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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 철저한 대비, 승리의 바다

2025년 겨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을 열었다. 시는 임진왜란 속 영웅으로서뿐 아니라, 성실하고 섬세한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난중일기》와 종가 유품을 통해, 전쟁의 고난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삶과 가족을 잃은 슬픔, 개인적인 감성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의 주제와 내용을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평이한 내용이지만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징비록》, 《조선방역지도》, 《이순신 장검》 같은 국보급 문화재를 비롯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나 임진왜란과 관련된 중요한 문화유산들을 실물로 볼 수 있게 한 귀중한 전시회였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

1부 철저한 대비, 그리고 승리의 바다

사부유서(賜符諭書)는 조선 시대에 국왕이 군사 지휘권을 가진 고위 관료나 지방의 관찰사, 절도사 등에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인 ‘발병부(發兵符)’를 내릴 때, 그 목적과 사용 규칙을 함께 적어 내리던 국왕의 명령서이다.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은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수사로 무려 7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승진을 통해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큰 위기감을 느끼고 능력 있는 무관들을 전방에 전면 배치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좌의정이었던 서애 류성룡의 절대적인 신임과 추천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 군사적 능력이 입증된 상태였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면서 밀부와 함께 내린 문서, 사부유서賜符諭書, 조선 1591년, 현충사, 보물>

이순신이 1591년(선조 24) 2월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전라좌수사)로 임명받을 때 밀부와 함께 받은 명령서이다. 전라좌수사는 전라좌도 수군의 지휘권을 가진 관원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밀부와 함께 내린 문서라 하여 ‘사부유서’라고 한다. 비상명령이 있을 때는 왕명과 같이 내려온 밀부와 자신의 밀부를 맞추어 확인한 후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이 문서와 함께 제29호 밀부를 받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는 1557년에 호조의 관원들이 중심이 되어 제작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국가 지도이다. 순수한 학술용이나 민간용이 아니라, 국가의 행정 및 국방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통치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전국의 행정구역과 군사 요충지를 한눈에 파악하여 세금을 걷고 군사를 배치하는 등 국가 관리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전기 수영과 병영이 표시된 지도,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 조선 1557~1558년(추정), 국사편찬위원회, 국보>

수영과 병영 등이 표기되어 조선 전기의 해안 방어와 수군 제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지도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국 지도이다. 조선의 수군 제도는 태조 대부터 수군도절제사, 첨절제사, 만호, 천호로 조직된 지휘 체계가 있었고, 세종 대에는 해안 주요 군현에 수군진이 설치되었다. 수군진은 병선을 배치하여 주변 해역을 방어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특별전, 2026년)

〈조라포남봉관해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5년 전인 1587년 초,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거제도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군사 방비 태세를 점검하고 결의를 다진 극적인 순간을 기록한 계회도이다. 일반적인 계회도와는 달리 당시 조선 조정이 남해안 방어에 얼마나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라포는 경남 거제시 옥포 인근에 있던 수군 진영이다. 가덕도와 쓰시마 방면 바다를 감시하는 핵심 요충지였다.

<조라포 남쪽 봉우리에서 수군을 점검한 행사를 그린 그림. 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 조선 1587년, 국립진주박물관>
<그림 부분>

1587년(선조 20) 초 경상도관찰사 유영립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이태형과 함께 거제도 수군의 군비 태세를 점검하는 순시 중에 조라포(지금의 거제도 옥포) 남봉에서 치른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쓰시마가 잘 보이는 조라포의 남봉에서 남해를 지키는 결의를 다지는 행사로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조라포는 가덕도 방면으로 들어오는 적을 차단하는 동시에 쓰시마 방면의 정찰과 유인 작전의 거점 역할을 했다. 경상도 수군 점검을 보여주는 이 그림을 통해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5관·5포를 순시하며 각 군영을 점검 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특별전, 2026년)

