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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통신사] 문화교류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되면서 한일간 통신사 외교가 정착하고, 이를 매개로 문화 교류가 활발해졌다. 양국은 한자라는 공통의 문자로 소통하며 학문과 예술을 교류했다. 임진왜란 직후의 일본을 경계하는 분위기에서 점차 상호 이해와 존중의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전기의 통신사가 외교 질서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후기의 통신사는 문화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문화를 잇는 창구가 되었고, 그 영향은 상류층을 넘어 민중에게도 확산되었다. 전시에서는 통신사로 파견된 인사들과 그들을 수행했던 일본인들과 교류를 보여주는 글, 문집, 그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국가경영을 위한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서로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화원들의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에도에서 막부의 재상과 통신사가 우의를 나누며 교류한 시, 1682년, 종이에 묵서, 한림대학교박물관>

제7차 통신사행 당시 막부의 재상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삼사인 윤지완, 이언강, 박경후에게 시를 보냈고, 이에 삼사는 답시를 지어 회답하였다. 에도에서 쇼군의 향연이 열릴 때는 미쓰쿠니와 고산케가 배석하며, 시치고산젠개이라는 최고의 상차림과 금박을 한 토기 술잔에 술을 받는 등 환대를 받았다. 통신사는 쇼군과 종실로부터 전별금으로 백금과 은을 받았으나, 이는 쓰시마 번주의 위로금 등으로 활용되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막부의 통신사 파견 요청에 대해 조선에서 쓰시마에 회답한 공식 외교문서 延享四年修聘使書并別幅, 1747년, 종이에 묵서, 국사편찬위원회>
<막부의 통신사 파견 요청에 대해 조선에서 쓰시마에 회답한 공식 외교문서 延享四年修聘使書并別幅, 1747년, 종이에 묵서, 국사편찬위원회>

예조 참판 김상로가 쓰시마 번주에게 보낸 답신 서계이다. 국서가 조선 국왕과 일본 막부 장군이 주고받은 공식 외교문서라면, 서계는 조선과 쓰시마 간에 오가는 공식 외교문서로, 쓰시마와의 통교, 무역에 관한 교섭을 수행할 때 기본이 되었다. 제10차 통신사행은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쇼군직 계승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이다. 이 서계에는 막부의 요청으로 우의를 확인하고자 통신사를 파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고, 예물의 목록을 적은 별폭도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사행을 대비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을 담은 지침서 日觀要攷, 1748년, 종이에 묵서, 에도도쿄박물관>

통신사 사행을 대비해 필수 사항을 정리한 지침서로, 제10차 통신사행까지의 외교 현안, 조일 간 약조, 노정, 예물 교환 목록, 일본의 외교·인물·지리·풍속 등의 내용을 수록하였다. 또한 제10차 사행에서 수창한 일본 문인의 이름을 적어넣어, 기존 자료에 최신 정보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정보가 일본에 전파된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필사되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예를 담은 선물, 외교의 정수를 나누다.
최고 통치자 간의 통교를 기반으로 하는 통신사 외교에서는 국서와 함께 선물이 교환됩니다. 선물을 교환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평화와 우호를 이어갑니다. 조선은 일본 막부에 인삼, 명주, 모시, 꿀, 호피, 매, 말, 붓, 종이 등을 선물로 보냈는데, 조선 전기에는 불경과 서적이, 후기에는 비단과 문방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일본은 은, 갑옷, 검, 특산물, 금박병풍, 채색부채 등을 보냈습니다. 국가 간 교환되는 선물인 만큼 최고급 물품으로 준비했으며,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제작했습니다. 양국은 상대국의 취향을 고려해 대등한 수준의 선물을 준비하며, 교린 관계에서의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2025년)

에도 시대 조선 통신사는 일본인의 환영을 받으며 민중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다. 공식 외교 사절이었지만, 민간의 가이드북 제작, 축제 가장 행렬, 패션·공예·민속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유행은 막부가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으며, 일본인의 일상과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일본의 농민들이 통신사 선단 행렬을 그려 신사에 봉헌한 그림 朝鮮通信使淀川御座船圖, 1695년, 목판에 채색, 미구쿠루미타미신사>

이것은 요도가와 강을 따라 교토에서 오사카로 돌아가는 통신사선이 그려진 에마(納馬)이다. 오사카 인근 돈다바야시의 미구쿠루미타마신사 배전에 걸려 있는 것으로, 1985년경 재일동포 사학자인 신기수의 조사 연구를 통해 학계에 조명되었다. 그림에는 일본에서 제공한 가와고자부네 6척이 두 줄로 배치되어 있다. 상단에는 왼쪽부터 정사·부사·종사관이 탄 배가, 하단에는 국서를 담은 가마를 실은 배와 조선 수행원들의 배가 그려져 있다. 각 배에는 통신사 일행을 비롯해 노를 젓는 사람과 이들을 지휘하는 무사들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일본인들이 배 위에서 통신사를 접대하는 모습도 보인다. 에마의 왼쪽에는 ‘겐로쿠 8년 9월 길일’이라는 봉납 일자가 적혀 있고, 하단에는 ‘키시 사쿠라이촌” 이라는 마을 이름과 함께 ‘弥兵衛, 市蔵,’菊松,小太郎’ 등 농민 11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편, 미구쿠루미타마신사가 위치한 돈다바야시는 백제인이 도래한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이 신사는 백제 왕족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인표 씨족과 관련된 씨사로, 백제 왕족의 조상신을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당시 통신사 행렬이 오사카에서 교토로 오고가며 요도가와 강을 지나갈 때, 이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키시 사쿠라이 마을의 농민들도 자신들과 연관이 깊은 조선 사절단을 보기 위해 구경 나왔고, 그 기억을 기념하기 위해 에마를 제작해 신사에 봉헌한 것으로 보인다. 왜 통신사 그림이 신사에 봉헌되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일본 민속문화 속에 통신사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통신사가 일본 민중의 삶과 문화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 행렬 관람 가이드북 朝鮮人來朝物語·朝鮮人行列次第, 1763년, 종이에 목판 인쇄, 에도도쿄박물관>

