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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박물관 무령왕릉실] 무령왕릉의 발견

무령왕릉은 웅진백제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1971년 발굴.조사된 무령왕릉에서는 입구에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묘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이 기록을 근거로 무령왕릉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고분 중 유일하게 그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다. 석실분인 중국 북조나 고구려 고분과는 달리 구운벽돌을 쌓아 널방과 널길을 만든 전축분이다. 이는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무덤 양식으로 당시 양국간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왕릉 입구에는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 석상과 매지권, 무덤의 주인을 적은 묘지석, 토지신에게 돈을 지불했음을 말해주는 동전인 오수전, 제기 용도로 보이는 청동 그릇 등이 놓여 있고, 안쪽 널방에는 시신이 있던 왕과 왕비의 목관이 있었다. 또한 관장식, 큰 칼, 팔찌를 비롯한 장신구 등 많은 유물들 놓여 있었다.

공주박물관 1층 무령왕릉실 입구.

국립공주박물관은 백제 웅진기 도읍이었던 공주와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그 중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무령왕릉 발견 당시 송산리 고분군 전경(박물관 자료사진).

2016년 무령왕릉.

무령왕릉 입구 발견 당시 모습.

벽돌로 입구를 막아 놓고 있다. 중국 남조에서 성행했던 벽돌로 쌓아 굴방을 만들었던 무덤형식을 하고 있다.

2016년 무령왕릉 입구.

무령왕릉 입구 개봉 전 제사를 지내는 모습

무령왕릉 입구의 폐쇄전돌 제거 모습.  폐쇄전돌 제거 후 모습.

무령왕릉 입구 노출 직후 취재진 모습.

후일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남겨놓았던 장면이다. 고고학 발굴 현장에 수많은 취재기자들이 전문지식 없이 밟고 다니는 후진적인 사회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령왕릉 입구 조사 완료 모습.

공주박물관 무령왕릉실 입구.

왕릉 입구 널방 형태를 모방했다.

무령왕릉 구조.

무령왕릉 내부 널길과 널방 모습(복원)


무령왕릉 석수 발견 모습 (공주박물관 사진자료)

무령왕릉 입구 모습(재현).

입구에 왕과 왕비 묘지석, 그리고 무덤을 지키는 상스러운 동물인 진묘수가 무덤을 지키고 있다. 묘지석 위에는 토지신에게 토지를 샀다는 의미로 오수전을 올려놓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제기

그 앞에는 1)동제그릇, 2)동제수저, 3)청자뚜껑항아리, 4)청자항아리, 5)동제그릇이 놓여 있다. 제사를 지내는 제기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발굴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박물관 사진자료)

무령왕릉 석수, 국보

중국 신화에 나오는 상스러운 동물을 형상화한 석상으로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진묘수이다.  무덤이나 궁전 앞에 세워두는 석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후대의 왕릉이나 궁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중국과의 교류를 잘 보여준다.

묘지석(왕), 국보

무녕왕릉 입구에 있는 지석은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원래는 도교 사상이 반영된 내용으로 토지신에게 이 땅을 샀음을 문서로 작성하여 돌에 새겨 놓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뒷면에 무덤의 주인에 대한 기록을 추가하였다고 한다.

묘지석(왕비), 국보

묘지석(매지권), 국보

묘지석(간지도), 국보, 왕묘지석 뒷면.

나무관
무령왕이 누워있던 나무관은 길이가 262cm 크기이며 다섯 장의 나무 판으로 뚜껑을 만들었다. 왕비의 것도 모양은 비슷하지만 뚜껑을 세 장의 나무 판으로 만들었고 길이가 250cm 정도로 왕의 것보다 약간 작다. 무령왕릉의 나무 관은 뚜껑과 옆판 등에 여러 장의 나무판을 조립하고 못으로 박아 고정시켰으며 옆면에는 관을 운반할 때 쓰기 위한 관 고리를 각각 여섯 개씩 달았다. 이 나무 관들에 쓰인 관 고리와 못, 꽃모양장식 등은 모두 금.은박으로 입혀져 나무 관 전체가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관의 재료로 쓰인 나무의 둘레지름은 130cm, 나이는 300년 정도로 추정되는데 종류를 분석한 결과 일본 남부지방에 많이 자라는 침엽수 계통의 금송(金松)이었음이 밝혀졌다. <출처:공주박물관>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복원).

