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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새나라 새미술] 불교미술,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는 억압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민간 신앙과 왕실의 후원 속에서 불상 조성은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특히 15세기 태조·태종·세종대의 왕실 발원으로 불상이 제작되기도 했다. 억불정책 속에서도 불교 조형 전통의 맥을 잇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들은 화려함보다 내면적 신앙심과 단정한 미감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전북 익산시 낭산면 심곡사에 있는 칠층석탑에서 출토된 금동불감과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보물)이다. 중국 원.명 대에 크게 유행한 라마불상 양식이 반영된 조선초기 소형 금동불상과 같은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청동불감과 금동불상, 조선 전기, 청동.금동, 익산 심곡사, 보물>

불감은 밑판, 측면판, 뒤판, 뚜껑을 각각 한 판으로 만들고, 문비만 두 판으로 구성하였다. 타출기법으로 아미타여래설법도와 금강역사가 표현되어 있다.  

<청동불감>

심곡사 탑에서 발견된 부처와 불감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기단에서 발견된 부처와 불감입니다. 상자 모양의 불감 안에 7구의 부처와 보살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7구 중 크기가 큰 아미타부처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삼존상은 원·명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으로 날씬한 신체를 드러내고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4구의 작은 상은 대좌가 없고 부처는 양 어깨를 가리는 옷을 입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탑 안에 부처와 불감을 넣는 신앙이 유행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금동관음보살좌상, 조선 15세기, 금동>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관음보살입니다. 화불을 새긴 높은 보관을 쓰고 커다란 귀걸이와 목걸이,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중국 원과 명明에서 들어온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으로 이국적인 모습입니다. 동을 주조해 만들고 옻칠한 후 금을 입혀 완성했습니다. 관음보살의 내부에서는 복장물이 발견되었는데. ‘오향’ ‘오약’을 담은 포장지에는 창제 초기의 훈민정음으로 명칭을 적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전 회양 장연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은 금강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금동보살이다. 섬세한 표현, 화려한 장신구와 보관 등 티베트 불교미술의 영향을 받은 고려후기 관음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강산은 <화엄경>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담무보살이 상주하는 성지로 추앙되었다. 동시대와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불상이다.

<금동관음보살좌상, 여말선초, 금동, 보물>

금강산에서 발견된 관음보살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입니다. 화불이 있는 보관을 쓰고 큰 귀걸이와 목걸이, 무릎까지 드리워진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허리가 잘록하고 곧은 자세와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은 고려 말 원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 보살은 금강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합니다. 금강산은 고려시대부터 불교 성지로 여겨졌고, 불상을 금강산의 암벽에 봉안하는 신앙이 조선 초까지 유행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 금동불상>(보물)은 충남 부여군에 있는 무량사 오층석탑(보물)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총 4구의 불상으로 1구는 고려시대 금동보살좌상이며, 3구는 조선시대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배치하고 있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은 고려 말 조선 초 유행한 관음과 지장으로 구성된 아미타여래삼존 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 금동삼존불좌상, 조선 15세기, 불교중앙박물관, 보물>

무량사 탑에서 발견된 부처와 보살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의 1층 안에서 발견된 부처와 보살입니다. 탑의 2층과 5층에서도 사리장엄이 발견되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부처와 보살을 만들어 탑 안에 넣는 신앙이 유행했습니다. 아미타부처와 지장보살, 관음보살의 삼존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조합은 조선 15세기에 많이 나타납니다. 아미타부처의 뾰족한 육계와 지장보살이 두건을 쓴 모습, 보살의 가슴에 세 줄을 드리운 목걸이 형태는 조선 전기에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금金,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유교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불교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교는 공적 영역에서 경제적·사회적 위치가 제한되었지만, 이념과 명분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또한 변함없이 삶의 고통과 죽음의 슬픔을 위로하는 신앙으로 존재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 가족과 사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까지 화려한 불교미술의 조성과 불교 행사에 끊임없이 열중했습니다. 빛나는 금빛 부처를 만드는 마음은 유교 사회가 시작되었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금처럼, 변치 않는 마음을 담은 조선 전기의 불교미술을 3부에서 소개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조선 왕실에서는 여전히 불교를 신앙적·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다. 따라서 왕실의 불상 발원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세종대까지는 왕실의 안녕, 선왕 추복 등의 이유로 왕실 차원에서 불상 발원이 이루어 졌으며, 정치적 상징성도 지니고 있었다. 조선 중기에는 중종때까지 비공식적으로 여성 중심의 발원이 이루어졌다.

