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다양한 화포와 함선 무기를 체계적으로 운용해 바다 전투에서 우위를 확보했다. 조선 수군의 가장 큰 특징은 근접 백병전보다 화포 사격을 중시했다. 주력 무기는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 같은 총통류였으며, 배 위에서 장거리 포격이 가능했다. 이들 화포는 단순 탄환뿐 아니라 화살 형태의 대형 발사체인 대장군전, 장군전 등을 쏠 수 있었다. 주력함선인 판옥선은 2층 구조로 설계되어 전투 효율을 높였다. 높은 선체는 적이 쉽게 올라타지 못했다. 이 구조 덕분에 일본군이 선호한 접현 후 칼싸움 전술을 막고, 거리 유지 상태에서 포격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서 단순 무기 성능보다 해역 환경과 결합한 운용을 중시했다. 이런 결과 한산도, 명량, 노량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반면에 원균은 불리한 지형에도 공격을 감행해 조선 수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무기 운용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백병전에 맞서 화포 중심의 전투 방식을 확립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대형 화살인 대장군전 · 장군전을 천자 · 지자 총통으로 발사해 나무로 만든 적선을 깨부수는 ‘당파’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거북선이 선두에서 적의 지휘선을 향해 돌진해 근접 사격을 가하면, 판옥선들이 뒤이어 각종 총통과 화살을 발사해 적군을 무찌르고, 마지막에는 화공으로 적선을 불태우며 전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일본군의 조총은 육지에서는 위력적이었지만 바다의 흔들리는 배 위 에서는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수군의 배는 가볍고 바닥이 뾰족해 빠르지만 충격에 약했습니다.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화포의 화력과 신속한 방향 전환이 가능한 판옥선, 적진을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거북선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 장검
‘이순신 장검(국보)’은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4년 한산도 진중에 있을 때 당시 최고의 도검 장인을 시켜 만들었다. 2m에 가까운 크기와 무게 때문에 전투에서 직접 휘두르기보다는, 진중에 걸어두고 보며 정신을 가다듬고 군령을 엄격히 하기 위한 의전용·벽사(사악한 기운을 물리침)용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전통 도검의 제작 기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시 왜군과의 전쟁을 거치며 유입된 일본 도검의 요소가 일부 융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2미터에 가까운 길이와 고급스러운 장식 문양으로 보아 실제 전투에서 사용했다기보다는 삼도수군통제사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의장용일 가능성이 높다. 최고의 재료와 기량으로 만들어 지금도 상태가 좋다. 칼자루는 조선 환도의 형식이고, 칼날과 코등이 장식은 외래적 양식을 보이며, 칼날에 장식된 입사의 방식과 문양은 조선의 공예적 요소를 결합한 것이다. 조선 도검의 형식에 일부 외래적 요소가 수용되고, 토착화되어 조선식으로 새롭게 변화한 조선의 대표적인 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 三尺誓天 山河動色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도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맹세의 글귀가 새겨진 긴 칼, 이순신 장검
이순신 종가에 전하는 한 쌍의 긴 칼이다. 장검 두 자루의 슴베에는 모두 “갑오년(1594) 4월 일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 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칼날에는 각각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검명’과 내용이 같으며, 이에 따르면 칼날의 명문은 이순신의 글씨라고 한다. 이 칼이 만들어진 1594년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교섭이 진행되던 때로, 이순신은 정유재란 직전인 1597년 2월까지 삼도수군통제사로 한산도에서 군영을 다스렸다. 오랫동안 이어진 전쟁과 전염병,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순신 장검 두 자루의 칼날에 새겨진 글귀에는 이러한 시련의 시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반드시 백성들과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맹세의 의미가 담겨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거북선과 판옥선
조선 시대의 거북선(龜船)은 조선 시대 후기 문헌과 기록화 속에 실물에 가까운 형태로 여러 점 남아 전해진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거북선 도설 (1795년)은 대표적인 공식 시각 자료이며, 조선 후기 각 도의 해군 군함 배치와 형태를 보고하기 위해 그려진 채색 군사 지도 및 그림에서도 거북선을 볼 수 있다.


