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하고 있는 <이순신 관련 고문서(보물)>이다. 국보로 지정된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외에 충무공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국가로 부터 받은 교지를 비롯한 각종 문서들이다. <이순신 선무공신교서>, <이순신 등 선유호상교서>, <이순신 사명훈유교서>, <이순신 유서(2011-1)>, <이순신 유서(2011-2)>, <이순신 유서(2011-3)>, <이순신 무과홍패>,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2011-1)>,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2011-2)>, <이순신 증직교지>, <이순신 사패교지>, <이순신 증시교지>, <이순신 유지>, <이순신 별급문기>, <사패교지>, <증직교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해전인 노량대첩(1598년)에서 전사하셨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포상과 예우는 모두 추증과 공신 책봉 형태로 이루어졌다. 전쟁 직후(1604년) 선무공신 1등 책봉되고 좌의정 추증되었으며, ‘덕풍부원군’에 봉해졌다. 가문에 대해서도 면, 면역 등의 혜택과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었다.

1604년(선조 37) 이순신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봉하며 내린 교서이다. 이순신은 권율(1537~1599), 원균(1540~1597)과 함께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앞에 기록되었다. 교서에는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건원보 권관으로 여진족 울지내鬱只乃를 사로잡은 일, 녹둔도에서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억울하게 백의종군을 하였던 일, 정읍현감을 거쳐 전라좌수사가 되기까지의 공을 모두 적었다. 선조는 교서에서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파직한 것에 대해 조정의 계책이 잘못되었고 곧은 충신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웠다고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선유호상교서는 조선 시대에 국왕이 전쟁이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큰 공을 세운 군인, 관리, 또는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물품을 내릴 때 발급하던 국왕의 공식 명령서이다. 통신과 보급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 국왕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는 증표인 교서와 호상 물품은 전장의 장졸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게 만드는 최고의 정신적 무기였다. 또한 특정 전투의 승리를 조정에서 얼마나 무겁게 인식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일차 사료이다.

1596년(선조 29) 9월 선조가 통제사 이순신 이하 각 진의 군사들에게 병조좌랑을 보내 상을 주고 잔치를 베풀며 노고를 위로하는 문서 이다. 이 교서에서 선조는 변방을 든든히 하고 나라 안을 편안하게 한 것은 이순신과 수군이 용맹하게 지켰기 때문이라고 칭찬하면서 그에 걸맞은 처우를 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부끄러움을 표했다. 이 교서가내려질 무렵,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 되었다. 전쟁의 휴지기가 끝나가던 시점에서 이순신과 수군의 역할이 다시 한 번 주목받을 때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칠천량 해전의 참혹한 패배 직후, 선조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조치는 조선 조정의 절박함과 선조 임금의 굴욕적인 항복, 그리고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가졌던 대체 불가능한 상징성을 모두 담고 있다.

칠천량해전 후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린문서이다. ‘기복起復’이란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나라의 필요에 의하여 부모상을 당하여 휴직중인 관료에게 상복을 벗고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을 뜻한다. 당시 이순신은 모친상 중이 었다. 선조는 이 교서에서 임진년(1592년)부터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파직하고 백의종군하게 한 것은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다시 충청 · 전라 ·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또 한 번 나라를 구해주기를 당부했다. 국왕이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내용의 교서는 매우 드문데, 그만큼 당시의 전황이 다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사부유서(賜符諭書)는 조선 시대에 국왕이 군사 지휘권을 가진 고위 관료나 지방의 관찰사, 절도사 등에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인 ‘발병부(發兵符)’를 내릴 때, 그 목적과 사용 규칙을 함께 적어 내리던 국왕의 명령서이다.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은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수사로 무려 7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승진을 통해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큰 위기감을 느끼고 능력 있는 무관들을 전방에 전면 배치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좌의정이었던 서애 류성룡의 절대적인 신임과 추천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 군사적 능력이 입증된 상태였다.

이순신이 1591년(선조 24) 2월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전라좌수사)로 임명받을 때 밀부와 함께 받은 명령서이다. 전라좌수사는 전라좌도 수군의 지휘권을 가진 관원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밀부와 함께 내린 문서라 하여 ‘사부유서’라고 한다. 비상명령이 있을 때는 왕명과 같이 내려온 밀부와 자신의 밀부를 맞추어 확인한 후 군사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이 문서와 함께 제29호 밀부를 받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594년(선조 27년) 7월 14일, 선조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 장군에게 내린 국왕의 군사 명령서이다. 1594년 7월은 임진왜란 발발 후 약 2년이 지난 시점으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교섭이 진행되면서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시기이다.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더욱 체계적이고 확실한 군사 지휘권과 책임 의식을 부여하기 위해 이 유서를 하사했다. 군사 발동 절차를 규정하고 위급시 비상 재량권 부여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1593년(선조26) 8월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겸하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밀부와 함께 내린 유서는 1594년 7월에 뒤늦게 받았다. 이때 받은 밀부는 제10호였다. 전라 좌수사로 임명될 때 받은 유서에서는 이순신을 가리켜 ‘너爾 라고 했는데, 이 유서에서는 ‘경卿’이라고 존칭하였다. 이순신이 1592년 8월에 한산대첩의 공로로 정헌대부(종2품)가 되었기 때문이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면서 이순신은 경상 · 전라 · 충청 삼도의 수군을 총괄할 수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597년(선조 30) 7월 2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 되면서 받은 유서이다. 지방의 군사 지휘권을 가진 관직에 제수될 때에는 반드시 유서와 함께 밀부를 받는다.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으로 흩어진 조선 수군을 수습하기 위하여 남해안 연안을 가던 중, 8월 3일 경상도 진주 수곡에서 이 유서와 <기복수직교서>를 함께 받았다. 이순신은 교서를 받기 전날 밤,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꾸었다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576년(선조9) 3월에 보인 이순신이 무과 병과 4인으로 급제했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보인은 조선 시대 군역의 한 종류로 군대 간 사람들의 비용과 그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 통해 과거 급제 당시에 이순신이 특별한 직업없이 무과 수련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병과 4인은 이순신의 합격 성적이다. 이때의 무과에서는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5명, 병과 21명으로 총 29명이 합격하였으니, 이순신의 성적 순위는 29명 중에 12번째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이 우의정으로 증직됨에 따라 5년 후인 1603년 이순신의 부인 상주 방씨 또한 정경부인의 작호를 받았다. ‘정경부인’은 정1품 · 종1품 관원의 정실부인에게 내려진다. 이순신은 우의정으로 추증될 때 가장 높은 품계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기 때문에 방씨 또한 외명부에서 제일 높은 품계인 ‘정경부인’ 작호를 받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에 대한 사후 평가는 시대를 거치며 더욱 높아졌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추앙받았고, 조정은 그를 선무 일등공신에 책봉했다. 백성들과 부하 장수들도 사당과 타루비를 세워 그의 충성과 희생을 기렸다. 조선 후기에는 단순한 장군을 넘어 ‘충신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인조는 시호 ‘충무’를 내렸고, 숙종은 아산 현충사에 사액을 내려 국가 차원의 제사를 이어가게 했다. 특히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여 그의 업적을 국가적으로 정리·찬양했다.