<금산사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 조선 1492년 봉안, 금동, 금산사 성보박물관>
<불상>
<불상>
<사리갖춤>
<발원문>
<발원에 참여한 사람들>

왕실 가족이 금산사 탑을 수리하고 모신 장엄
세조의 아들인 덕원군과 만 명이 넘는 신도들이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을 수리하고 넣은 부처와 보살, 사리함 등과 중창 기록입니다. 금산사는 1460년 세조의 시주로 중창이 시작되어 왕실의 지원을 받은 사찰이 었습니다. 금산사 탑을 해체할 때에 향기가 나고 장륙상이 땀을 흘리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왕실 후원 불사에는 이러한 기적이 자주 기록되어 불사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순천 매곡동 석탑 청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은 전남 순천시 매곡동 절터 석탑에서 발견되었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불로 배치된 조선전기 아마타삼존상의 특징을 잘 부여주고 있다. 불감은 임의로 수리되어 원래의 모습은 아니나 불상을 안치하면 규격에 잘 맞고 전각형태의 불감이라는 당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매곡동 삼층석탑 출토 청동불감과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 조선 1468년, 청동.금동, 국립광주박물관, 보물>
<발원문>

승려와 신도들이 탑에 모신 부처와 불감
순천 매곡동의 무너진 석탑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죽사의 승려 일선과 신도 277명이 극락에 가기를 기원하며 만들어 모셨습니다. 승려나 관리가 이끌고 많은 사람이 참여해 탑, 종, 불상을 만드는 풍습은 고려 말부터 유행했습니다. 아미타부처와 지장보살, 관음보살은 한양에서 먼 지방 사찰에서 만들었음에도 명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과 뛰어난 조각 수법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청곡사 청동은입사향완, 조선 1397년, 청동에 은입사>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향완
조선 태조의 비인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만들어 왕후의 고향인 진주 청곡사에 모신 향완입니다. 상총하개이 청곡사를 중창한 후 향완을 만들었고, 당시 관직에 있던 김사행, 김진 등의 인물이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둥글고 넓은 받침과 원통형 몸체, 넓은 테두리가 달린 향완의 형태는 고려 14세기의 향완과 거의 흡사합니다. 몸체 전체에 가는 은을 입사해하여 문양을 표현한 기품있는 향완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아들이 왕이 되기 전, 의경세자의 죽음 이후 궁궐을 나와 머물던 시기에 정업원 주지와 함께 제작해 수종사에 봉안한 종이다. 어깨에 문양대를 두고 연꽃 모양 당좌를 새기는 등 고려 범종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수종사 동종, 조선 1469년, 청동>

인수대비가 만든 수종사 동종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만들어 수종사에 모신 종입니다. 인수대비는 아들이 왕이 되기 전, 수변 한씨였던 시절에 남편인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궁궐을 나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종은 당시에 만든 것으로, 왕실 여성들이 궁궐을 나와 머물렀던 사찰인 정업원 주지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 종은 어깨에 문양대를 세우고 연꽃 모양 당좌를 표현하는 등 고려 종 양식을 이어받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이래 정착된 한국종의 양식에 원나라 양식이 반영됬다. 높이 67cm의 중형 범종이다. 여러 개의 평행한 선을 돌렸으며 범자와 용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15세기 왕실에서 만든 종의 특징을 보여준다.

<유점사 동종, 조선 15세기, 청동>

왕실이 후원한 유점사에서 만든 종
금강산 유점사에 모셔졌던 종입니다. 유점사는 15세기에 여러 차례 왕실의 후원을 받아 중창했는데, 이 종 역시 당시 왕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종의 어깨는 둥글게 내려왔고, 여러 개의 평행한 선을 돌렸으며 범자와 용 무늬를 표현했습니다. 종 외부분 고리에는 두 마리의 용이 살짝 머리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15세기 왕실에서 만든 종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1565년, 문정왕후가 명종의 만수무강과 왕실 후손의 탄생을 기원하며 회암사 낙성에 맞춰 조성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이다.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한 간략한 형식이다. 적갈색 비단 바탕에 금니로 그려 매우 화려하다. 당대 최고 기량을 지닌 궁궁화원들이 제작한 것으로 품위와 섬세한 필력을 보여준다. 당시 제작된 400점 중 국내에는 이 작품만 남아 있다고 한다.