돌격하라! 거북선이여! 거북선의 첫 출전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처음 모습을 드러 냈습니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삼고 대형 화포인 천지현황의 총통을 쏘아 일본 전선을 격파했습니다. 이어 6월 4일 당항포 해전에서도 거북선이 선두에서 돌진해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거북선은 갑판을 덮개로 덮고 그 위에 철촉을 박아 적이 오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방에서 포를 쏠 수 있었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을 보호하며 적선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일본군은 사방에서 화포를 쏘아도 안이 보이지 않자 거북선을 두려워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거북선 그림이다. 배의 개판 위에 장대를 올리고 돛대 2개를 달아 크게 치장하였다. 배의 좌우에 포구가 각각 10개씩, 노가 각각 8개씩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 종가에 전해 내려 오는 거북선 그림이다. 배의 윗면은 덮개로 덮여 있으나, 이순신이 쓴 장계의 기록과 달리 배의 앞뒤에 용머리와 거북이 꼬리 모양의 장식이 없다. 배의 좌우에 포구가 각각 10개, 선수에 2개 있으며 노는 좌우에 각각 8개씩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일본 수군의 전선, 아타아타케부네는 일본 수군의 대장선으로, 갑판 위에 집 모양의 누각을 설치했다. 판옥선처럼 갑판이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크기는 비슷하거나 작았다. 삼나무를 주로 사용하여 선체가 가볍기 때문에 대형 화포를 실을 수 없고 충돌 시 쉽게 격파되었다.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으로 속도가 빠르고 장거리 항해에 유리한 반면 암초가 많은 연안에서의 항해나 방향 전환은 불리했다. 세키부네는 일본 수군의 주력 전선으로 아타케부네보다 크기가 작으며 바닥이 뽀족한 첨저선이다. 세키부네는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접근하여 상대방의 배에 올라 백병전을 치르기에 최적화 된 전선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판옥선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이었다. 판옥선은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들어 하부에는 노를 젓는 노군을, 상부에는 화포와 군사를 배치했다. 상부 갑판에 누각을 올려 장수가 지휘하는 공간인 장대를 만들었다. 배 아래와 뱃전은 모두 소나무로 만들어 선체가 견고하여, 천자 · 지자 · 현자 · 황자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를 실을 수 있었다. 상부 갑판이 높아 화포와 활을 쏘기 유리했다. 배의 아랫부분이 편평한(U자형) 평저선으로 속도가 느린 대신 신속한 방향 전환이 가능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갑옷과 투구
임진왜란(1592년) 당시는 조선의 갑옷은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임진왜란 초기와 중기까지만 해도 조선군의 가장 표준적인 주력 갑옷은 찰갑이었다. 철(철찰)이나 가죽(피찰)을 작은 조각으로 잘라, 가죽끈으로 가로세로 촘촘하게 엮어 만든 갑옷이다. 몸의 움직임에 따라 조각들이 유연하게 움직여 활동성이 좋고 방어력도 뛰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전방의 핵심 부대와 장수들은 대부분 이 찰갑을 착용했다. 사극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두정갑은 임진왜란 때부터 찰갑과 같이 사용되거나 점차 늘어나는 단계였다. 두정갑은 겉은 천이고 안쪽에 철판을 대어 못으로 고정한 갑옷이다. 제작과 관리가 편리했기때문에 점차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부산 수안동에서 출토된 찰갑편이다. 2005년부터 조선 시대 동래 읍성 해자 발굴이 시작되어 찰갑 상의 1벌과 목을 감싸는 경갑, 찰갑편, 첨주 2편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찰갑의 모양과 찰갑편을 활용하여 철로 미늘을 만들고 사슴 가죽끈으로 미늘을 연결하여 찰갑을 복원 하였다. 출토된 찰갑 1편은 미늘이 붙어서 해체가 불가능하지만 원형의 모습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발굴된 갑옷은 앞트임이 보이지 않아 옆트임을 주어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썼던 투구는 첨주형 투구였다.머리뿐만 아니라 목과 어깨까지 유기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투구 아래쪽에 모자 챙처럼 생긴 차양이 달려 있어 칼이나 장창의 공격을 대응할 수 있게 했다. 고위 무장들이 쓰는 화려하고 멋진 형태인 간주형 투구는 조선중기부터 점차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급군졸들은 단순한 형태의 원주형 투구를 사용했다.