신사 행렬 안내서에 해당하는 에도시대 가이드북이다. 여러 차례 통신사의 방문 후, 행렬 구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8세기에는 이를 책으로 출판하여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경향이 증가했다. 책은 서문, 통신사의 일본 방문 내력, 조선이 일본에 ‘내조’한 이야기, 행렬의 차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행렬의 차례는 글과 그림을 3단으로 구성했다. 여정, 각 지역별 접대를 맡은 다이묘, 가와고자부네를 수호하는 다이묘, 사행원의 인원 등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였다. 이를 통해 관람자가 전체 모습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통신사 행렬 출판물의 간행을 주도한 교토의 기쿠야 시치로베출판사는 다른 안내서와 달리 가와고자부네 행렬과 선박을 묘사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가와고자부네로 이동하는 구간에 근접한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인기를 반영해 사행 도착 10개월 전에 미리 제작했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통신사 방문 전 정보의 습득, 방문시 감상의 편 의를 제공하는 한편,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설명하여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선의 쓰시마 입항 그림 朝鮮人渡海船之圖, 1811년, 종이에 목판 인쇄, 오사카역사박물관>

마지막 통신사가 쓰시마에 입항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정사와 부사 및 통신사선에 관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쓰시마의 출판사 미키야 기자에몬에서 출판하고, 에도에서 판매했다. 이를 통해 에도에서도 역지빙례 형식으로 이루어진 1811년 통신사행에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한 장짜리 신문과 같은 형식으로, 낱장으로 판매되거나 책 대여점에서 대여되기도 하였으며, 교과서에까지 활용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감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마지막 사행의 행렬 모습을 기록한 그림책 朝鮮人來朝行列記, 1811년, 종이에 목판 인쇄, 오사카역사박물관>

1811년 3월에 쓰시마를 방문한 통신사의 행렬 장면을 수록한 책이다. 책은 행렬 일행의 정보와 역대 통신사의 방문 개요 및 연호를 첨부한 내용 등으로 구성되었다. 발행처는 에도의 니시무라야 겐로쿠대려화 와 쓰시마의 미키야 기자에몬으로, 멀리 떨어진 서점이 공동 협력하여 출판한 것이 주목된다. 이는 1811년 사행이 쓰시마에서 이루어진 특성상 쓰시마의 출판사가 제작하고 에도의 출판사가 유통을 맡는 게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짓펜샤 잇쿠가 서문을 쓰고, 우키요에 화가2대 기타가와 우타마로가 삽화를 그렸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우키요에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통신사 그림 東海道五十三次-由井, 19세기초, 종이에 목판 인쇄, 시카고미술관>

일본의 대표적인 우키요에 화가 가스시카 호쿠사이고로가 그린 통신사 그림이다. <유정>은 통신사의 한 사람이’세이켄지’ 편액을 쓰고 있는 장면으로, 호쿠사이의 <동해도오십삼차> 시리즈에 수록되이 있다. 19세기 초, 에도에서 사행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통신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여전하여 당시 유명한 우키요에 화가들이 이를 주제로 채택하이 그렸다. 통신사복식에서 목과 어깨에 두른 프릴장식은 일본인과는 다른 이국인의 모습을 강조하는 요소로서 그리졌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18~19세기 에도의 마쓰리 행렬 중 조선통신사 가장행렬을 표현한 그림이다.

<1번째, 간다 묘진 제례에서 재현된 통신사 가장행렬을 담은 그림, 18~19세기, 종이에 채색, 에도도쿄박물관>
<2번째>
<3번째>
<4번째>
<5번째>
<6번째>

에도의 간다 마쓰리의 행렬을 그린 그림으로, 11번째 그림에 통신사 가장행렬이 묘사되었다. 통신사의 최종 목적지인 에도는 통신사 행렬을 가장 많이 보고 즐긴 곳이다. 통신사 행렬 구경을 눈앞에서 본 에도 사람들은 조선인의 머리와 의상을 모방하고, 조선의 피리와 북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축제 행렬에서 재현했다. 1681년부터 막부의 명에 의해 에도 2대 천하제인 산노 마쓰리와 간다묘진 마쓰리가 격년으로 개최되었는데, 이 축제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통신사 가장행렬이 이루어졌다. 이는 곧 통신사 행렬과 관련된 출판물들의 제작·유통, 각지에서 당인 행렬이 유행한 것과 관련이 있다. 11번의 토시마 마치 행렬은 160명에 이르는 대행렬로, 호행하는 일본인, 형명기를 연상시키는 용 깃발, 청도기, 국서, 악대, 정사, 소동 등이 열을 지어가는 사실적인 행렬이다. 용이 그려진 깃발에 가노파 화가 가노 에이류의 그림이라고 적혀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 인물이 새겨진 장신구, 인롱 1) 마상재, 2) 정사와 악대, 18~19세기, 나무에 옻칠, 일본 개인 소장>

인롱은 약을 담는 소형 용기로, 끈을 달아 허리에 차서 사용했다. 에도시대 무사의 필수 장신구였으며, 마상재와 행렬 장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여러 단으로 겹쳐진 소형 용기를 양쪽 끝의 구멍에 통과시킨 뒤, 끈 상단에 네츠케를 달고, 끈의 중간에 통과시킨 오시메로 뚜껑과 각단의 개폐를 조정해 약을 꺼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한 약통의 기능을 넘어 장신구로 발전하여 무사와 부유한 상인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마키에#해, 나전에, 금패, 금속공예 등에도 공예기술의 정수가 담긴 예술품으로 자리잡았다. 통신사의 모티프를 활용한 디자인은 인롱뿐 아니라 네츠케, 주머니, 담뱃갑 등 소형 예술품 전반에 걸쳐 유행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부산 왜관요는 일본의 다도 문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부산 왜관 지역 내에 설치된 가마를 말한다. 일본에 주문에 맞추어 제작해 조선의 기술과 일본의 취향이 융합된 형태를 보인다.

