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는 풍천노씨 대종가이다. 이 집은 풍천노씨 입향조인 조선초 문신 노숙동이 처가인 이 마을에서 처음 자리잡은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일렬로 배치되어 개방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4칸 규모이다. 건물의 구조 등으로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다. 마을의 대종가이지만 저택의 규모나 형태가 소박하면서도 검소해 보인다.
<함양 개평마을 풍천노씨 대종가>
남부지방의 주택형태를 하고 있다. 앞면 4칸 규모의 ‘-‘자형 건물이 나란해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후대에 새로 고쳐 지을 때 개량한옥 형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대문채>
<종가 앞 골목길>
개평마을은 안동과 함께 많은 선비들을 배출한 함양의 대표적인 양반들이 세거지이다. 하동정씨, 풍천노씨와 초계정씨가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다. 조선중기 유학자이자 문신인 일두 정여창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일두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오담고택을 비롯하여 많은 전통 한옥들이 남아 있다. 개평(介坪)이란 말은 두개의 하천 사이에 있다는 뜻이다. 마을 특산물로는 정여창 종가에서 손님을 접대했던 지리산 솔송주가 있다.
<함양 개평마을>.
함양 풍천노씨 대종가,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풍천노씨 대종가는 세조 때의 청백리 송재 노숙동(1403~1463년)선생께서 경남 창원에서 처가(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모집 사위)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사를 오면서 지은 집으로 70여년 전에 재목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여 중수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남부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으로 사대부집답게 ‘ㅁ’자형으로 배치가 되었고 곡간은 초가였으나 기와로 보충하였다. 선생은 풍천노씨로서는 처음으로 함향에 들어와 살게 된 중시조이며 세종 때 벼슬을 시작한 이후 중국 주나라에서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기자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 역사 등 국가의 흥망성쇠와 군사, 교육, 외환 등 윤리와 도덕에 바탕을 둔 사실들을 엮은 “치평요람”을 지어 왕에게 올렸으며 고려사 저술에 참여하였다. 호조예서참판 등 수많은 벼슬을 지내면서도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아 세조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고 상호군으로 보하여졌으며 1701년 함양의 도곡서원에 재향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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