차양이 있는 투구로 《세종실록오례》 <병기>의 첨주와 매우 유사하다. 투구 안쪽에 ‘동래진상東萊鎮上’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류성룡(1542~1607)이 입었던 갑옷의 잔편과 투구이다. 돼지가죽 미늘에 사슴가죽끈을 엮어 만들었다. 가죽을 직사각형으로 자르고 가장자리를 둥글린 후 바깥쪽에서 흑칠을 하였다. 투구는 챙이 붙은 원뿔 모양의 모자 테두리에 쇠미늘을 엮어 만든 볼가리개와 뒷가리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순신도 이와 같은 형태의 갑옷과 투구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내정과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1591년 이순신을 조정에 추천하여 전라좌수사에 임명되도록 한 것은 그의 공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조선의 칼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무기체계는 활과 창, 그리고 화포 중심이었다. 칼은 주 무기가 아니라 화살이 떨어졌을 때나 근접전이 벌어졌을 때 사용하는 호신용 무기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두 손으로 쥐고 강력하게 내리치는 1m 안팎의 길고 예리한 일본도에 조선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전쟁을 치르며 근접용 칼와 검술의 중요성을 느껴 일본도의 장점을 흡수하여 환도를 대대적으로 개량했다. 칼날의 길이가 70~90cm 이상으로 대폭 길어지고, 강력한 베기 위력을 내기 위해 칼자루가 길어져 양손으로 쥘 수 있는 구조로 변했다. 칼날도 완만하게 휘어진 형태가 정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칼에서 변화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 김명윤 쌍검, 조선 중기, 국립진주박물관,
김명윤(1565~1609)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 종공신 1등에 녹훈 되었다. 김명윤에게 선조가 직접 내려준 검으로 두 자루 모두 양날이 있으며 검의 등쪽에 가지가 나와 있다. 이 칼은 쌍검이라고 불려져 왔으나, 형태와 가지 등으로 보면 일반적인 검이 아니라 언월도와 유사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2 이광악 보검, 조선 16세기, 독립기념관
이광악(1557~1608)은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김시민이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해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1594년 곽재우의 부장으로 활동했다. 정유재란 때는 순천왜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선봉에 서며 큰 공을 세웠다. 전란 후 선무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곽재우 장도(보물)은 전체 길이는 86cm이며, 칼등이 위로 완만하게 조금 휘어 있는 곡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환도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고 전투에 나가 ‘홍의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594년 (선조 27) 9월 29일부터 거제도 장문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바다와 육지의 합동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억기(1561~1597)는 전라우수사로서 이순신과 함께 바다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선조가 내려준 보물 검이란 뜻으로 ‘하사보점下賜賣劍’이라는 글자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다른 면에는 용과 화염 보주 무늬가 음각되어 있고, 은입사로 장식한 북두 칠성이 있다. 북두칠성이 있는 칼이라는 뜻으로 ‘칠성검七로劍’이라고도 부른다. 시호는 의민毅認이다.

5 정기룡 장검, 조선 중기, 국립진주박물관
정기룡(1562~1622)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금산 · 상주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고령· 성주 · 합천 · 초계 · 의령 · 거창 등 경상도 지역에서 큰 활약을 했다. 근대에 이르러 ‘육지의 이순신’이라는 평가가 생길 정도로 임진왜란에서 큰 활약을 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6 쌍수도, 조선 중기, 경인미술관
두 손으로 잡고 사용하는 긴 칼로, 쌍수장검雙手長剑 이라고도 한다. 긴 칼날과 뒷 부분에 구리로 날을 싼 동호인銅護刃、 자루로 구성되어 있다. 1598년 조선 최초로 편찬한 무예서인 《무예제보》의 <장도제>와 1790년에 편찬한 병서인 《무예도보통지》의 <쌍수도>에 수록된 칼의 실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중국의 무기

