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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 불교공예,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구

사리(舍利)는 시신을 화장하여 나온 유골이며, 사리구(舍利具)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작은 탑, 경전과 구슬, 장신구 등의 공양물을 뜻한다. 사리는 일반적으로 유리나 수정용기에 담고, 그 용기는 다양한 재질의 용기에 넣어서 탑에 안치한다. 사리구는 불국사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 미륵사지석탑 등 웬만한 유명한 탑에서는 대부분 발견되고 있다. 발견된 사리구들은 금속세공을 비롯하여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었기때문에 예술적 가치 또한 상당히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석탑은 해체/보수하기가 쉽지 않고 도굴하기 또한 상당히 어렵고, 불교신앙에서 중용성이 아주 높기때문에 최근까지도 미륵사지석탑의 경우처럼 석탑의 해체/보수과정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고 있다.

<감은사터 동탑 사리구(보물), 경주 감은사>

감은사지 삼층석탑 동탑 해체.수리시 발견된 사리구이다. 조각수법이 상당이 섬세하고 뛰어난 걸작이다. 당시 활동했던 조각가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리기>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기는 고귀함을 상징하는 닫집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사리함>

4면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 수법이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과 비슷하다.  사천왕상의 표현 기법은 중앙아시아의 것과 비슷한 형태로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감은사 터 동탑 사리구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682년경, 보물)
1996년 감은사 동 삼층석탑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것으로 수정사리병-내함-외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리함은 사천왕이 배치된 최초의 사리구이며 탑을 든 북방 다문천왕을 중심으로 방위를 결정한다. 내함의 기단 위에는 화염보주 주위로 사천왕 및 승려상이 있고, 기단에는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팔각당형 사리구(통일신라 9세기, 황룡사지)>

팔각형 목조건물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당시의 건축양식을 추론할 수 있다.

<빙산사지 오층석탑 사리구( 통일신라 9세기, 빙산사지 출토)>

<황복사 터 삼층석탑 사리구 (경주, 통일신라, 692년경)>

통일신라 성덕왕이 신문왕, 효소왕, 신목대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이 있는 사리구이다. 성덕대왕신종의 주인공인 성덕왕은 불교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복사 사리구와 같이 봉안된 고배와 유리구슬>

황복사는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 효소왕이 세운 절이다. 이 사리갖춤은 효소왕이 사망하자 706년에 성덕왕이 추가로 봉안한 것이다. 이 사리함은 704년 한역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형태, 금동 외함의 네 면에 99기의 탑이 점선으로 묘사되었다. 뚜껑 안쪽에는 신문왕, 효소왕, 신문왕의 왕비인 신목대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안하였다는 글귀가 남아 있다. 금제 불상 2점, 고배와 녹색 유리구슬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구 외함(통일신라 8세기, 경주출토)>

4면에 사천왕상이 음각선으로 새겨져 있다.

<사리병과 사리>

<탑과 불상>

사리구에는 탑과 불상이 같이 모셔졌다.

이 사리갖춤은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인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39호)에서 1996년 출토되었다. 금동 사각 외함의 네 면에 각각의 방위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사리함 안에는 금동제 구층소탑과 여래입상,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종이조각이 있었으며, 사리는 여래입상의 대좌 아래 안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금동사리병.납석제호(고려)

라마탑형 사리구(고려14세기).

라마교가 번성했던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리그릇 (부여, 고려 14세기),

부여에 있는 보광사지탑 발굴된 금동제팔각당형사리구와 사리병이다

봉인사 부도 사리구(보물),

조선중기 광해군때에 조성된 봉인사 부도에서 출토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리구로 구성요소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만든 수법이 뛰어나서 조선시대 사리갖춤임에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봉인사 부도 사리구(奉印寺釋迦世尊浮屠舍利具, 조선, 보물)
이 사리갖춤은 광해군 때 왕실에서 세운 봉인사 석가세존 부도에서 출토된 것이다. 봉인사 부도는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87년에 되돌아와서 현재 경복궁에 자리하고 있다. 사리는 수정 사리병에 넣어 유제, 은제 그릇에 크기순으로 차례로 담아 마지막으로 대리석제 그릇에 넣고 비단 보자기로 싸 봉인하였다. 은제 그릇 뚜껑에는 용무늬가 새겨져 있고 밑바닥에 1620년 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만들었다는 글귀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자 사리합.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리갖춤이다.

정덕5년명 사리갖춤(조선시대, 1510년)

 사리그릇 (조선시대, 16~17세기)

사리갖춤. 경기도 안성에서 출토된 사리구.

탑의 조성내력을 적은 탑지.

이 사리갖춤은 1972년 경기도 안성에 있는 어느 탑에서 수습되었다고 한다. 원통모양의 청동제 사리그릇은 윗단과 아랫단의 2단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 향목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호리병 모양의 사리병은 사리그릇 윗단에서 발견되었으며, 주머니에 넣어져 있었다. 한편 곱돌제의 탑지에 새겨진 글씨에 의해 이 사리갖춤은 997년 장명사의 오층석탑에 봉안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탑(塔)은 부처의 사리(舍利)를 모시는 곳으로 불교에서 불상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상징이자 신앙의 대상물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석가모니불이 열반에든 뒤 그의 제자와 신도들은 부처의 시신을 화장하여 스투파(탑파,탑)에 안치하였다.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는 탑은 초기 불교 사원인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래 전국적으로 많은 사찰과 탑이 조성되었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신앙의 중심이 불상과 불상을 모신 불전으로 바뀌면서 사리를 모신 탑의 조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는 부처의 사리는 그 숫자가 유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초에 만들어진 공양탑>

11층 목탑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불전안에 두는 사리탑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2층으로 된 기단부.

앞면 3칸구모의 목조건축물 형태로 각 모서리에 사천왕상을 세워놓고 있다.

기와를 올려놓은 모습의 탑신부.

상륜부.

공양탑(金銅多層小塔, 고려전기),
높이 74.5㎝의 금동 소탑으로 불전안에 두는 사리탑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탑은 사각형의 기단과 11층의 탑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단부의 한쪽에 계단을 놓아 탑으로 연결하고 있다. 초층탑신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부착하였다.

사리구(舍利具)
사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이며, 탑 속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용기가 사리구이다. 사리는 불교경전에 따라 금, 은, 동, 석으로 만든 용기에 차례로 넣어 탑에 안치한다. 우리나라에는 6세기 중엽에 사리가 전래되었고, 현재까지 백제와 신라의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실 차원의 사리봉안이 많았으며 상자모양, 집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사리구가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원형과 팔각형, 라마탑형의 사리구가 만들어졌고, 청자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원형합이 많이 제작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