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에는 왕과 왕비가 나란히 누어 있었다. 묘지석에 따르면 왕이 죽은지 3년 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과 마찬가지로 금제관식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무령왕과는 달리 큰칼 대신 작은 손칼이 3점 있었으며, 귀고리, 은팔지, 목걸이 등 장신구들이 상대적이 많이 놓여 있었다. 출토된 장신구들은 웅진기 백제의 뛰어난 금속 공예기술과 예술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무령왕비는 사비기 백제를 이끌었던 성왕의 어머니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들이 전시된 무령왕릉실.
무령왕비 금제관식(복제품), 국보, 삼국시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장식이다. 무령왕 관장식과 마찬가지 불꽃모양을 하고 있다. 관모에 꽂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무령왕비 금제관식.
왕비의 관꾸미개는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가 대칭형의 구도로 표현되어 있고, 달개는 달려 있지 않다.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무령왕비 금귀걸이, 국보,
무령왕비 금귀걸이는 2쌍으로 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짧은 2줄의 장식이 달려 있고, 끝에 탄환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무령왕비 금귀걸이, 국보.
다른 1쌍은 탄황작식이 없이 잎사귀 모양의 장식과 둥근 옥이 달려 있다.
무령왕비 목걸이, 국보, 삼국시대 백제.
목걸이는 마디가 9줄인 것과 7줄인 것 1쌍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9줄인 목걸이가 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령왕비 목걸이,
누금기법을 사용하여 금알갱이를 붙여서 만든 화려한 목걸이다.
작은 고리를 여러 개 붙여서 속이 빈 공모양으로 만들고, 그 위에 다시 수많은 금알갱이를 누금기법으로 하나하나 붙여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둥근 원판이 달려있는 귀걸이.
톱니모양의 금팔찌.
크기가 작아 왕비가 어린시절에 사용했거나 가족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톱니모양 은팔찌.
고리모양 팔찌.
고리모양 팔찌
금.은팔찌
팔찌는 금으로 만든 것과 은으로 만든 것이 있고 바깥 테두리를 톱니모양으로 장식한 것과 고리로 연결한 것 등 그 형태가 여러가지이다. 특히 톱니모양 팔찌는 왕비의 오른쪽 팔목과 발받침의 북쪽에서 각각 한 쌍식 출토되었으며 그 크기가 매우 작아 눈길을 끄는데, 이 팔치의 지름이 약 3.8~4.5cm 정도여서 어른의 팔목에 끼우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아마 왕비가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덤에 묻혔거나 왕비의 어린 자녀 등 가족이 가지고 있던 팔찌를 왕비의 무덤에 넣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공주박물관>
무령왕비 은팔찌, 국보, 삼국시대 백제.
바깥쪽에는 용무늬를 안쪽에는 글씨를 새겨 놓고 있다. 글자는 팔찌의 주인, 만든 시기, 만든 사람의 이름이다. 제작수법과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글자가 새겨진 팔찌로 왕비의 왼쪽 손목부분에서 발견되었다. 팔찌의 안쪽에 팔찌를 만든 때와 만든 사람의 이름, 팔찌의 주인 등 그 제작 연유에 대한 글을 세로방향으로 새겼다. 그 내용은 “경자년(520) 2월에 다리(多利)라는 장인이 대부인(大夫人), 즉 왕비를 위하여 230주이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경자년은 왕비가 죽은 병오년(526)보다 6년 전이며 문장 마지막에 230주이(主耳)는 무게 단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무령왕비 장식손칼, 삼국시대 백제.
장식손칼
무령왕릉에서는 모두 4점의 장식손칼이 출토되었는데, 왕의 허리춤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금.은장식손칼 1점, 왕비 쪽에서 금.은장식손칼 2점, 은장식손칼1점이 출토되었다. 흔히 일반 손칼과는 달리 큰칼이나 금동신발 혹은 관식(冠飾) 등과 발견되어 둥근고리큰칼과 마찬가지로 위세품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유리동자상, 삼국시대 백제.
호신용으로 중국 남조시대에 이런 물건을 지니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남조와의 문화교류를 잘 보여준다.
왕비의 허리부근에서 두 점이 발견되었다. 머리를 깎고 손을 합장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으며 한 점은 하반신이 파손되어 있다. 이 동자상은 왕비가 살아 있을 때 부적과 같이 몸에 지지고 다니거나 장신구에 매달아 왕비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수호신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남조시대 중국에서도 이런 물건을 몸에 지니는 풍습이 유행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옹중(翁仲)’이라 불렀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백제에서 이와 같은 동자상을 몸에 지녔던 것은 그 무렵 중국과 백제의 풍속이 많이 닮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동자상은 불교의 승려 또는 도교의 도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왕비와 어금니
무령왕릉에는 왕과 나란히 왕비가 누워 있었다. 왕비의 묘지석은 왕비가 왕의 사후 3년이 지난 병오년(526) 11월 천명(天命)대로 살다 돌아가셨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무령왕릉 발굴 당시 어금니 한 개가 발견되었고 이 치아는 치의학 전문가들의 분석결과 10대와 20대 시절에 건강하게 자란 30대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천명을 다했다는 묘지석의 기록과 분석 결과가 사뭇 동떨어진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 치아는 사랑니로 치아가 마모되는 정도만으로 나이를 추정하는 것은 힘들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되기도 했다. 무령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무령왕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성왕의 어머니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비는 내세에서의 안식을 비는 극진한 장례속에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금동신발(왕비, 복제품)
발굴 당시 사진
유물을 정리하는 중 금동신발 조각이 새로 발견되어 복원예정이라 한다.
무령왕비 베개(복제품).
표면에 붉은 칠을 하고 금박을 붙여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다. 칸마다 비천상과 봉황, 어룡, 연꽃, 덩굴무늬를 그려 넣았다. 베개의 양 옆에 목제 봉황머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윗부분에 갑, 을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었다.
발받침(왕비, 복제품)
무령왕비 베개의 묵서명
왕비베게 윗부분에 올려진 봉황 아래에서는 붓으로 갑(甲), 을(乙)이라고 쓴 묵서명이 보존처리중에 확인되었다,. 필체는 행서체로 왕비 지석에 새겨진 갑, 을의 서체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갑과 을은 10간의 첫째와 둘째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두 마리 봉황의 암.수 성의 구별이나 좌.우를 가리키는 방위개념으로 쓰인 것으로 보여진다. 비록 갑,을 두글자에 지나지 않지만 웅진도읍기의 유일한 묵서 명문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은 것이라 하겠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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