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있는 고택인 정씨 고가이다. 이곳은 인근 지곡면 개평마을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조선중기 학자이자 문신인 정여창의 후손이 분가하여 터를 잡고 살아온 지역이다. 아주 오래된 고택은 아니고 구한말이 1895년에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ㅁ’자형을 폐쇄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 경북지방이나 한양의 한옥과는 달리 담장으로 안채와 사랑채 영역을 구분하기는 하지만 개방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유교적인 질서가 해체되는 구한말에 지어져서 그런지 집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대저택에서 사용하는 솟을대문을 사용하고 있다.
<함양 우명리 정씨고가>
개평마을에 분가한 정여창 후손들이 살아온 고택이다.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구한말에 지어진 한옥으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솟을대문을 사용하고 있다. 양쪽에 작은 방들을 두고 있다.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대문채>
<안에서 본 모습>
<사랑채 마당>
사랑채와 안채를 담장을 이용하여 공간적으로 분리해 놓고 있지만, ‘ㅁ’자형 한옥에 비해서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사랑채>
사랑채은 앞면 5칸 규모로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쪽편에 안채를 출입하는 문을 두고 있다. 비교적 큰 규모이기는 하지만 잘 지어진 한옥은 아니다.
<중문>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가 ‘ㄱ’자로 꺾여져 있어 외부에서 안마당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중문 사이로 보이는 안마당>
<담장 너머 별채처럼 보이는 건물>
함양 우명리 정씨 고가,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이곳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후손이 정착하여 살던 곳이다. 선생의 7대손 희운이 효리마을 정착한 것은 조선 경종 년간이며, 그 아들 조헌이 분가하여 현재 이 고택이 있는 곳에 처음 초가 4칸을 세웠다. 이후 희운의 4대손 환식이 1895년 무렵에 안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증축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일두선생은 성리학의 종사로 받들어지는 대표적인 명유이며, 희운가의 형제들도 영조대 정희량의 난에 종군하여 충절을 다함으로써 관직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가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동편을 돌아 안채에 출입하게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에는 전통적인 남녀의 생활상의 공간분화가 추구되고 있으며, 안마당과 바깥마당이 구분되고 안채의 부엌은 서편에 두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대문채가 우뚝한 것에 비하여 사랑채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뒤편 가묘는 유교 전통에 충실했던 가풍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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