<‘조션국’ 한국이 새겨진 흑자 병, 18~19세기, 흑자, 일본 개인 소장>

‘조션국’이라는 한글이 새겨진 흑자 병으로, 이테이안 윤번제와 관련하여 쓰시마에 남아 있던 조선 도자기가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보관 상자 겉면에는 “쓰시마 세이잔지 에서 전해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이테이안이 설치된 사찰인 세이잔지와의 연관성을 뒷받침한다. 유약이 빛나는 흑유체 위에 ‘조션국’이라는 한글이 서툰 필치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형태의 도자는 조선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디자인이지만, 바닥에 거칠게 뿌려진 모래 등의 특징을 통해 조선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도자기에 한글을 새긴 것은 당시 일본에 방문한 통신사에게 한글을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테이안 윤번승들이 조선의 글씨를 좋아한 것과 관련있어 보인다. 특히 조선의 도자는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던 제품으로 ‘조선제’를 강조하기 위해 국명을 새겨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조션국’ 한국이 새겨진 철화백자 병, 18~19세기, 백자에 철화안료, 료소쿠인>

‘조션국’이라는 한글이 쓰여진 철화백자 병이다. 현재 교토 켄닌지센드寺 료소쿠인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는 이테이안 윤번제와 관련해 쓰시마에 남아 있던 조선 도자기가 료소쿠인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병의 몸체에는 힘찬 필체로 ‘조션국’이라는 한글이 쓰여 있다. 이러한 형태의 병은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이지만, 자기의 빛깔과 바닥에 남아 있는 많은 양의 모래를 통해 조선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보내진 도자기로 추정된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조선의 도자기 주문을 위한 주문서와 견본 그림이 수록된 책, 1713년, 종이에 묵서, 국사편찬위원회>

1712년부터 1715년까지의 도자기 주문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자이다. 부산 왜관요로 보낸 도자기 주문서와 함께 ‘어론’이라 불리는 주문품의 견본 그림 106첩이 수록되어 있다. 다도를 중시했던 일본에서는 16세기 후반부터 조선에 찻잔을 주문제작했는데 이후 수요가 증가하면서 부산 왜관에 가마를 설치하고 일본인을 위한 다기를 제작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왜관에서 제작된 다기는 주문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떄문에 ‘어본다완’이라고 불렸다. 일본어 통역을 담당했던 왜학 역관들은 일본인의 취향을 가망;ㅔ 전달하는 중개인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은 1711년 신묘사행과 1719년 기해사행 사이의 주문 내역을 담고 있어 통신사가 파견되지 않았던 시기의 도자기 주문 및 유통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행렬도가 그려진 접시, 20세기, 백자에 채색, 서울역사박물관>

통신사 행렬 그림을 모티프로 한 대형의 이마리접시이다. 가운데는 ‘조선통신사’라고 적힌 통신사 행렬도가 그려진 두루마리 족자를 그려넣고 바깥쪽에는 ‘화’를, 안쪽에는 ‘보’를 쓴 육각무니를 배치했다. 통신사 인물들의 복식은 실제 조선인의 복식과 다르게 목에 프릴이 있고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어, 이국의 인물로서 대상화하여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행렬의 이국적 장관과 더불어 행렬도 그림 자체에 대한 애호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가 남긴 것, 여운이 물결처럼
통신사의 영향은 과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일 간 물리적 거리를 넘어 형성된 문화적·정서적 유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재일동포 사학자인 신기수와 이원식 등의 노력으로 통신사 자료가 발굴되며 잊혀졌던 역사가 다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기수는 사명대사의 글을 비롯해, 교토 쇼코쿠지 지쇼인의 창고 속에 묻혀있던 글과 그림들, 미구쿠루미타마신사의 에마 등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조사했으며, 그가 수집한 자료들은 오사카역사박물관의 신기수 컬렉션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한일 간 경계에서 한일의 가교가 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역사가 현재도 살아있음을 보여줍니다. 학술적 연구와 협력은 통신사 행렬 재현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로 이어졌으며, 이는 통신사가 단순한 외교 사절을 넘어, 평화와 상호 존중의 가치를 상징하는 유산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합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 행렬 인물을 재현한 일본의 향토 완구, 20세기, 흙, 오사카역사박물관>
<통신사 행렬 인물을 재현한 일본의 향토 완구, 20세기, 흙, 오사카역사박물관>
<통신사 행렬 인물을 재현한 일본의 향토 완구, 20세기, 흙, 오사카역사박물관>

통신사 행렬을 모티프로 한 향토 완구이다. 통신사의 실제 여정과는 별개로, 일본 각지에서는 통신사를 모티프로 하는 인형이 다양한 스타일로 만들어져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요네자와번의 번사였던 사가라 세자에몬 아쓰타다가 번 재정 개혁을 위해 도기 제조 기술을 들여와 도예 가마를 설치하고 인형을 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나팔을 잡고 있는 악공, 큰 북을 든 소동 등 다양한 모티프를 활용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 행렬 인물이 장식된 촛대, 19세기, 금속, 오사카역사박물관>

깃발을 든 통신사 행렬을 모티프로 한 촛대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정교한 주물 공예품을 ‘벳부세공’이라고 부르는데, 18세기 후반 현재의 기후현 미즈호시 벳부에서 제작된 납형주물세공이라는 뜻에서 생산지명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벳부세공에는 이 작품 외에도 통신사의 악공이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담은 화병 등도 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당시 통신사 행렬에 대한 관심과 그 모티프의 유행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민중 속으로 스며들다
“올해 자랑거리는 당인을 두 번 본 것”이라는 에도 시대 소설가의 하이쿠에서처럼, 통신사는 일본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민중들의 일상과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통신사는 국가 외교 사절단으로서 공식적인 공무를 수행한 것이지만, 오랜 평화 시기를 거치며 그들이 가져온 문화는 자연스럽게 민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조선 문화에 대한 애호풍조는 통신사가 왕래하지 않던 시기에도 지속되었으며, 통신사가 직접 방문하지 않은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통신사 행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감상하기 위한 가이드북이 제작되어 널리 읽히고 향유되었습니다. 이러한 통신사 열풍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민중들의 실생활 속 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축제에서 통신사 복장을 입고 그들을 흉내 내는 가장 행렬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유행이 지나치게 확산되자 막부가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습니다. 또한, 통신사는 패션 아이콘으로서 공예품의 디자인에도 활용되었으며, 신사에 봉헌하는 에마와 같은 민속문화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통신사가 일본 민중의 삶과 문화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1763년 통신사 사행은 조선과 일본 문인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많은 필담창화집과 사행록이 작성되었으며, 일본인 참여자만 500명에 달했다. 통신사들은 귀국 후 사행일기, 일본국지, 창수시집 등을 남겨 일본 지식을 정리했고, 일본 측은 조선 학문 경향에 의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논쟁을 벌였다. 한일간 교류 초기에는 상호 우월감을 드러냈으나 점차 상대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로 바뀌었고, 조선 내 실학자들의 일본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엄(1719~1777)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63년 제11차 통신사행의 정사를 맡아 일본에 다녀왔다. 그는 외교 사절로서 일본과의 교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 아니라, 귀국길에 일본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한반도에 처음 보급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사행 과정에서 남긴 기록은 일본의 정치·문화·학문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통신사 정사 조엄이 쓰시마 번주에게 선물한 글씨첩, 1764년, 종이에 묵서, 시모노세키시립역사박물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제11차 통신사행의 정사 조엄이 사행 후 귀국 길에 쓰시마에서, 중국의 고시를 써서 번주에게 선물한 서첩이다. 번주 소 요시아리는 여러 차례 조엄에게 글씨를 구했는데 마침내 그의 요청에 따라 그가 제공한 금박의 화려한 종이에 써준 것이다. 조엄과 쓰시마 번주와의 친분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조엄의 공식 기록인 사행록에는 최천종 살인사건으로 마음이 아파 휘호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여, 실제와의 간극을 확인할 수 있다. 사행단의 대표로서 왕조에 제출해야 했던 보고서인 사행록에는 엄중한 태도로 임하며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제술관 남옥이 일본인들과 주고받은 시를 엮은 책 日觀唱酬, 1764년, 종이에 묵서, 국립중앙도서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제술관 남옥이 일본 문사들과 화답한 시를 귀국 후 엮은 사행시집이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상권은 전해지지 않고, 중·하권에 일본인들과 주고받은 800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남옥은 특히 에도로 가는 조선 사행원을 수행한 나바 로도와 각별한 인연을 맺으며 지기로까지 발전했는데, 그와의 시 2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통신사를 다녀온 뒤, 일본 문사들에게 화답한 시를 모은 《일관창수》 외에도, 조선 사행원들과 창화한 시를 모은
《일관시초》, 일본에서의 사행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일관기해교》 등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한글에 대한 관심 등을 나눈 필담을 기록한 책 桑韓筆語, 1764년, 종이에 목판 인쇄, 국립해양박물관>

