 도구로 발전합니다. 1만 2000년 전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사람들은 식물 자원과 바다 자원에 눈을 돌리고 이때부터 신석기 시대가 열립니다. 토기를 만들고 계절에 따라 이동 생활을 합니다. 조, 피, 수수와 같은 작물을 키우는 초보적인 농경을 시작했습니다. 수확량은 많지 않았습니다. 바닷가에서 조개류를 주로 먹고 지내 조개무지가 만들어집니다. 충청북도 지역에서도 조개껍데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멀리 이동하고 폭넓게 물건을 교환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15세기경 벼농사를 중심으로 농경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전의 수렵 채집 경제에 맞춘 이동생활이 일 년 동안의 먹거리를 한 번에 얻는 농경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한곳에 정착하고 수확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고 먹거리를 지키려고 전쟁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중재자가 나오고, 권력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권력자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청동기 같은 것들을 만들고 소유합니다.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
<출처>
- 안내문, 청주박물관,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