1 칠성쌍검, 중국 청, 경인미술관
중국식 쌍검과 쌍도는 하나의 칼집에 두 자루의 칼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조선이나 일본과는 전혀 다르다. 칼날의 단면은 삼각형이고, 칼날에는 벽사와 길상을 상징하는 칠성문이 시문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2 철간, 중국 명, 경인미술관
철간은 당나라 때부터 사용된 타격병기로, 중무장한 병사를 공격할 때 효과적이었다. 화포와 화승총이 등장한 이후 사용 빈도가 줄어들고 점차 의장병기로 바뀌어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3 군용패도, 중국 명, 경인미술관
명나라에서 제작한 군용 패도이다. 외장은 전형적인 중국 도검의 형태이고 칼날은 일본도를 사용하여 제작 하였다. 명은 일본의 도검에 대적하고자 일본에서 정책적으로 칼날을 수입하여 자신들의 군용 도검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4 관제의장패도, 중국 명, 경인미술관
명대의 실전용이자 의장용 궁중패도이다. 패도는 허리에 차는 칼을 말한다. 칼날은 기본적으로 외날 도의 형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일본의 무기

5 와키자시, 脇差, 일본 에도 중기, 경인미술관
중간 크기의 칼이다. 무로마치 말기에 크고 작은 두 자루의 칼을 차는 것이 정착되면서 애용된 칼이다. 에도시대에 가타나와 와키자시를 함께 차는 것이 무사계급의 관습으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6 카나타, 刀, 일본 16세기 전후, 경인미술과
카타나는 에도시대 일본도의 전형으로 다치보다 짧다. 다치를 패용할 수 없었던 일본의 하급 병사들이 카타나를 간편하게 허리에 차고 전장에 나가 사용 하였다. 슴베의 윗부분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장인 마사무네가 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7 타치, 太刀, 일본 에도 후기, 경인미술관
일본 무사들이 사용하던 칼이다. 타치는 주로 갑주를 착용한 뒤 허리에 수평으로 차는데, 가타나와는 달리 칼날이 밑으로 향하게 패용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8 장척도, 長尺刀, 일본 에도 중기, 경인미술관
일본도는 칼날의 길이가 80cm이상인 칼을 장척도로 분류한다. 전체 길이가 120~130cm 내외의 칼이 주로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장척도 중에서도 130cm 규격을 초과하는 칼들은 노타치野太刀나 오타치大太刀로 구분하여 별도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9 코야리, 小槍, 일본 에도 중기, 경인미술관
일본 창인 야리는 길고 큰 날을 가진 창인 오오미야리大身槍, 가장 표준적인 규격의 창인 야리槍, 소형 창인 코야리小槍 세 가지로 나닌다. 이 코야리는 의장용 또는 장식용 창으로 자루와 창날 집 전체에 작은 자개 조각을 붙여 정교하고 화려하게 제작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철퇴, 창, 칼

근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근력무기, 혹은 화약무기와 대비하여 냉병기라고도 한다. 철퇴는 타격용 무기이기도 하지만 장수가 지휘봉으로도 사용하였다. 창과 언월도는 긴 자루의 이점을 활용하여 공격하는 무기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소형총통
조선 전기의 소형총통은 방화쇠나 화승 장치가 없는 매우 원시적인 형태였다. 조총이 동그란 납탄(구슬)을 주로 쏜 것과 달리, 조선 전기의 총통들은 주로 화살을 날려 보냈다. 화살은 철판 갑옷을 뚫을 정도로 근거리 관통력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에 총통에 여러 발의 작은 화살을 동시에 넣거나, 쇠구슬을 무더기로 넣는 방식으로 대량 살상력을 보였다. 조선 전기의 소형총통 기술은 선조 시기에 이르러 승자총통으로 진화한다. 소형총통은 북방의 여진족을 진압할 때 맹활약을 펼치며 조선의 주력 개인 화기로 자리 잡았으나, 정밀 조준 사격이 가능한 일본의 조총과 만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임진왜란기 조선 수군의 개인 화기는 승자총통류였다. 승자총통이 나온 뒤 조금 더 빨리, 멀리, 정확하게 쏘기 위하여 다양한 유형이 나왔다. 총신을 훨씬 더 길게 만든 별승자(죽절 7개)·별양자 (죽절8개)총통, 죽절을 없애고 가늠자와 가늠쇠를 만들고, 조총 모양의 손잡이를 부착한 소승자총통의 발전까지 이르게 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활과 화살
조선 군사 체계에서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조선군은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왜구에 대응해, 적이 접근하기 전에 활과 화포로 원거리에서 제압하는 전술을 기본으로 삼았다. 무과 시험에서도 활쏘기가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고, 사대부들 역시 교양과 수련의 하나로 활쏘기를 익혔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도입되었지만 활의 중요성은 크게 줄지 않았다. 조선 후기인 17~18세기까지도 활은 조총과 함께 운용되며 군사 체계의 중심 무기로 남았다.