통신사가 에도에 머물렀을 때 야마다 세이친과 나눈 필담과 창화시를 기록한 책이다. 의관이었던 세이친은 양의 이좌국과 많은 필담을 나눴으며, 조선의 언문에도 관심이 많아 언문 반절을 순서대로 늘어놓은 ‘언문 반절표’를 수록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와 오사카의 다이텐 겐조와의 필담을 엮은 책 萍遇錄, 1764년, 종이에 묵서, 료소쿠인>

통신사행 중 선승 다이텐 겐조와의 필담을 엮은 책이다. 계미사행 도중 발생한 최천종 살인사건으로 통신사들은 오사카에 오랫동안 체류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를 존중하며, 조선의 의관, 과거제도, 조선과 중국의 관계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필담을 나눈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다이텐을 통해 오사카의 문인들과도 교류를 이어나갔다. 오사카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기무라 겐카도와의 만남과 함께, 성대중이 겐카도에게 의뢰해 그려 받은 <겸가당아집도> 관련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와 아카마가세키 유관의 정주학 논쟁이 담긴 필담 책, 1765년, 종이에 목판 인쇄, 국립중앙도서관>

이 책은 통신사의 사문사들이 아카마가세키에서 다키 가쿠다이와 그의 아들 다키고코와 나눈 필담과 창화시를 엮은 것이다. 1권에는 1763년 처음 만났을 때의 필담과 창화시, 2권에는 1764년 돌아가는 길에 나눈 필담과 창화시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다키 가쿠다이와 조선 문사들 간의 소라이학 논쟁이 중심 내용이다. 원중거는 일본의 성리학에 대해 묻고, 가쿠다이는 일본의 소라이학을 소개하며 정주의 학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논쟁은 깊이 진전되기 전에 마무리되며, 결국 학술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끝을 맺는다. 나가토주 하기번의 명륜관 소속 문사들은 통신사 방문 시마다 조선인을 만나 필담창화를 나눈 기록을 정리해 출간했으며, 다키 가쿠다이와의 첫 만남은 남옥 일행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기록은 조선과 일본 문사들 사이의 사상 논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역관 박덕원과 일본인이 부채에 주고 받은 시, 1764년, 서면에 묵서, 서울역사박물관>

통신사 역관으로 추정되는 박덕원과 일본인의 시로 구성된 부채 글씨이다. 서로 창수한 시로 여겨진다. 박덕원은 통신사 소통사로 방일했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문위행으로서 쓰시마를 왕래한 인물이라는 이견도 있다. 일본 각지에 남긴 그의 와카와 하이카이 작품을 통해 수준급의 일본어 실력을 갖추었고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교토에서 만난 통신사 사행원들의 관상과 복식을 기록한 책, 1764년, 종이에 목판 인쇄 국립중앙도서관>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

에도시대 일본 관상가인 니야마 다이호가 교토에서 만난 통신사 사행원들의 관상에 관해 기록한 책이다. 통신사 행렬의 의관과 복장이 중국과 닮은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어 통신사 초상을 남기고자 하였다. 초상은 삼사와 당상역관, 서기, 양의, 군관, 하관의 모습까지 다양한 직책의 인물을 묘사했다. 삼사는 와룡관과 난삼을 착용하였으며, 당상역관과 양의는 유건해을 관모로 착용했다. 복건에 심의를 착용한 서기 성대중은 33세의 젊은 나이로 묘사되었으며, 화원 김유성은 풍만한 얼굴에 탕건을 쓰고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한편 전신상으로 묘사한 하관 2명은 폭이 좁은 소매와 바지를 착용하고 있으며, 산닭과 술병을 그려 넣어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마지막 통론에는 조선인의 골격이 준수하며 피부가 깨끗하고 탄탄하다고 언급하여 일본인과 용모에 차이가 있음을 적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서얼 출신 서기 성대중의 시문집, 1764년, 종이에 목판 인쇄, 서울역사박물관>

정사 서기 성대중의 시문집이다. 성대중은 서얼 출신이었지만, 영조의 탕평책 덕분에 문신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에 가서 뛰어난 시문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인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이후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도 참여하며 학자로서 역량을 펼쳤다. 책에는 사행 당시 지은 시문과 정사 조엄, 부사 서기였던 원중거와 주고받은 시문 등이 실려 있다. 사행을 다녀온 뒤, 성대중은 일본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일본록日本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기록들은 북학파 실학자들과 후학들에게 일본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정보를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실학자 정약용이 일본에 대한 인식 등을 기록한 총서, 20세기, 종이에 활판 인쇄,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저술을 총정리한 문집이다. 권12 <논論>편에 일본에 대한 견해를 담은 <일본론>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의 고학파 유학자들의 저작을 읽은 정약용은 일본이 유교에 의해 이미 문명화되었으므로, 더 이상 일본의 침략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논지를 펼쳤다. 그는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통신사 등을 통해 전해진 일본의 학문과 기술을 접하며, 이전의 실학자들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일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역관이자 천재 시인 이언진이 사행의 느낀 점을 기록한 친필 시집, 1764년, 종이에 묵서, 서울역사박물관>