곧 전란이 일어날 것이다. 전라좌수사 임명
1591년 2월,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은 서애 류성룡이 추천하여 파격적으로 전라좌수사(정3품)에 임명되어 여수의 좌 수영 에 부임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병력과 전선을 점검하고, 무기와 각종 장비, 성곽과 봉수대를 정비했습니다. 좌수영 앞바다에는 쇠사슬을 걸어 기습에 대비했고, 판옥선을 보수하고 거북선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군사들을 철저하게 훈련하고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엄히 다스렸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은 거북선의 화포 시험까지 마치며 전란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이순신은 이처럼 만약의 사태에 철저하게 대비한 성실한 장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 갑옷을 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 豐臣秀吉畫像, 일본 1721년, 나고야시 히데요시 기요마사기념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은 대부분 흰 옷의 관복을 입은 관백의 모습인데, 갑옷을 입은 초상화는 이례적이다. 오른손에는 붉은 털이 달린 지휘용 막대인 사이하이(朵配)를, 왼손에는 칼을 들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투구를 두었다. 갑옷은 그의 처가인 기노시타(木下) 가문에 보관되어온 무구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그림의 위쪽에 1721년 8월 18일 증손 도요토미 슈죠가 지은 찬문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은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에 있었던 일본의 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거대한 병참기지로 건설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다이묘들이 이곳에 군대를 이끌고 집결했다. 한때 오사카성 다음으로 큰 성이었다고 하며 축성시기도 빠른 편이다. 중심에 혼마루가 있고 주변에 많은 다이묘들의 진영들이 있었다. 현재는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2 히젠 나고야성에 배치한 다이묘 진영을 그린 지도, 나고야진도 名護屋陳圖, 일본 19세기,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
<나고야성 주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준비하기 위하여 히젠 나고야성에 다이묘 진영을 배치한 지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영을 중심으로 각 다이묘의 진영을 표시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무는 본부가 위치한 히젠 나고야성과 그 주변에는 조선 침략을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 등을 비롯한 다이묘와 병사, 상인과 물자 등이 전국에서 모여 들었다. 나고야성은 이키섬壱岐島과 쓰시마를 거쳐 부산으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구로다 나가마사는 지쿠젠 국(현재의 후쿠오카현)의 대다이묘이자 후쿠오카번의 초대 번주가 된 인물읻다. 한국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장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특히 그가 통치하게 된 후쿠오카 지역에 끌려간 조선인 도공과 장인들은 훗날 하카타 인형이나 하카타 직물 같은 현지 전통 공예 발전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3 다양한 형태의 투구를 쓰고 있는 구로다 나가마사와 가신 24명의 초상화, 구로다 25기 초상 黑田二十五騎畫像, 일본 19세기, 후쿠오카시박물관>

구로다 나가마사와 휘하 24인의 가신을 함께 그린 초상이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제3군을 이끄는 선봉장으로 참전하였다. 전국 시대를 거치며 조총 방어에 효과적이면서 제작이 더 간편한 형태로 갑주가 바뀌며 소속 부대별로 갑옷의 색상을 통일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지휘관들은 한눈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개성있는 형태와 장식이 달린 투구를 착용했다. 이순신이 쓴 《임진장초》에는 일본군의 특이하고 위압적인 투구에 대해 “귀신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가토 요시아키는 일본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까지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이다.임진왜란 초기 안골포 해전 등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크게 패했으나, 칠전량 해전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울산왜성에 고립된 가토 기요마사를 구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4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군 장수 가토 요시아키에게 내린 포상 문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주인장 豐臣秀吉朱印狀, 일본 1592년,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

1592년 12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해전 성과에 대한 포상으로 대포 50정을 하사하는 문서이다. ‘붉은 도장을 찍은 문서’라는 뜻의 朱印狀(슈인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막부 등이 공식 명령이나 허가를 내릴 때 발급한 문서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문서에 이듬해 3월 자신이 직접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가토 요시아키는 이순신과의 해전에서는 패했으나 정유재란 때 원균이 이끄는 수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동래부 순절도〉는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동래성에서 왜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관민들의 치열한 항전과 순절의 순간을 묘사한 대표적인 조선시대 전쟁 기록화이다. 중앙에 순절하는 송상현 부사와 상단의 머리를 돌려 도망치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인 동래성 전투를 그린 그림, 동래부 순절도 東萊俯殉節圖, 변박, 조선 1760년, 육군박물관, 보물>