<약사여래삼존도, 조선 1565년, 비단에 금니, 보물>

회암사 중창을 기념하는 400점의 부처 그림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는 불교를 깊이 믿었습니다. 문정왕후는 여러 사찰을 후원했고, 이 그림은 양주 회암사 중창을 마친 것을 기념하며 만든 400폭의 그림 중 한 폭입니다. 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미륵불의 네 부처의 세계를 각각 금선으로 50폭, 채색한 그림으로 50폭을 그렸습니다. 조선 16세기에는 이 그림과 같이 어두운 바탕에 금선으로만 그린 화려한 그림이 유행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영산회상도, 조선 16세기, 비단에 금니, 호놀룰루아카데미미술>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보니 부처
갈색 비단 바탕에 금선으로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인도의 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강조되고 『묘법연화경』 신앙이 유행하면서 설법도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그림 아래쪽에는 부처의 설법을 듣는 인물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설법을 들으며 꿇어앉은 보살이나 승려의 뒷모습은 조선 15세기의 경전 변상도에서부터 등장해 조선 후기까지 유행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수월관음보살도, 조선 1427년, 비단에 색, 바이린지, 일본 후쿠오카시 지정문화재>

왕실 여성이 발원한 관음보살 그림
파도치는 바다에 솟은 바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은 관음보살 그림입니다. 선재동자가 함께 표현되는 관음보살 그림은 고려를 계승하여 조선 전기에도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은 ‘진양 강씨’와 ‘남양 홍씨’가 시주하여 1427년에 조성되었습니다. 그림 왼쪽 아래에 높은 머리 장식을 한 여성이 시녀를 데리고 예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의 발원자로 보입니다. 신분이 높아 보이는 복장에서 왕실 여성이 발원하여 만든 그림으로 추정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석가출가도, 조선 15세기, 비단에 색, 금니, 퀼른동아시아미술관>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
석가모니 부치의 일생을 그린 여러 폭의 그림 중 출가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림 오른쪽에 그려진 큰 궁궐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가 떠난 것을 알아차리고 슬퍼하는 태자비와 시녀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화면 위 왼쪽에는 집을 나서 스스로 머리를 깎는 석가모니의 모습을 그렸고, 화면 아래쪽에는 슬퍼하는 아버지 정반왕과 빈 말을 붙들고 우는 태자비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지은 부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 등에 나오는 구절을 충실히 나타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석가탄생도, 조선 15세기, 비단에 색, 금니, 혼가쿠지>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을 그린 여러 폭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석가모니가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날 때의 여러 이야기를 한 화면에 그렸습니다. 그림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는 모습을 그렸고, 시간적으로 전후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배치했습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장면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지은 부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에 실린 변상도와 매우 비슷하여, 왕실에서 만든 그림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출토 금동불감과 금동석가여래삼존좌상, 조선 1493년 봉안, 금동, 불교중앙박물관, 보물>
<발원문>
<금동불감과 금동석가여래삼존좌상>
<금동불감 내부>

왕실 여성들이 수종사 탑에 모신 부처와 불감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1층 안에서 금동과 나무로 만든 삼존이 각각 발견되었습니다. 금동불감의 안쪽 면에는 세 부처와 인왕상을 새겼고, 뒷면에는 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조선 3대왕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와 9대왕 성종의 후궁들이 시주하여 만들었습니다. 수종사는 왕실과 관련이 깊은 사찰로, 같은 탑에서는 조선 17세기에 왕실 여성들이 만들어 넣은 불상도 발견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보물)은 둥글고 풍만한 얼굴에 단아한 이목구비로 보살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천의를 걸치고 세 줄의 목걸이와 독특한 띠매듭 등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반가좌 자세와 대좌를 짚은 왼손 등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되며, 당당한 체구에 비해 손발이 작아 비례감은 다소 떨어진다. 흙으로 만든 상 위에 삼베를 겹겹이 씌우고 옻을 발라 단단하게 만든 뒤 속을 비우는 건칠 기법으로 만들었다.