역관 이언진이 통신사 사행에서 경험한 것을 기록한 친필 시집이다. 이중 <해람편>은 일본 사행 시 보고 느낀 것을 1764년 5월 말, 6월 초 사이에 이키않 선상에서 적은 것이다. 일본의 지리적인 위치와 풍물부터, 대도시 오사카의 발전된 모습, 일본 서민들의 모습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스승 이용휴와 제술관 남옥이 각각 청색, 붉은색으로 비점을 찍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말은 진실이니 이웃나라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며 시를 읊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일본의 변화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박지원, 이덕무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은 역관임에도 시로 명성을 날렸던 그의 시에 감화하여 전기를 짓기도 하였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한·중·일 삼국의 만남
통신사의 교류는 두 나라 사이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을 매개로 한·중·일의 문화가 서로 교차하며 이어졌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가 하나의 지식 공동체로 연결되는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연행사를 통한 청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를 통해 활발히 교류하며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인식과 지식을 넓혀갔습니다. 일본은 중화문명을 직접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을 통해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배우려 했습니다. 조선의 옷차림과 음악, 과거제도, 관혼상제 등에 큰 관심을 보이며 이를 연구하고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반면, 조선은 일본의 고학과 실용적인 기술·학문을 접하며 시야를 넓혀 갔습니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의 문사들은 ‘중화”‘라는 공통된 문화 코드를 기반으로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탐구하면서 한·중·일의 문화를 연결했습니다. 또한, 통신사와 연행사를 통해 문물이 직접 이동되며 더욱 긴밀하게 이어졌습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붓과 바람을 따라, 사행을 이끈 이들
통신사에서 문화 교류를 이끈 주역은 사대부 문인이 아니라 중인, 서얼, 그리고 하급 무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에서 신분상의 제약을 받았지만, 통신사에서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사대부들은 바닷길을 건너야 하고, 당시 ‘오랑캐’로 여겨지던 일본인들과 교류해야 하는 사행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삼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통신사 구성원은 중인 이하의 신분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하여 통신사를 꾸렸습니다. 특히, 시와 글을 짓고 필담을 주고받는 임무를 맡은 사문사(제술관과 3명의 서기)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이들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만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통역과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역관, 글씨와 그림을 맡은 사자관과 화원, 수행 중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일본과 의학 교류를 담당한 의원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함께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신분의 한계로 재능을 펼칠 기회가 적었지만, 통신사를 통해 일본을 경험하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고, 그 이름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필담창화(筆談唱和)란 조선통신사와 일본의 학자나 문인들이 한자를 매개로 시나 글을 주고받으며 문학적으로 교류한 활동을 말한다. 이런 교류는 단순한 외교 의례를 넘어 문화나 지식 교류의 장이 되었고, 많은 필담창화집이 남아 있다.

<하코네에서 통신정사 임광이 접대에 감사하며 지은 시, 1636년, 종이에 묵서, 오사카역사박물관,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제4차 통신사행의 정사 임광이 에도로 가는 도중의 히코네에서 접대를 받으며 술잔과 그릇에 기록한 시로, 접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고 있다. 왼쪽 편에는 접대를 맡은 가신으로 보이는 노부나리가 화답해 읊은 한시도 같이 적혀 있다. 1636년은 통신사행이 정례화된 시기로, 사행이 문화교류적 성격으로 전환되면서 필담창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일본에서 활약한 조선인 유학자 이매계의 시, 17세기, 종이에 묵서, 오사카역사박물관>

일본에서 활약한 조선인 유학자 이매계의 시서이다. 이매계의 부친은 임진왜란 중 포로로 일본에 잡혀간 이진영이다. 그는 기슈번의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시강待講이기도 했다.이매계는 1655년 통신사가 왔을 때 요리노부와 동반하여 에도에서 그들을 만나기도 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와 뱃슈 소엔이 주고받은 필담과 시문을 모은 책, 1712년, 종이에 목판 인쇄, 쇼코쿠지 지쇼인>

제8차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 사행원과 일본 접반승 벳슈 소엔이 주고받은 필담과 시문을 모은 필담창화집이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뛰어난 외교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편집한 것으로,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에는 서문과<사객통통집성씨>, 벳슈 소엔이 정사·제술관과 나눈 필담, 그리고 총 150제 200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한객사장>에 실린 시를 나누어 수록하여 조선과 일본 문인들의 교류를 더욱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를 통해 통신사와 접반승 양 측의 시각을 나타냈다. (안내문,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필담의 전문화, 양국 의원의 의학 필담집 桑韓醫談, 1713년, 종이에 목판 인쇄, 국립중앙도서관>

제8차 통신사의 양의 기두문과 일본 기후현 오가키세의 의원인 기타오 순포 사이의 필담을 정리한 책이다. 일본에서는 나지 않는 인삼과 그 대용 약재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전문 의학 필담집은 1711년 사행에서 처음 등장한 주제로, 이를 통해 필담창화집의 내용이 점차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0

<교토에서 기노시타 준안, 구마가이 료안이 조선인들과 주고받은 필담 시집, 1682년, 종이에 묵서, 에도 도쿄박물관>

제7차 통신사행 시 사행원들과 일본의 유학자 기노시타 준안, 구마가이 료안 등의 필담과 시를 모은 책이다. 1682년 통신사 일행은 교토의 혼코쿠지本제하에 머물렀고, 이때 구마가이 료안 일행은 제술관 성완,, 서기 이담령, 자제군관 홍세태 등을 찾아가 필담을 나누고 시를 주고받았다. 필담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면서 1682년에 제술관 직임이 새롭게 편성되었고, 필담과 시 교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기노시타 준안은 쇼군에게 학문을 강의한 막부의 유관으로, 그의 문하에서는 이후 통신사들과 교류하게 되는 아라이 하쿠세키, 무로 규소, 아메노모리 호슈 등이 배출되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의 서문과 발문이 담긴 아라이 하쿠세키의 시집, 1713년, 종이에 목판 인쇄, 부산박물관>