1592년(선조 25) 4월 15일 동래성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조선군, 백성들의 항전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화면의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의 군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일본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 있는 송상현의 순절 장면이 그려져 있다.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1709년(숙종 35) 최초로 그려진<동래부 순절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그림은 1760년(영조 36) 동래부사 홍명한이 화가 변박에게 당시의 원본을 모사하게 한 그림이다. 이러한 순절도는 역대 동래 부사들이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 을 깨우치며 순절자들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 현장(부산 동래읍성 터)에서는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대규모 유물과 인골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선 유물로 보기 힘들었던 조선 전기의 실전 무기들이 해자의 뻘 흙 속에 묻혀 있어 부식되지 않고 완벽한 상태로 다량 발굴되었다. 특히, 철판 조각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조선 시대의 찰갑(비늘갑옷)이 고스란히 출토되었는데 TV드라마 등에서 보아왔던 조선병사의 군복과는 다른 실전에 사용되었던 군복의 모습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 국지창, 일본 16세기, 부산박물관, 부산 수안동 출토><2 투겁창, 조선 16세기, 부산박물관 ,부산 수안동 출토><3 칼, 조선 16세기, 부산박물관, 부산 수안동 출토>
<4 숫깍지, 조선 16세기, 부산박물관, 부산 수안동 출토><5 화살촉, 조선 16세기, 부산박물관, 부산 수안동 출토>
<5 화살촉, 조선 16세기, 부산박물관, 부산 수안동 출토>

동래읍성 출토품
2005년 부산 지하철 공사 과정에서 동래읍성 해자가 드러났다. 2005년~2008년 발굴조사를 통해 다양한 무기류, 인골, 분청사기와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많은 무기들 중 국지창이 유일한 일본 무기라는 점에서 대부분 조선인이 희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골이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조선인의 시신과 무기를 함께 해자에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분하고 원통하다, 분하고 원통하다 부산 함락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란 1년 전부터 규슈의 나고야성(名護屋城)에 전진 기지를 두고 전쟁을 준비하여 15만 8천여 명의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였습니다. 이에 부산진과 동래성이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성을 지키던 군사와 백성들은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참혹한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분하고 원통하다”며 곧바로 전선과 병력을 정비해 출전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의 수군은 첫 격전지인 거제도 옥포 앞바다로 향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여수 선소 유적(사적)은 전남 여수시 시전동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해군 기지이자 조선소 유적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제작을 주도했던 역사적인 현장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1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진 선소 유적에서 출토된 도가니, 철제 못, 목재, 조선, 여수 시전동 선소유적 수습 출토, 국립광주박물관>