편전은 크기가 작지만 사정거리가 길고 정확도가 높다. 유엽전은 화살촉이 가늘고 버들잎 모양처럼 생겼다. 화전은 불을 붙여 적진에 쏠 수 있는 화살인데, 이순신이 해전에서 화전을 이용해 일본군의 배를 공격하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소리.깃발.화살로 전하는 신호
조선시대 군대의 신호체계는 전투 중 지휘를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시각 신호와 청각 신호를 함께 사용했다. 깃발은 가장 기본적인 지휘 수단이었습니다. 색·크기·모양에 따라 부대 구분과 명령 전달에 쓰였다. 청각신호로는 징과 북, 나각.태평소 등이 사용되었다. 조선군은 활·화포 중심의 원거리 전술을 중시했기 때문에, 부대 간 거리를 유지하며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신호체계도 멀리서 명확히 보이거나 들리는 방식이 발달했다.

소리, 깃발, 화살은 시각과 청각으로 공격 시작, 전진, 후퇴와 같은 명령을 전달하여 위기 상황에서 지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무기” 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대형 총통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전국의 성곽에서 활약한 대형 총통들은 일본군과의 전력 격차를 메우고 전쟁의 판도를 바꾼 일등 공신이었다. 조선은 조선은 화포를 크기에 따라 천자문 순서인 천· 지 · 현 · 황 4등급으로 나누었다. 조선의 대형 총통들은 거대한 나무 화살과 수많은 쇠구슬을 상황에 따라 바꾸어 쏘는 독특한 운용 방식을 가졌다. 조선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은 소나무로 두껍고 튼튼하게 지어져 대형 총통을 사방에 배치할 수 있었으며, 해전 승리의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다.

조선은 화포를 크기에 따라 천자문 순서인 천天· 지地 · 현玄 · 황黃 4등급으로 나누었다. 청동으로 주조된 총통은 쇠탄환과 화살, 단석을 발사하여 멀리 있는 적을 타격했다. 이순신은 대형총통을 판옥선과 거북선에 설치하여 해전에서 결정적 승리 도구로 활용 했다. 총통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선을 파괴하고 천지를 진동 시키는 소리로 일본군의 사기를 꺾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대장군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에서 적함을 격파하기 위해 사용한 대포 화살이다. 최대 중화기인 천자총통에 장전해 발사했으며, 적의 배 밑창을 뚫어 침몰시키는 역할을 했다.

현자총통(玄字銃筒)은 수군의 판옥선과 전국의 주요 성곽에서 맹활약한 화포이다. 3번째 크기에 해당하며 작지만 뛰어난 가성비와 사거리, 명중률을 자랑하며 주력 화포 역할을 했다. 약 30kg 내외에 불과해 이동이 쉽고, 화약 장전 등이 수월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화력을 퍼붓는 측면에서 유리했다.

불랑기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대가 사용한 화포 중 가장 혁신적인 구조를 가진 ‘후장식 연속 사격 화포’이다. 모포와 자포로 구성되 압도적인 연사력을 보여주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으로 조선후기 조선의 주력 화포로 자리잡았다.

비격진천뢰는 주로 대형 총통 중 하나인 완구(碗口)라는 박격포 형태의 화포를 통해 발사된 이 무기이다. 둥근 쇳덩어리 내부에 화약과 파편, 그리고 시간 조절용 도화선 장치(목곡)를 넣은 조선식 시한폭탄이었다.

호준포는 멀리 있는 적을 저격하는 포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적의 밀집 진형을 한 번에 갈아버리는 박격포에 가까웠다. 임진왜란 초기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명나라 군이 불랑기포와 함께 이 호준포를 대량으로 동원해 성벽 뒤에 숨은 일본군 조총병들을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린 이후 조선 조정은 변방 북방 지역과 해안가 요새에 호준포를 대대적으로 자체 주조하여 배치했다.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5.17 확인)
-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5월 17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