제8차 통신사행 당시 교류했던 아라이 하쿠세키의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제술관 이현이 서문을, 정사 조태억이 발문을 남겼다. 하쿠세키는 통신사 사행단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시 <하쿠세키시초>를 쓰시마의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보내 서문과 발문을 받은 후, 책자로 편집했다. 통신사는 외교 사절단을 넘어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문화비평가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통신사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일본 내에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출세에도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하쿠세키는 1682년 통신사로부터 시를 극찬받고 시집의 서문을 받으면서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기온 난카이가 제술관 이현의 문장을 찬탄하며 지은 시, 1711년, 종이에 묵서, 한림대학교박물관>
<2번째, 기온 난카이가 제술관 이현의 문장을 찬탄하며 지은 시, 1711년, 종이에 묵서, 한림대학교박물관>
<3번째, 기온 난카이가 제술관 이현의 문장을 찬탄하며 지은 시, 1711년, 종이에 묵서, 한림대학교박물관>
<4번째, 기온 난카이가 제술관 이현의 문장을 찬탄하며 지은 시, 1711년, 종이에 묵서, 한림대학교박물관>

제8차 통신사 일행과 필담을 나눴던 일본 유학자 기온 난카이가 작성한 시고이다. 1711년 10월 28일 후카미 겐타이 등 7인이 방문하여 필담을 나누었는데, 기온 난카이는 당시 이현·엄한중·남성중 등과 창화한 8수, 11월 5일 통신사가 일본의 고텐이.마츠우라 기에게 주었던 시 5수를 합쳐 두루마리로 만들었다. 제술관 이현의 뛰어난 문장에 대한 찬탄과 사신들과의 우의를 담고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에도에서 제술관 성완, 서기 이담령 등이 야마다 겐킨과 주고받은 시, 1683년, 종이에 묵서, 국립해양박물관>
<2번째, 에도에서 제술관 성완, 서기 이담령 등이 야마다 겐킨과 주고받은 시, 1683년, 종이에 묵서, 국립해양박물관>
<3번째>
<4번째>
<5번째>
<5번째>

제7차 통신사행의 제술관 성완, 서기 이담령 등이 야마다 겐킨과 주고받은 시를 모은 두루마리이다. 17세의 신동이었던 겐킨은 에도의 객관인 혼세이지사를하에서 필담을 나누고, 이를 정리해 지인에게 보냈다. 그는 통신사와 학술교류를 한 최초의 조슈번 유학자로 평가된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 사자관 김의신의 글씨첩, 17세기, 종이에 묵서, 부산박물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통신사 사자관 김의신의 글씨로, 북송 당자서의 <고연명>을 옮겨 쓴 것이다. 김의신은 석봉체의 대가로, 1643년과 1655년 사자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사자관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1617년 이후 사행에서는 2명씩 동행하기도 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조선에서 온 손님들이 남긴 시문과 편지를 모아 만든 두루마리 韓客詞章, 1711년, 종이에 묵서, 쇼코쿠지 지쇼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제8차 통신사행 당시, 삼사와 사문사가 벳슈 소인에게 보낸 시문과 서신을 모아 만든 두루마리이다. 총 68점의 시문과 3점의 서신이 수록 되어 있다. 이는 접반승 소엔이 오사카에서 에도로 함께 이동하며 통신사에게 받은 글들이다. 당시 소엔은 쇼코쿠지의 주지였으며, 이 시문들은 현재까지 지쇼인에 전해지고 있다. 내용은 소엔의 학문과 인품에 대한 찬탄, 통신사의 여정, 일본의 문물과 자연에 대한 관심 등을 담고 있다. 시를 남긴 이는 정사 조태억, 부사 임수간, 종사관 이방언을 비롯해 제술관 이현, 서기 홍순연·엄한중·남성중으로, 특히 삼사와 제술관의 시가 많다. 반면 벳슈 소엔의 시는 포함되지 않았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조선에서 온 손님들이 남긴 시문과 편지를 모아 만든 두루마리, 1711년, 종이에 묵서, 쇼코쿠지 지쇼인>
<조선에서 온 손님들이 남긴 시문과 편지를 모아 만든 두루마리, 1711년, 종이에 묵서, 쇼코쿠지 지쇼인>

제8차 통신사행 당시, 삼사와 사문사가 벳슈 소엔에게 보낸 시문과 서신을 모아 만든 두루마리이다. 총 68점의 시문과 3점의 서신이 수록되어있다. 이는 접반승 소엔이 오사카에서 에도로 함께 이동하며 통신사에게 받은 글들이다.(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붓으로 나눈 대화, 필담창화
조선과 일본은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했지만, 서로 언어가 달라 말로 직접 소통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문으로 글을 주고받는 방식, 즉 필담을 통해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시문을 주고받는 데서 시작된 필담창화는 점차 학문, 문학, 사상, 관습에 대한 깊이있는 논의로 확장되었습니다. 1682년을 기점으로 활발해진 필담창화는 1763년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통신사 일행은 사행길에 동행한 일본의 승려, 학자, 관리들과 필담을 나누었는데, 머무는 객관에는 지역 문인들이 찾아와 시를 청하기도 했습니다. 붓글씨나 그림을 요청하는 이들도 많아 밤을 새워 응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일본의 문사들 가운데는 통신사와의 필담을 계기로 학문적 명성을 얻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에도로 오가는 길에 몇 달간 동행하며 평생의 지기로 발전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필담은 이처럼 국경을 넘어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공감하는 교류의 장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양국의 대표로서 자국의 학문과 문학적 수준을 드러내는 경쟁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국가적 사명과 개인의 사귐 사이에서 필담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소통의 장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조선통신사 일행 중 화원(畵員)은 그림과 기록화를 담당한 화가, 즉 기록화 담당 관원이다. 그들은 단순히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외교 사행의 시각적 기록자이자 문화 전파자로서 매우 중요했다. 화원은 도화서 소속 화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그들이 남긴 그림들로는 사행과정을 연속적으로 그린 사행도(使行圖), 일본 주요 도시나 사찰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도감도(圖鑑圖), 교류장면 등을 표현한 초상화 및 풍속화, 일본에 선물로 전한 산수도 같은 그림들이 있다. 전문화원들의 작품으로 상당히 높은 작품 수준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화가로 김명국, 김진여, 변박, 정상기, 김윤겸 등이 있으며 특히 김명국은 인기가 높아 일본측의 요청으로 사행단으로 2번 일본을 방문했다.