여수 선소유적은 조선 시대 순천도호부 산하의 선소로 왜란 때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 방답진 선소와 함께 거북선이 건조된 3개 선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순신이 나대용에게 일러 거북선을 만들도록 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총 5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굴강, 세 검정, 선소창, 칼과 창을 만들던 대장간 등 유적이 확인되었다.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한 것으로 전하는 굴강은 인공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내부에 대선은 2~3척, 소선은 3~4척이 머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때 거북선을 제작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발견 되지 않았지만, 철제 탄환, 철제 못, 소형 목재 등이 출토되어 그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한산도대첩은 1592년 7월 8일(음력),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을 섬멸한 전투이다. 철저한 훈련, 판옥선과 거북선, 막강한 화포 화력, 그리고 지형을 활용한 치밀한 전략이 어우러진 조선 수군의 첫 전면전 승리였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남해의 해상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고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육상 전력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조선 후기 수군의 훈련 모습을 그린 그림, 수군조련도병,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가운데 부분>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후 새로운 해전 전술의 필요성을 느끼고 대규모 선단의 기동 항해 전술 체제를 도입했다.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대규모 연합 훈련을 개최하였는데, 특히 봄 훈련인 춘조에는 군사 3만여 명, 판옥선과 거북선을 포함한 500여 척의 함선이 통영에 집결했다. 가을에는 각 도별로 추조를 실시하였다. 편대의 중앙에는 삼도주사도독사령선(三道舟師都督司令船), 삼도대중군사령선(三道大中軍司令船), 부선(副船), 좌우 탐선(左右探船), 좌우한선(左右翰船)과 소속 편대, 중영·전영·좌영·우영·후영 등 오영에 소속된 전선들이 그려져 있다. 각 전선은 저마다 수군 깃발을 앞뒤로 갖추고 깃발에는 선단 내 위치와 소속 지명을 표시했다. 조선 후기 수군의 체제와 훈련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단 한 척의 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 한산도대첩
1592년 7월,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의 좁고 험한 견내량에 숨어 있던 일본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을 펼쳐 격파했습니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펼친 듯 적을 포위하기 위한 전술 진형입니다. 한산도대첩 외에 다른 해전에서도 종종 활용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수군의 철저한 훈련, 거북선과 판옥선, 대형 화포의 막강한 화력, 지형에 맞춘 진법 운용, 그리고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어우러진 결과였습니다. 한산도대첩은 조선 수군이 거둔 첫 전면전 승리로 남해에서 해상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일본의 서해 진출을 막고 보급로를 차단해 일본군의 육상 전력에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594년(선조 27년) 7월 14일, 선조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 장군에게 내린 국왕의 군사 명령서이다. 1594년 7월은 임진왜란 발발 후 약 2년이 지난 시점으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교섭이 진행되면서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시기이다.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더욱 체계적이고 확실한 군사 지휘권과 책임 의식을 부여하기 위해 이 유서를 하사했다. 군사 발동 절차를 규정하고 위급시 비상 재량권 부여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1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 문서, 사부유서 賜符諭書, 조선 1594년, 현충사, 보물>

1593년(선조26) 8월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겸하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밀부와 함께 내린 유서는 1594년 7월에 뒤늦게 받았다. 이때 받은 밀부는 제10호였다. 전라 좌수사로 임명될 때 받은 유서에서는 이순신을 가리켜 ‘너爾 라고 했는데, 이 유서에서는 ‘경卿’이라고 존칭하였다. 이순신이 1592년 8월에 한산대첩의 공로로 정헌대부(종2품)가 되었기 때문이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면서 이순신은 경상 · 전라 · 충청 삼도의 수군을 총괄할 수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전라우수영에서 훈련할 때 사용한 전선의 진형을 그린 첩, 우수영전진도첩右水營戰陣圖帖, 조선 18세기 후반, 고금도 충무사><3 수군의 진형과 해상 훈련 절차를 담은 휴대용 교본, 수조홀기水操笏記, 조선후기, 해군사관학교박물관>
<2 전라우수영에서 훈련할 때 사용한 전선의 진형을 그린 첩, 오른쪽>
<가운데>
<왼쪽>

전라우수영에서 수군의 훈련에 사용한 전선의 진형을 그린 첩이다. 명령을 받을 때의 진형인 청발 방에서부터 좌우찰(左右札), 이로행(二路行), 첨자찰(尖字札), 곡진(曲陣), 원진(圓陣), 직진(直陣), 예진(鏡陣)과 두 가지 모양의 학익진, 그리고 함대가 정박할 때 펼치는 하방영(下方管)까지 모두 12개의 수군용 진형이 수록되어 있다. 수군용 학익진 그림이 명시적으로 그려진 유일한 자료이자 현존하는 조선시대 수군 관련 문헌 자료 중 가장 많은 진형이 수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수군의 다양한 진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곡진·원진 ·직진·예진 등 오행진 계열의 진은 전투 대형이라기보다는 경계 등에 한하여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첨자찰은 기동 시 전개되었던 진형으로 현존하는 대부분의 수군조련도가 이 첨자찰을 묘사하고 있다. 학익진은 판옥선의 선회기동을 이용하여 배의 현측 화포를 활용할 수 있게 했던 전투 대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3 수군의 진형과 해상 훈련 절차를 담은 휴대용 교본, 수조홀기水操笏記, 조선후기,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 수군의 진형 그림과 해상 훈련 절차를 담은 휴대용 교본이다. 손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절첩식 수첩 형태로 수군 지휘관이 훈련할 때 휴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내용이 압축적이다. 훈련 절차를 설명한 군점홀기(軍點笏記), 야간훈련절차를 적은 야조식(夜操式), 야간에 주요 전선 표시등을 다는 방식을 설명한 현등식(懸燈式), 주요 전투 진형을 설명한 성진도식(成陣圖式), 대장이 영에 나가는 절차를 담은 상영일절차(上營日節次) 등 크게 여섯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진도식 항목에는 장사진·방진·일자진·첨자진· 변환첨자진·원진 등 6개의 진형 그림이 있고, 별도의 도판 설명에서 학익진과 방진 2개 진형을 추가로 설명하고 있다. 본문의 훈련 장소 설명 중 ‘해갑도(한산도 인근 섬)’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을 관할한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겸 경상우수영에서 만들어 사용한 자료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4 현전하는 병서 중 가장 이른 시기의 학익진 그림이 실린 책, 연기신편 演奇新編, 조선 1660년, 개인소장>