<기림사 건칠관음보살 반가상, 조선 1501년, 건칠, 경주 기림사, 보물>

사대부가 발원한 건칠 관음보살
한쪽 다리를 내리고 편안하게 앉은 관음보살입니다. 흙으로 만든 상 위에 삼베를 겹겹이 씌우고 옻을 발라 단단하게 만든 뒤 속을 비우는 건칠 기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건칠상은 재료인 옻이 귀하고 제작이 까다로워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의 예가 여러 구 남아 있습니다. 이 상은 태내군수를 지냈던 이원림이 발원했습니다. 관직에 올랐던 인물이 발원하여 조성한 뛰어난 상으로 주목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1990년 흑석사 대웅전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에서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복장유물 중 발원문에 조선초 세조 때(1458년) 법천사 삼존불로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복장유물로는 <불상 조성 권고문>, <불상 조성 복장기>, <볼조삼경합부> 등이 나았다. 38종의 직물, 5향, 5곡, 유리, 호방 등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는 불상 복장에 관한 절차를 설명한 <조상경>에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중선 등 9명, 조선 1457~1458년, 나무, 영주 흑석사, 국보>
<아미타여래좌상 조성 보권문, 조선 1475년, 종이에 먹, 영주 흑석사, 국보>
<아미타여래좌상 조성 복장기, 조선 1458년, 비단과 종이에 먹, 영주 흑석사, 국보>

왕실 가족이 시주하고 화원이 만든 부처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과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 명빈 김씨가 시주하여 1458년에 만든 아미타부처입니다. 불상을 만든 장인은 국가에 소속된 이중선과 8명의 화원입니다. 불교를 깊이 믿은 효령대군과 왕실 가족들은 왕과 왕비가 장수하고, 전쟁이 영원히 사라지며, 나라가 태평하기를 부처에게 빌었습니다. 이 부처는 관음보살, 지장보살과 함께 조성된 아미타부처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아미타부처가 유행하여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 보광명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이다. 불상에서 조성내력을 기록한 글과 시주자 목록이 발견되어 1515년에 새로 고쳐 조성되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조성을 주도한 이는 승려가 아닌 상화원(上畵員) 이영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영문 등 3명, 조선 1515년 중수, 나무, 예천 용문사, 보물>

지방 관리와 신도가 고쳐 만든 부처
이 부처는 15세기경 처음 만들었으며, 1515년 지방 관리와 신도 100여 명이 모여 3개월에 걸쳐 수리 했습니다. 수리에 참여한 화원 두 명과 목수, 철장의 이름을 모두 적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불상의 제작이나 수리 작업을 여러 사람이 함께 했고, 각각 맡은 작업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이 부처는 얼굴이 통통하고 어깨가 살짝 움츠러든 모습을 보여, 15세기 말에서 16세기의 부처로 이어지는 특징을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지장시왕도, 영지, 조선 1586년, 삼베에 색, 스오코쿠분지>

지장보살과 열 명의 왕
삼베 바탕에 화사한 색으로 지장보살과 열 명의 왕을 그렸습니다. 인물들은 중요한 순서에 따라 크고 작게 그려졌고, 피어나는 구름으로 경계를 채웠습니다. 이 그림은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 살아 있는 동안 죄를 미리 없애는 예수재에 사용하기 위해 그렸습니다. 지장보살 그림은 이처럼 여러 가지 불교 의식에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또 시주 물품과 시주자의 이름을 자세히 적었는데, 이는 16세기 민간에서 만든 그림에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삼장보살도, 성운, 조선 1550년, 삼베에 색, 신쵸코쿠지>

불교 의식을 위한 세 보살 그림
천장보살, 지지보살, 지장보살을 한 폭에 그렸습니다. 세 보살은 삼장보살이라고 부르며, 이 그림은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는 불교 의식인 수륙재에 사용하기 위해 그려 사용했습니다. 세 보살은 중국 명에서 수륙재를 위한 불화에도 나오지만, 조선 전기에는 삼장보살만을 따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삼장보살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조선만의 독특한 그림이 됩니다. 이 그림은 현재 완전하게 남아 있는 조선 전기의 삼장보살 그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석가여래설법도, 천욱, 조선 1592년, 삼베에 색, 리움미술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왕실 여성인 상궁 강씨가 시주하여 만든 그림입니다. 정면으로 보고 앉은 부처는 깨닫는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한쪽 어깨를 드러낸 옷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설법 장면은 15세기 중국 명에서 들어온 경전의 변상판화의 영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16세기 왕실에서 만든 그림에 자주 나타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지장보살과 열 명의 왕, 여섯 보살, 권속을 그린 불화이다. 본존지장보살은 머리를 깎은 비구의 모습이며, 높은 사각 대좌에 앉아 한쪽 다리를 내리고 있다. 그림에 적혀 있는 기록에 따르면 1580년에 조성된것으로 추정된다. 인울과 각종 의장물의 세부 표현이 뛰어나고 색감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실력있는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지장시왕도, 조선 1580년, 삼베에 색, 호림박물관, 보물>