<1 청옹 글씨 선면대구, 2 괴원 그림 선면산수도, 3 청옹 글씨 선면, 마지막 사행 교류의 서화로 꾸민 작은 병풍, 1811년, 종이에 묵서,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쇼쿠쿠지 지쇼인>
<1 청옹 글씨 선면, 2 초원 그림 송하독서도, 3 괴원 그림 백합도, 마지막 사행 교류의 서화로 꾸민 작은 병풍, 1811년, 종이에 묵서,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쇼쿠쿠지 지쇼인>
<도화서 화원 이한철의 나한 그림, 1811년, 종이에 옅은 채색, 료소쿠인>

조선 말기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 이한철의 그림이다. 이한철은 마지막 통신사행을 다녀온 이의양의 아들이자 당시의 대표적인 화사이다. 이 그림은 역동적으로 파도치는 물결 위에서 난을 밟고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나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나한의 모습은 험난함 속에서도 중생을 향한 구제의 의지와 깨달음을 향한 정신적 여정을 보여준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일본에 두 번 파견된 화원 김명국의 포대화상 그림, 1643년, 종이에 수묵, 오사카역사박물관>

김명국이 제5차 통신사행의 화원으로 파견되었을 당시 호방한 수묵화풍으로 그린 포대화상 그림이다. 그는 1636년 통신사 수행 중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일본 측 요청으로 1643년에 다시 파견되었다. 포대화상은 당 말기 중국 남부에 실존했던 승려로, 일본에서는 칠복신 중 하나로 숭배되었다. 이 작품의 화제는 제술관 박안기가 적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 화원 이기룡의 말 그림, 1643년, 비단에 수묵, 쇼코쿠지 지쇼인>

제5차 통신사행 화원 이기룡의 그림이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그는 1643년 김명국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화비고>에는 그들이 하야시 라잔의 아들 형제에게 두 점의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 그림은 버드나무 아래 두 필의 말이 노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조선 중기 화단에서 유행한 절파浙派 화풍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함께 통신사로 갔던 제술관 박안기의 화제가 적혀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0

일본으로 수출된 호랑이 그림은, 단순한 민화가 아니라 조선 회화의 상징성과 일본의 취향이 결합된 특수한 교류 예술품이었다. 일본에 수출된 작품들은 특히 커다란 눈, 뾰족한 이빨, 과장된 표정으로 묘사되어 민화적 요소가 강하다. 쓰시마를 통한 무역이 주요 통로였으며, 일본의 상류층 문인, 사찰, 상인층 사이에서 호평받았다.

<인기를 얻어 일본으로 수출된 호랑이 그림, 18~19세기, 종이에 채색, 오사카역사박물관>

이원찬의 호랑이 그림이다. 그는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의 <고화비고>와 <조선서화전>에 기록되는 등 일본 내에서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은 화가이다. 이를 방증하듯 현재 그의 작품은 국내보다 일본에 더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호랑이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림들은 공통적으로 동그랗고 큰 눈, 벌레 모양의 작은 눈동자, ‘3’자 모양의 윗입술, 검은 꼬리 끝, 검은 점이 박힌 하얀 원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호랑이 그림은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았던 일본에서 값비싼 호랑이 가죽을 대신해 선호되었으며, 이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대나무와 함께 그려진 호랑이 그림, 19세기,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서울역사박물관>

이 그림은 일본 수출용으로 제작된 작자 미상의 호랑이 그림이다. 조선시대 호랑이 그림은 주로 소나무와 함께 그려졌으나, 일본 수출을 위한 호랑이 그림은 대나무와 함께 그려진 사례가 많다. 대나무와 호랑이의 조합은 선종과 관련된 의미를 지니며, 여기에 무사적 취향이 더해져 에도 시대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매 그림과 함께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소재였던 만큼, 일본인의 취향에 맞춰 적극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일본의 문인·화가들과 교유한 화원 김유성이 나무 아래 인물의 모습을 그린 그림, 1764년, 비단에 수묵, 오사카역사박물관>

제11차 통신사행의 화원 김유성이 그린 수하인물도이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그는 일본에서 문인· 화가들과 교유하며 일본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남화가 이케노 타이가는 그에게 화법을 묻고 서화를 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오사카의 문인 기무라 겐카도도 그의 그림을 소장했다. 이 작품은 동자와 함께 나무 아래에서 달밤의 정경을 즐기는 고사해를 그린 것으로, 청신한 수묵으로 남종화풍을 잘 구현했다. ‘조선서암’이라고 적혀 있어, 통신사행 당시 제작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변박(卞璞)은 한양이 아닌 동래에서 활동했던 화가로 조선통신사에 참여하여 재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일본 시미즈의 세이켄지(淸見寺)와 다카마쓰의 호넨지(法然寺) 등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동래부순절도(보물)와 초량왜관의 모습을 그린 왜관도 등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작품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부산 화가 변박의 매화 그림, 1764년, 비단에 수묵, 부산박물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제11차 통신사행의 기선장 변박이 그린 매화 그림이다. 왼쪽 하단에 “갑신년 초여름 일본에서 술재가 그리다.”라고 적혀 있어, 1764년 통신사행 당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휘어진 매화 나무 위로 성글게 핀 매화 꽃가지를 간결한 수묵의 필치로 묘사하여 문인적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난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부산 화가 변박의 호랑이 그림, 1764년,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오사카역사박물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제11차 통신사행의 기선장 변박이 그린 호랑이 그림이다. 동래부 소속 화원이었던 그는 정사 조엄의 추천을 받아 기선장으로 통신사에 동행했다. 원래 기선장은 오사카에 머무르는 것이 관례였으나, 뛰어난 그림 실력 덕분에 에도까지 함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1764년 3월 13일, 에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이소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통신사가 각지에서 일본인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호랑이 그림은 매 그림과 함께 일본에서 인기가 높아, 일본 수출용 회화에서도 중요한 화제로 여겨졌다. 이 그림 속 호랑이는 소나무와 함께 민화풍으로 그려졌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 사자관 김계승이 쓴 시, 1748년, 종이에 묵서, 오사카역사박물관>

제10차 통신사행의 사자관 김계승이 쓴 시이다. <고화비고>에 “무진년 어느 달, 조선국의 진광 김계승이 쓰다 .”라는 낙관이 게재되어 있어, 일본에 작품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그에 대해 “필법이 기이하고 뛰어나며, 사람됨이 대쪽 같고 호탕하다.”라고 기록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일본인들이 좋아한 매 그림, 19세기, 비단에 수묵, 부산박물관, 유세스코 세계기록유산>