잘 다듬은 판재를 짜맞추어 상자모양의 관을 만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판재를 짜맞춘 뚜껑을 덮었다. 검은색으로 칠을 하였으며, 금.은박으로 입혀진 관고리, 못 등을 사용하여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령왕릉 목관 구조,

뒷쪽에서 본 목관.

금송(金松)
무령왕릉 나무 관에 사용된 재료인 금송은 잎이 푸르고 크게 자라는 상록수이다. 일본에서는 코오야마키라고 부르는데 남쪽으로는 미야자키현, 북쪽으로는 후쿠시현을 한계로 하는 일본 고유의 품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금송은 재질 또한 매우 튼튼해서 일본내에서도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던 나무 관의 재료였다. 무령왕과 왕비 나무 관에 쓰인 금송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왜(倭)로부터 백제에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왜의 대화정권(大和政權)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백제는 긴밀한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금송과 같은 좋은 품질의 목재를 왜로부터 공급받았을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목관.

일본에서 자라는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옆쪽에 고리가 달려 있다.

관 고리.

목관 덮개 부분. 여러 장식들의 흔적이 보인다.

발굴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박물관 사진자료)

관못(꽃모양)

관못(원형), 관못(사각형)

관못(꽃모양 장식)

관고리(왕비)

꽃모양 은장식.

꽃모양 은장식
나무관 위와 바닥에서 흩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달개가 달린 것은 그 수가 적고 모두 지름 2cm 정도의 작은 것들이다. 꽃잎의 개수는 8개에서 11개까지 일정하지 않다. 꽃모양 은장식은 크기나 발견위치로 보아 나무 관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나무 관의 뚜껑과 옆판 안쪽에는 금박이 입혀진 작은 청동 못들이 한 줄 혹은 세 줄씩 박혀있어 관을 장식하는데 이 꽃모양 은장식이 쓰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무령왕릉에 쓰인 벽돌.

무령왕릉실 입구에 재현해 놓은 벽돌.

‘사 임진년작’ 글자있는 벽돌,

‘사 임진년작’ 글자있는 벽돌의 글자는 매우 예리한 도구로 새긴 것이다. 벽돌에 새겨진 ‘임진년’은 512년이다.

글자 있는 벽돌

무늬 있는 벽돌

무늬 있는 벽돌

무령왕릉
1971년 7월5일 공주시 금성동에 자리한 송산리고분군 안에서 역사적인 발견이 이루어졌다. 송산리 6호 무덤의 배수로 공사 도중 벽돌이 눈에 띄면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무덤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이 무덤에서는 무덤의 주인을 알려 주는 묘지석이 발견되었고 이를 근거로 이곳이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묘지석의 발견으로 무령왕릉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왕릉이 되었다. 무령왕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전축분(塼築墳)으로, 벽돌에는 주로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무덤 안에서는 왕과 왕비를 안장한 2개의 나무 관과 함께 금으로 만든 관장식(冠裝飾), 자루에 용.봉황 무늬를 장식한 큰 칼, 안쪽에 만든 장인의 이름(多利)과 만든 경위가 새겨진 은팔찌 등 모두 108종 4,687점이라는 많은 양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이 부장품들 중에 17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또한 귀고리를 비롯한 금속 공예품의 정교한 제작기술에서 고구려.신라와 구분되는 백제 문화의 독창성을 살펴볼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중국 도자기는 중국 남조 계통의 벽돌무덤 양식과 함께 무령왕이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로,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