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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대도호부 관아(사적)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에 있는 강릉대도호부관아(사적)이다.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강릉지역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936년(고려 태조19)에 강릉을 동원경이라 칭하고 임영관을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강릉은 조선초에는 대도호부였으며 각종 정치지적인 이유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나, 대부분 대도호부가 구한말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강릉은 영동지방에서 평야가 가장 넓은 곳으로 선사시대 이래로 중심이 되었던 도시이다.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태조대에 임영관이 세워졌을 때 83칸에 이르는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여려차례 보수와 중수를 하였으먀,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학교가 세워지면서 객사문과 칠사당을 제외하고 다른 건물들은 헐렸으며, 그 목재들은 경포호 방해정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에 사용되었다. 1998년 관아건물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한 후 객사 건물 등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릉대도호부 객사 정문인 임영관 삼문(국보)>

고려시대 건축양식인 주심포공포를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그 모습이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안정적이고 단아하며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대청>

객사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볼 수 있는 중대청이다. 다른 지역 관아에서는 볼 수 없는 건물로 관찰사가 임시로 근무했던 곳이라 한다. 강릉을 방문한  고위관료 등 방문했을때 머물렀던 곳으로 관찰사를 비롯하여 고관들의 방문이 잦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고려 건축양식으로 전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양식이다. 건물의 용도에 대하여는 관찰사의 순력 등을 위한 장소로 추정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출처:강릉시청>

<강릉대도호부 객사인 임영관>

가운데 국왕의 위패를 모시는 중대청을 두고 양쪽에 좌.우 익랑인 서헌, 동대정이 있는 것은 다른 지역의 객사와 같지만 건물 앞쪽에 전대청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건물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허물어지고 현재의 건물을 최근에 발굴.조사과정을 거쳐서 옛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강릉 객사 중심 건물인 정청은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공간으로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큰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정청>

“임영관(臨瀛館)”이라 적힌 현판은 공민왕이 강릉지방을 방문했을 때 쓴 글씨라고 한다.

<동쪽편 익랑인 동대청>

앞면 4칸 규모의 큰 건물로 온돌방과 연회를 할 수 있는 넓은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2품 이상의 관리들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좌측의 서헌과 더불어 사신 및 중앙관료들의 숙식 및 연회, 재판, 국가 경사 및 애사시 망곡 등을 하던 곳이다. 구조는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헌보다 규모가 더 크다. 이용규정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수교집록에 의하면 문.무관 구별없이 사신 일행 중 품계가 2품이상은 동대청을 이용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서헌보다 위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출처:강릉시청>

<서쪽편 익랑인 서헌>

앞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온돌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3품이상의 관료들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우측의 동대청과 더불어 사신 등이 숙식을 하던 곳으로 구조는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대청보다 규모가 작다. 이용규정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수교집록에 의하면 사신 일행 중 정3품 관료들이 서헌을 사용했다고 한다. <출처:강릉시청>

<뒤에서 본 모습>

강릉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옛날부터 피서를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고관, 선비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접대하느라 아주 바빴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의 객사에서는 객사를 사용할 수 있는 직위를 설명하지 않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그 직위를 설명해 놓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2000년대 들어서 복원한 건물로 문화재로서 큰 의미는 없지만 강릉의 사회와 문화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강릉지방은 관동팔경 유람을 떠났던 손님들이 많이 찾았던 관광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강릉지방을 둘러보면 관아 객사는 법률 등에 제한을 받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짓지는 못했지만, 강릉향교와 지역유지의 대저택인 선교장 등은 다른 지역에 비해 건물규모가 크고 많은 방들을 두고 있다.

<강릉 칠사당(보물)>

강릉대도부 관아 건물 중 객사문과 함께 남아 있는 칠사당(七事堂)이다. 사당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관청건물이다. 조선시대 관아는 객사와 동헌, 내아를 기본으로 하여 이방청, 작청 등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건물부터 여러 종류의 건물이 있는데, 칠사당은  시대에 따라서 다른 용도로 사용된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에 불타버린것으로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군영 등의 용도로 사용하다가 1950년대까지 시장 관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반 관아 건물 형태와 가정집의 형태가 섞여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칠사당 출입문>

행랑채와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다.

<칠사당 행랑채>

실무관리들이 사용했던 방들과 창고 등으로 이루어졌다.

<칠사당 행랑채>

<칠사당 누마루>

형태는 구한말 사대부들이 살던 한옥의 누마루와 비슷하지만 실무관리들이 사용한 공간으로 1칸규모의 작은 건물이다.

<대청마루와 온돌방>

칠사당은 앞면 6칸 규모로 넓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실무관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실용적으로 지어졌다.

<대청마루>

실무 관리들이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처마와 공포>

구한말에 지어진 건물로 공포는 이익공양식을 사용하였다.

<옆면>

온돌방 한쪽편에 아궁이를 두고 있으며, 그 위에 문서나 책자 등을 보관할 수 있는 다락방을 두고 있다.

<온돌방 뒷편 작은 마루>

 강릉대도호부 관아, 사적,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강릉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