마지막 통신사행의 화원으로 쓰시마에 다녀온 이의양이 그린 매 그림이다. 매 그림은 호랑이 그림과 함께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아 일정한 수요가 있었고, 부산지역동래 왜관을 통해 많이 유통되었다. 특히 나무 줄기나 가지에 앉은 매 그림은 상무 기풍을 중시한 일본에서 애호되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도화서 화원 이의양이 그린 산수화, 1811년, 비단에 먹과 옅은 채색, 오사카역사박물관>

마지막 통신사행의 화원으로 쓰시마에 다녀온 이의양의 산수화이다. ‘동씨의 활법에 유래한다”는 그림 속의 글처럼 중국 송대 화가 동원의 화풍을 따랐다.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묵점을 찍어 습윤한 중국 강남의 산수풍경을 그려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이의양이 달빛 아래 거문고를 타는 인물을 그린 그림,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서울역사박물관>

마지막 통신사행의 화원으로 쓰시마에 다녀온 이의양의 그림이다. 달빛 아래 거문고를 타는 고사와 차를 끓이는 동자의 모습을 청신한 운치로 그려냈다. 이름 앞에 ‘조선국’이라는 표현은 사행원들이 일본에서 서화를 제작할 때 반복적으로 썼던 용어이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이의양이 마지막 사행 시 쓰시마에서 그린 산수화, 1811년, 비단에 수묵, 서울역사박물관>

마지막 통신사행의 화원으로 쓰시마에 다녀온 이의양의 산수화이다. “조선국 이신 신미년 통신사”이라는 글을 통해 당시 사행 시 쓰시마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1811년 제작된 그림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사행 시 증정을 위해 가져가거나 현장에서 그린 것들로 여겨진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통신사 정사 조태억이 말을 탄 인물을 그린 그림, 1711년, 비단에 옅은 채색, 한림대학교박물관>

제8차 통신사행의 정사 조태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기마인물도이다. 말을 타고 가는 인물을 통해 자연을 벗 삼아 은일을 즐기는 모습을 표현했다. 한편 조태억은 사행에 동행했던 쇼코쿠지의 벳슈 소엔 스님과 막부 측근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와 교류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화원 하담이 그리고 일본인 고가 세이리가 글을 쓴 수노인도, 1811년, 종이에 수묵, 오사카역사박물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하담이 그린 수노인그림이다. 수노인은 장수를 의미하는 길상적 소재로 일본인들에게 애호되었다. 우측 상단에는 1811년 마지막 사행 때 조선인들과 교류한 학자 고가 세이리의 글이 쓰여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하담이 거문고를 타는 인물을 그린 그림, 19세기, 비단에 채색, 한림대학교박물관>

소나무 아래 선비가 거문고를 타는 탈속적인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상단에는 ‘조선국 하담’이라고 쓰여 있어 하담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 외에도 일본에 하담의 그림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이의양이 일본 화가 다니 분초의 화풍을 따라 그린 산수화, 1811년, 종이에 수묵, 부산박물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마지막 통신사행의 화원으로 쓰시마에 다녀온 이의양의 산수화이다. 오른쪽 상단에 일본에 함께 다녀온 역관 진동익이 쓴 “다니 분초의 그림을 방하다”라는 글이 있어, 이의양이 일본의 남종화가 다니 분초 그림에 근거하여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니 분초 그림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편, 중국 원대의 문인화가 황공망의 화풍도 반영하고 있다. 전경의 언덕과 원경의 큰 산으로 이루어진 2단 구성과 피마준뼈의 표현 등에서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의양은 통신사로서 쓰시마에서 3개월 가량 머물면서 일본인들의 요청에 응하여 다수의 그림을 제작했는데, 그 교류의 과정에서 다니 분초의 그림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화원이 일본 남화가의 작품을 방하여 그렸음을 언급한 유일한 작품이란 점에서, 조선 후기 한일 회화 교류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부산 화가 변지한이 그린 꽃나무와 새를 그린 그림, 18~19세기,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 부산박물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부산의 화가 변지한이 꽃나무와 새를 그림이다. 그는 통신사 화가 변박의 집안사람으로, 밀양 변씨 가문의 역관 네트워크를 활용해 일본 수출용 그림을 제작했다. 그림에는 “강남의 봄빛은 여울과 같고, 고결한 사람이 한 가지를 잡고 있네”라는 화제와 ‘조선국 괴원’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 일본의 요청으로 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변지한이 옅은 채색으로 그린 화조 그림은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부산의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 수출을 위한 회화도 활발히 제작되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붓끝으로 전해진 조선의 예술
조선 시대 일본과의 회화 교류는 통신사 수행 화원들이 주도했습니다. 김명국부터 이의양까지 많은 화가가 사절 수행 중 그림을 남겼고, 이를 통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통신사 사절단은 외교와 현지 시찰뿐만 아니라, 자국 문화를 알리는 문화 교류의 역할도 했습니다. 일본의 지형과 새로운 문물을 그려오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요청에 부응해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특히, 호랑이나 매 그림, 선종화 등을 그려 일본인들의 취향을 반영하면서도 조선의 미술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가와 문인 등 개인 간의 사귐도 이어졌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 서로의 그림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통신사를 통해 확산된 회화 교류는 사행이 중단된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직접적인 교류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쓰시마-왜관의 중개를 통해 일본에서 조선의 그림을 주문제작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고, 조선의 그림은 계속해서 일본으로 전해졌습니다. 외교는 단절되어도 문화는 끊임없이 흘러갔습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바다를 건너 흐르는 문화
17세기 후반,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되고 통신사 외교 체제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통신사 사절단의 문화 교류는 활발해졌습니다. 오랜 외교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화 교류는 서로를 이해하고 우호를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고 일본을 ‘교화’하고자 했으며, 일본은 중국과의 교류가 끊긴 상황에서 조선을 통해 문물과 학문을 배우려 했습니다. 두 나라는 ‘한자’라는 공통의 문자로 소통하며 학문과 예술을 교류했습니다. 처음에는 경계와 멸시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나아갔습니다. 조선 전기의 통신사가 동아시아 외교 질서 구축의 기반을 다졌다면, 후기의 통신사는 동아시아 정세의 안정을 기반으로 한 문화교류를 통해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를 연결하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비록 200년 동안 20년에 한 번꼴로만 이루어진 사행이었지만, 그 영향을 받은 문화는 상류층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까지 스며들어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출처>

  1. 안내문,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2025년
  2.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5년 10월 11일 작성. (https://chat.openai.com)
  3. “본문의 초안 작성에 Google Gemini (2025년 10월 12일 버전)의 도움을 받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