지장보살과 10명의 왕
지장보살과 열 명의 왕, 여섯 보살, 권속을 그렸습니다. 본존 지장보살은 머리를 깎은 비구의 모습이며, 높은 사각 대좌에 앉아 한쪽 다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장보살은 16세기경 지장보살그림과 조각에 공통적으로 유행하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삼베 바탕에 그렸고 금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인물의 세부 표현이 뛰어나고 필치가 능숙하여 실력 있는 화원의 그림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조선 부처, 유교의 시대를 가로지르다.
조선 초에는 왕실 가족이 불교미술의 조성을 주도했습니다. 왕과 왕비, 대군과 종친들은 사찰을 짓고 불상과 불화를 만들었으며 경전을 간행했습니다. 왕실에서는 가장 뛰어난 장인을 고용하고 가장 좋은 재료를 들여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을 떠난 가족을 추모하고 산 자를 위해 복을 비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조선의 불교미술은 최고의 정성과 간절한 바람을 담고 유교의 시대를 가로질러 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높이 33.4cm의 작은 불상으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을 깍아 만든 석조불상으로 몸체는 뚜껍게 도금하였으며 대좌에는 붉은 빛 칠을 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목은 짧으며 다리와 양손을 작게 표현하고 있다. 바위 형태 대좌 뒷면에는 불상의 조성경위, 시주자, 제작연대를 밝혀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정덕십년’명 석조지장보살좌상, 절학 등 2명, 조선 1515녀, 돌, 보물>

돌로 만든 지장보살
두건을 쓰고 한 손에 보주를 든 지장보살입니다. 한 덩어리의 돌을 깎아 만들고 대좌 뒷면에 명문을 새겼습니다. 원래 관음보살과 한 쌍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지장보살만 남아 있습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는 죽은 후 극락에 가기 위해, 또 현재의 삶에서 복을 얻기 위해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함께 많이 믿었습니다. 이 보살은 조선 16세기에 나타나는 두건을 쓴 지장보살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목조불상은 대체로 세개 이상의 나무로 만든 부재를 연결하였으며 내부는 복장물을 안치하기 위해 깊게 팠다. 조선시대 불상은 조형적인 예술성이나 종교적인 표현 등이 돋보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특색있는 고유의 불상의 형태를 보여준다.

<목조여래좌상, 조선 16세기 후반, 나무>

나무를 조립해 만든 부처
머리부터 몸통을 하나의 나무로 만들고, 손과 무릎을 따로 만들어 붙였습니다. 몸과 무릎의 연결 부분에는 흙을 발라 덮었습니다. 몸과 팔다리의 표현이 경직되고 옷주름이 단순하게 새겨져, 16세기 후반 부처의 특징을 보입니다. 내부를 깊게 파내어 후령통, 사리병, 경전, 직물, 약재 등 복장물을 넣었습니다. 조성 발원문은 없었지만 조선 전기의 비단 조각과 후령통, 경전이 발견되어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건칠불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통해 개략적인 형태를 만들고 다시 조각하여 만든다. 건칠상은 재료인 옻이 귀하고 제작이 까다로워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건칠관음보살 좌상, 조선 전기, 건칠>

건칠로 만든 관음보살
흙으로 만든 상 위에 여러 겹으로 삼베를 씌우고 옻칠한 후 속을 비워 만든 건칠관음보살입니다. 건칠상은 재료인 옻이 귀하고 제작이 까다로워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의 예가 여러 구 남아 있습니다. 이 보살은 현재 남아 있는 건칠상 중 가장 크기가 작습니다. 이 보살은 한쪽 다리를 내리고 있는 유희좌遊戴坐의 자세를 한 관음보살입니다. 보살의 둥근 얼굴과 처진 어깨, 입고 있는 옷의 형태와 장신구 등에서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목조관음보살 좌상, 조선 전기, 나무, 흙, 국립경주박물관>