1660년 안명로가 저술한 병서로, 예부터 내려온 여러 진법을 망라하고 중국 명나라의 장군 척계광의 병제를 개선하여 덧붙였다. 1664년(현종 5) 양산군수 재직 시절에 《연기신편》을 조정에 보내 병제 개편을 요청했으나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후 《연기신편》은 다른 병서들과 함께 병사 훈련의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특히 여러 진도 중 학익진 그림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학익진 진형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湖南國家之保障(호남국가지보장) 岩三湖南(약무호남) 是無國家(시무국가):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명도 없었을 것이다’란 유명한 글이 담겨 있는 편지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본영(여수)에서 한산도(통영)로 군사 기지(진)를 전격 이동한 직후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현덕승에게 한산도로 진을 옮긴 이유를 설명한 편지, 이순신 서간첩, 조선후기, 현충사, 국보>

이순신이 한산도로 잔을 옮긴 다음 날, 1593년(선조 26) 7월 16일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순신은 이 편지에서 호남은 국가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므로 한산도에 나아가 진을 치고 바닷길을 끊고 일본 수군을 저지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외에도 편지에 일상의 안부와 선물에 대한 감사를 전하면서도 전란을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서간첩은 이순신의 외가쪽 친척으로 추정되는 현건과 현덕승, 조카에게 보낸 이순신의 편지 7통과 큰아들 이회추가 현건에게 보낸 편지 1통을 함께 엮은 것이다. 이순신의 10세손인 이규대가 서간첩을 만든 경위를 기록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선유호상교서는 조선 시대에 국왕이 전쟁이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 관리, 또는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물품을 내릴 때 발급하던 국왕의 공식 명령서이다. 통신과 보급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 국왕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는 증표인 교서와 호상 물품은 전장의 장졸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게 만드는 최고의 정신적 무기였다. 또한 특정 전투의 승리를 조정에서 얼마나 무겁게 인식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일차 사료이다.

<1 선조가 이순신과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며 내린 문서, 선유호상교서 宣諭犒賞教書, 조선 1596년, 현충사, 보물>

1596년(선조 29) 9월 선조가 통제사 이순신 이하 각 진의 군사들에게 병조좌랑을 보내 상을 주고 잔치를 베풀며 노고를 위로하는 문서 이다. 이 교서에서 선조는 변방을 든든히 하고 나라 안을 편안하게 한 것은 이순신과 수군이 용맹하게 지켰기 때문이라고 칭찬하면서 그에 걸맞은 처우를 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부끄러움을 표했다. 이 교서가내려질 무렵,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 되었다. 전쟁의 휴지기가 끝나가던 시점에서 이순신과 수군의 역할이 다시 한 번 주목받을 때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둔전검칙유지〉는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에게 내린 국왕의 특별 명령서이다. 둔전검칙(屯田檢飭)’은 군량미 확보를 위해 운영하던 농경지(둔전)를 철저히 점검하고 단속하라는 의미이다. 당시 수군의 자급자족 노력과 조선 조정의 군량 확보 정책을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2 선조가 둔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적극 힘쓸 것을 당부하며 내린 문서, 둔전검칙유지 屯田檢飭有旨, 조선 1595년, 현충사, 보물>
<반대편>

