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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부용지와 주합루 그리고 영화당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세에 맞게 지어진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창덕궁 후원은 인공적인 면이 많은 경복궁 경회로 연못이나 중국과 일본의 정원과는 달리 자연친화적인 조경을 보여 주고 가장 한국적인 정원이다. 지금은 창덕궁 정전과 국왕이 집무를 보고 가족이 생활하던 편전과 침전, 동궁을 지나서 후원으로 들어갈 수 있어 한때는 ‘비원(秘苑)’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동궐내에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많았던 개방된 영역이었다. 실제로 부용지에는 궐내각사라 할 수 있는 규장각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영화당은 경복궁 경회루처럼 국왕이 신하들을 비롯하여 일반인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거나, 특별과거를 실시하고, 활쏘기대회나 춘당대에 있던 논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던 곳이다. 그리고 춘당대 동쪽에는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자리잡고 있다.

<부용지와 주합루>

창덕궁 후원에서 첫번째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은 부용정과 주변 전각들일 것이다. 이곳은 후원에서도 경치가 가장 뛰어나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 계곡에 조성한 연못 중 가장 큰 규모로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연못의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연못 동쪽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화당이 있고, 영화당 앞쪽으로 지금은 창경궁 담장과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어두워 보이지만, 춘장대까지 넓은 마당이 있었다. 연못 북쪽에는 정조가 즉위한 해에 국왕의 통치를 보좌할 정책과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규장각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남쪽으로는 국왕이 개인적으로 사색을 하거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공간을 지은 작은 정자인 부용정이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다. 연못은 서북쪽 계곡의 물이 용두로 된 석루조를 채우고 넘치는 물은 연못의 동쪽 돌벽에 있는 출수구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동궐도에 표현된 부용지와 주합루 주변>

오늘날 부용지 주변에는 많은 수목들이 자라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동쪽으로 넓은 마당이 있고, 지금은 춘당지로 바뀐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논과 넓은 후원이 있었던 춘당대와 연결되어있다.

창덕궁 후원은 주례 ‘고공기’에 의거하여 세웠던 경복궁이나 중국의 궁궐과는 다른 풍수지리사상이 반영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이는 창덕궁이 법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상왕을 비롯한 왕실 어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세워졌던 궁궐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창덕궁이 주는 편안함은 역대 왕들이 창덕궁을 가장 선호했고,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고 창덕궁을 법궁으로 삼았던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후원은 창경궁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으로 4개의 골짜기에 조성한 4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창덕궁에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

<부용지(芙蓉池)>

 부용지는 연못의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창덕궁 후원에서는 제일 큰 연못으로 동쪽에는 큰 정자인 영화당이, 북쪽에는 주합루를 비롯한 규장각 건물들이, 남쪽에는 작은 휴식공간인 부용정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국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을의 휴식공간으로 조성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버린 후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법궁 역할을 하면서 국왕이 주최하는 연회를 비롯한 공식 행사를 할 수 있는 경복궁 경회루 영역과 비슷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용지와 주합루
후원의 첫번째 중심지로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에서는 때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부용정은 연못에 앞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출처:문화재청>

<영화당(映花堂)>

창덕궁 낙선대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첫번째로 보이는 공간인 영화당이다. 부용지 동쪽에 위치한 영화당은 동궐에서도 개방된 공간으로 조선시대에는 창덕궁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궁궐바깥에서 춘당대를 통해서 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서 본 모습>

<앞에서 본 모습>

<부용정에서 본 모습>

영화당은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왕의 휴식공간으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5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동궐이 법궁 역할을 하던 시기에 경복궁 경회루처럼 국왕이 주최하는 연회나 각종 행사가 열렸던 장소이다.

<처마와 공포>

현판 글씨는 영조가 직접 쓴 어필이라고 한다.

<영화당 내부>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앞.뒤에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툇마루>

선조의 오언절구시를 새긴 현판

창덕궁 영화당 벽에 걸렸던 현판으로 선조의 어필이다. 오언절구시를 각 절구마다 4개의 현판으로 만들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화당에서 본 마당>

<영화당과 마당>

춘당대라는 넓은 마당이 있어 국왕이 주최하는 특별 과거시험이나 활쏘기시합, 국왕이 주최하는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지금은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그런 느낌은 없다.

영화당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2년(1692)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영화당은 서쪽에 연못이 있고 동쪽에는 널찍한 춘당대(春塘隊)가 있어 역대 임금이 이곳에서 많은 행사를 베풀었다. <출처: 문화재청>

<규장각 건물들>

부용지 북쪽 언덕에는 정조가 학술연구기관으로 세운 규장각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정조는 즉위 원년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세종이 경복궁에서 공식연회가 열리는 장소인 경회루 앞에 집현전을 세웠던 사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내 건물로는 2층 누각으로 세운 주합루를 비롯하여 서쪽에 서향각, 동쪽에 작은 정자인 천석정을 두고 있으며, 출입문으로 어수문을 세워두고 있다.