1604년(선조 37) 이순신을 선무일등공신에 녹훈할 때 좌의정으로 추증하면서 내린 교지이다. 이순신은 전사한 직후인 1598년(선조 31) 12월 우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이때 다시 좌의정으로 증직되었고, 정1품 공신에게 내려지는 부원군 칭호도 함께 받았다. 부원군 봉호는 덕수 이씨의 관향 경기도 개풍군 덕수리(지금의 개성시 판문군 덕수리)를 따라 ‘덕풍德豐’으로 정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을 공신으로 녹훈한 이듬해 1605년 노비를 지급하면서 함께 내려준 교지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신이 되면 공신교서 또는 녹권을 주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은전을 내렸다. 또한 부모와 부인의 품계를 올려주고, 후손들에게도 사면의 혜택을 주었으며, 노비와 전답田畓 등 경제적인 혜택도 내렸다. 이순신은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어 노비 13구, 전지田地 150결, 은자 10냥, 옷감 1단, 말 1필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했던 바로 지급하지 못하고, 이듬해에 노비 13구 중 8구만 우선 하사하였다. 이때 하사한 노비들은 전라도 부안, 충청도 온양 · 직산 · 천안 · 은진 등 인근 지역의 관노와 관비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장군의 시호 ‘충무(忠武)’는 삼국지 영웅 제갈공명의 ‘충무후(忠武侯)’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인물 중 한국인에 제일 좋아하는 인물로 손꼽히는 제갈공명에 비견되고 있음을 알 수 이다.

1643년(인조 21) 이순신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린 교지이다. 이 교지를 받기 전까지 이순신은 시호가 없었기 때문에 선조 대에 여수 전라 좌수영성 인근에 세운 최초의 사액사당 ‘충민사忠愍祠’를 따라 ‘충민공’으로 부르기도 했다. 병자호란 후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충신들, 특히 이순신이 다시 주목받았고, 국가 차원에서 그에 대한 현창이 추진되었다. 이순신에게 시호를 내린 것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595년(선조 28) 1월 21일 선조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군량 확보와 백성의 구휼을 위해 둔전이 중요함을 당부하는 글을 내린 것이다. 선조는 둔전의 수확량을 물어 보며 둔전의 구체적인 운영 방침에 대한 지침을 내렸다. 이 해는 전쟁 발발 4년째로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일본군이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수군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수군은 군역이 고되어 병력의 보충도 쉽지 않았고, 이미 오랜 군역으로 피로하고 군량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이미 1593년부터 둔전 경작을 허락해달라는 장계를 여러 차례 올려, 돌산도 등 남해안 인근의 둔전을 경작하며 피란민의 생계와 군량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축하하며 어머니 초계 변씨가 이순신에게 노비와 토지, 집을 나누어 준 사실을 적은 문서이다. 더불어 이전에 이순신의 형과 동생에게 증여한 재산의 구체적인 내역도 다시 확실하게 밝혔다. 원래 문서는 1584년(선조 17) 화재로 불타버려서 1588년(선조 21)에 다시 작성한 것이다. 문서에 보이는 노비는 총 22명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으며, 노비와 함께 토지도 나누어 준 것으로 미루어 이순신 집안의 재산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선조 때 미처 지급하지 못한 노비 5구를 1653년(효종 4)에 추가로 내리면서 함께 준 교지이다. 이순신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이후 50년 가까이 지나서야 약속받은 노비 13구를 모두 이순신 집안에서 받은 것이다. 앞서 1605년(선조38)에 여러 지방에 있는 노비가 지급되었던 데 비해서 예빈시· 사재감 · 종친부 등 중앙 관부의 관노와 관비가 지급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1793년(정조正祖 17) 7월에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하며 내린 교지이다. 정조는 “충무공처럼 충성심이 뛰어나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음에도 그 사후에 아직 영의정으로 추증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라며 이순신에게 영의정 벼슬을 내렸다. 이순신에 대한 추모 사업은 정조 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6년
- 구글 Gemini 3 Flash 응답 내용 (2026.05.23 확인)
- OpenAI, <ChatGPT (GPT-5)>의 답변, 2026년 5월 23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