나무에 흙을 씌워 만든 관음보살
한쪽 무릎을 세우고 편안하게 앉은 관음보살입니다. 이 윤왕좌輪표坐 자세는고려시대 이후 수월관음보살의 전형 적인 자세였으며, 조선 전기에도 여전히 이어졌습니다. 보살의 몸체는 여러 조각의 나무를 못으로 조립하고 바닥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흙으로 섬세한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보관과 양팔 장식은 금속으로 만들고 색색의 보석을 박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보살의 둥근 얼굴과 좁은 어깨, 편평한 가슴 등에서 조선 전기의 특징이 엿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불석(zeolite)는 경주 인근 지역에서 주로 산출되는 돌이다. 입자가 작교 표면이 매끄러우면서 단단하고 가벼워 불상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불석으로 만든 불상은 재료의 산출되는 경주 인근에서 제작되어 봉안할 사찰로 옮겨졌다. 

<석조관음보살좌상, 조선 전기, 돌(제올라이트),>

무른 돌로 만든 보살
돌에 조각한 후 금박을 입혀 만든 보살입니다. 연꽃과 넝쿨을 정교하게 새긴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가슴과 어깨, 등 뒤까지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몸을 타고 흘러내린 옷주름도 솜씨좋게 조각했는데, 비교적 조각하기 쉬운 무른 돌로 만들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무른 돌로 만든 여러 구의 상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소조불상은 나무나 금속에 비해 비용과 제작 시간이 적게 들고, 대형 불상 조성에 적합했다. 완성 후에는 표면에 아교와 석회를 섞은 백토를 발라 굳히고, 그 위에 금박이나 채색을 입혀 마감했다. 조선 전기의 소조불상은 단정하고 온화한 조형미, 간결한 옷주름, 현실적인 인체 비례가 특징이며, 흙을 이용해 경제적으로 제작된 사찰 중심의 신앙적 불상이다.

<소조관음보살 입상, 조선전기, 나무, 흙>
<소조 지장보살입상, 조선전기, 나무, 흙>

나무에 흙을 씌워 만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한 쌍으로 만들어진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입니다. 조각난 나무를 못으로 연결하여 상을 만들고 전체적으로 흙을 얇게 씌웠습니다. 얼굴과 턱, 온몸에 걸친 옷주름처럼 섬세한 표현이 필요한 곳에 흙을 덮어 조각한 후 삼베를 씌우고 옻칠을 더했습니다. 나무의 단단함과 흙의 섬세함을 모두 이용한 방법입니다. 보살은 얼굴이 장방형에 하반신이 긴 비율을 보입니다. 이는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나뉜 장신구와 다리 앞에서 주름진 옷주름 표현과 함께 15세기 보살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원래 아미타부처를 중심으로 삼존상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목조여래좌상, 조선 전기, 나무>

나무에 흙을 씌워 만든 부처,
여러 조각의 나무를 조립하고 흙을 두텁게 씌워 만든 부처입니다. 부처의 등과 어깨에 접힌 옷주름, 팔목에 걸친 옷자락 등 세밀한 부분을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나무의 단단함과 흙의 세밀함을 모두 이용한 방법입니다. 부처는 상체가 길고 곧은 자세이지만 고개를 살짝 숙였습니다. 양쪽 무릎에 둥근 옷주름이 깊게 나타나고, 머리 중간에는 반달 모양의 중간계주가 있어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감로도, 조선 16세기, 삼베에 색>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하는 그림
굶주린 영혼을 위로하는 불교 의식에 걸었던 그림입니다. 굶주린 아귀가 그림 가운데 그려져 있으며,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족,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승려들, 의식 공간에 내려오는 부처와 보살이 그려졌습니다. 의식의 목적과 내용을 그림으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일반 신도들을 위한 의식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부터 많이 그려지기 시작해 조선의 독특한 의식용 그림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모두의 손에서 모두의 마음으로
불교는 16세기에 정책적으로 소외되었지만 지방 사찰은 신앙의 중심지로 세력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사찰에서 불교미술을 조성하거나 의식을 베풀 때는 신분이 높거나 낮은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다양한 계층에서 불교미술을 조성하게 되면서 값비싼 재료보다 나무, 흙과 같이 구하기 쉬운 재료가 선호되었습니다. 사찰마다 불교 의식을 자주 하면서 의식에 필요한 불화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5년
  2. ‘국보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5년
  3. ‘보물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5년
  4. ‘보물 순천 매곡동 석탑 청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5년
  5. ‘보물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 금동불상 일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5년
  6. ‘보물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5년
  7. ‘보물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5년
  8.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5년 10월 28일 작성. (https://chat.opena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