1595년(선조 28) 1월 21일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군량 확보와 백성의 구휼을 위해 둔전이 중요함을 당부하는 글을 내린 것이다. 선조는 둔전의 수확량을 물어 보며 둔전의 구체적인 운영 방침에 대한 지침을 내렸다. 이 해는 전쟁 발발 4년째로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일본군이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수군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수군은 군역이 고되어 병력의 보충도 쉽지 않았고, 이미 오랜 군역으로 피로하고 군량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이미 1593년부터 둔전 경작을 허락해달라는 장계를 여러 차례 올려, 돌산도 등 남해안 인근의 둔전을 경작하며 피란민의 생계와 군량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임진장초(壬辰狀草)〉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 전투의 경과, 군사 기밀, 그리고 장졸들의 공로 등을 선조 임금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장계(狀啓)의 초고를 묶은 책이다. 1592년 4월 15일 부산진 함락 소식을 듣고 급히 올린 첫 장계부터, 1594년(선조 27년) 1월까지 약 2년 동안 올린 총 62편의 장계가 연도별·날짜별로 정교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전투 경과와 여러 군사 업무에 대해 보고한 글을 모은 책, 임진장초 壬辰狀草, 조선후기, 현충사, 국보>

1592년(선조 25) 4월 15일부터 1594년(선조 27) 1월 17일 까지 이순신이 약 2년간 올린 보고서를 후대에 다른 사람이 옮겨 적어 책으로 묶었다. 선조와 세자(훗날 광해군)에게 올린 공식 문서를 후대에 필사해 묶은 책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에는 주로 초기 출전의 승전 보고가, 강화 협상이 시작된 1593년 이후에는 군사, 행정 보고가 중심을 이룬다. 전투 후 올린 장계에서 전공자, 전사자, 부상자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1·2·3등으로 나누어 상을 청하였고, 피란민들의 생계와 군량 확보를 위해 둔전 경영을 허락해달라고 청하였다. 그 외에도 전투 상황, 군사 운영, 수군 진영의 현황, 인사와 상벌, 군량 조달, 무기 개발, 피란민 대책 등 국가적 사안에 대한 내용과 이에 대한 이순신의 소신이 잘 정리 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의 장계를 베껴 쓴 책, 충민공계초, 조선 1662년, 국립해양박물관>

이순신의 장계를 후대에 베껴 쓴 다양한 이본異本 중 하나 이다. 책 끝에 ‘강희 원년 임인(1662) 3월 쓰기를 마쳤다. 康熙元年壬寅三月書終’이라는 기록이 있어 필사 연도를 알 수 있다. 1592년 4월 15일부터 1594년 4월 20일까지 총 68편의 장계가 수록되어 있다. 《임진장초》는 개별 장계 마다 문서의 형식을 갖추 었는데, 이 책에서는 맨 앞의 장계만 형식을 갖추고 나머지 장계는 본문만 필사하였다. 제목의 ‘충민공’은 이순신이 전사 하자마자 백성들이 힘을 모아 세운 사당인 ‘충민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643년(인조 21)에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기 전까지 이순신을 의미하는 명칭 중 하나가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백성과 군사를 살리자, 한산도 경영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던 1593년 7월, 이순신은 진지를 한산도로 옮겼습니다. 한산도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어지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일본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조선 수군의 방어에도 유리한 지점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에 이순신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경상·전라 · 충청 삼도의 수군 전체를 통괄하여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흉년과 전염병으로 많은 이들이 쓰러지자 이순신은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백성들이 살길을 마련했습니다. 병사들이 직접 농사짓는 둔전을 마련하고, 물고기와 소금을 팔아 군량을 확보했으며 전선을 건조했습니다. 또 조정에 건의하여 진중에서 무과시험을 실시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이순신은 전투에 능한 용맹한 장수일 뿐만 아니라, 군사와 백성의 삶을 섬세하게 살핀 따뜻한 인품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를 덕장이라고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국보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년
  3. ‘보물 이순신 관련 고문서’,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년
  4.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5.17 확인)
  5.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5월 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