<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의 2층 누각이다. 정조는 박식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서책들을 많이 출판하였다. 주합루는 좋은 환경에서 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정조의 의도를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주합루 아래층에 규장각이라하여 수만권의 책을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어수문에서 본 주합루>

5칸 중 가운데 3칸은 서고와 분합문이 있는  방으로 꾸몄으며 둘레에 넓은 마루를 두어 부용정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규장각’ 현판>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규장각’ 현판. 원래 주합루 1층에 걸려 있던 것이라 한다.

<서향각(書香閣)>

주합루 서쪽에는 규작각 각신들이 근무했던 관아 건물로 보이는 서향각이다. 현재 남아 있는 종친부나 삼군부 본청 건물과 비슷한 규모이다. 다른 관아와는 달리 행각을 두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궐내각사 서쪽편에 검서청과 같이 있는 규장각 건물과 이곳을 같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은 국왕과 함께하는 경연이나 학술토론 행사를 했던 장소로 생각된다.

<어수문(漁水門)>

어수문(漁水門)은  흔히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고기와 물을 비유하는 하는 의미와 등용문의 의미를 같이 가지고 있다.  이 문은 일종의 3개의 대문을 가진 일각문으로 주합루에 비해 아담하고 화사한 장식이 특징이다.

<어수문과 취병(翠屛)>

<취병>

취병
취병은 조선시대 독특한 조경기법의 하나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이다.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주합루의 취병은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의 그림을 토대로 하여 『임원십육지 관병법』에 기록되어 있는 제작 기법대로 대나무 틀을 짜고 신우대를 심어 재현한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어수문, 취병, 주합루>

주합루는 창덕궁의 공식 행사장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당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취병이라는 담장을 두르고 어수문이라는 출입문을 두고 의도적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주합루 어수문은 작은 출입문이지만 국왕이 주관하는 공간으로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어수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문이고 양쪽에 신하들이 출입하는 작은 문을 두고 있다 .

어수문과 주합루
주합루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 작은 어수문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출처:문화재청>

<경복궁 경회루 연못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부용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이다.’라는 동양의 우주관을 보여주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 정원의 연못이다. 가운데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수목들이 심어져 있는 둥근 섬이 있다. 이는 신선들이 논다는 삼신선산의 하나인 방장(方丈)이나 봉래(蓬萊) 또는 영주(瀛州)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부용정>

관아 건물이라 할 수 있는 주합루와 공식 연회가 열렸던 영화당과는 달리 부용정은 국왕 개인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형상으로 국왕이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건물은 연못을 1칸이 돌출된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처마와 공포>

<부용정 내부>

<물고기가 새겨진 석물>

<사정기비각>

비석에는 부용지를 만들게 된 배경과 과정이 새겨져 있다. 세종 6년에 영순군과 조산군을 시켜 우물을 찾게 했는데 그 때 찾아낸 4곳의 우물에 마미.파려.유리.옥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퉁이에 있는 우물>

부용지는 땅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를 수원으로 하고 있다.

<석누조>

비가 많이 올 때는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배수구를 통해 연못으로 흘러든다.

<부용지와 부용정>

부용정
부용지에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그고 있는 부용정은 사방으로 지붕이 돌출된 열 십자(十)자 형태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1792년 건립된 부용정은 十(십)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규장각 각신들과 모임에 정조가 직접 짓고 쓴 정조어제어필>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1792년 정조와 신하들이 짓고 쓴 친필 시를 모아 연결한 것이다.

내원상화임자갱재축
1792년 3월 21일에 정조는 규장각 관원과의 꽃구경 모임을 가졌다. 정조는 규장각 관원에 대한 두터운 신뢰와 우대를 표명하며 그 자제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어 함께 모임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제학 오재순과 그 아들을 비롯한 27인의 신하와 자제가 참여하였는데, 조선후기 명문장가인 남공철이 정조의 스승인 남유용의 아들이란 사유로 특별히 참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날 모임에서 정조는 신하들과 농산정에서 꽃구경을 하고 수택재(부용정)에서 고기를 낚았으며 춘당대에서 활을 쏘았다. 이후 주찬을 내리고 운자를 나누어 연구시를 지어 그 즐거움을 기록하였다. 이 <내원상화임자갱재축>은 1792년 당시 정조와 신하들이 짓고 쓴 친필 시를 모아 연결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후원
태종의 창덕궁 당시에 조성되어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 버리고, 1623년 인조 때부터 역대 왕들에 의하여 개수.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삽입시켜, 최소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서 자연을 더 크게 완성시킨 절묘한 솜씨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드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으로 연결된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정원이었다. 또한 여러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장소이기도 했다.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로 연회를 열고 활쏘기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왕이 참관한 가운데 군사훈련도 행해졌고, 왕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기도 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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